370. 부두 리퍼블릭.-5-
"젠장!"
경기가 끝난 뒤, 죽상으로 숙소에 돌아온 미국팀의 텐션은 그야말로 땅을 뚫고 지하로 들어갈 듯 저조했다.
첫 번째 경기는 제법 괜찮았다.
불리한 주제에도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행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쟁취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경기에서 연달아 패배.
모처럼의 승리가 무색해지는 결과에 그들은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억울한 게 있다면, 분명 이상한 점이 있음에도 아직 미국팀 측에서는 어떤 것도 알아낸 것이 없단 사실이었다.
"이상해요! 분명 뭔가 있습니다!"
"개인전 주제야 그쪽에서 골랐으니 어쩔 수 없다 치겠지만, 단체전에서 두 번 연속으로 그쪽에 유리한 주제가 나오다뇨!?"
내장요리. 그리고 유제품 무첨가 요리Dairy─Free Food.
둘 다 중국 측에 너무 유리하고, 미국 측에는 너무 불리한 주제.
이토록 대놓고 저격이라도 한 듯이 짜인 주제라니, 그냥 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걸리는 게 많았다.
"그 녀석들은 이미 전과가 있지 않습니까!"
"저번에 저희가 찾아낸 증거도 있으니, 그걸로 압박을 가하면……!"
그렇기에 미국팀 팀장 데이비드 얀은 팀원들의 저런 불평도 얼마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 된다."
"예!?"
"왜요, 캡틴!"
불가. 그것이 이 상황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그런 대답에 의문을 갖고 데이비드를 밀칠 기세로 달려드는 팀원들.
실제로 그런 뜻은 없을지라도, 미국인 특유의 체구 탓에 데이비드는 잠깐이나마 미식축구의 라인맨 팀을 상대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금 침착함을 되찾은 그는 흥분한 팀원들을 달래며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을 시작했다.
"끄응. 솔직히 말하마. 우리는 시기를 놓쳤어."
"시기를……."
"놓쳐요?"
"그래."
그게 무슨 뜻이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들을 보며 데이비드가 말을 잇는다.
"일단 우리가 확보한 증거가 정확히 뭔지 아는 사람?"
"그야 저번 플로리다 행사장의 설비조작팀 직원의 증언 아닙니까?"
"그래, 맞아. 그리고?"
"그리고……."
"없지."
후. 데이비드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적어도 국제대회에 나온 팀 하나를 완전히 뭉개려면 제대로 된 증거가 있어야 해 심지어 중국쯤 되는 덩치면 어지간한 증거로는 물러날 생각도 않겠지."
그러나 증언은 제대로 된 증거가 아니다. 데이비드의 말은 그런 뜻을 품고 있었다.
"만약 그 직원을 증언석에 데려다 앉혀놔도 우리가 매수한 거 아니냐는 소리를 피하기 힘들 거야. 그래서 그때는 일부러 소란을 일으키지 않은 거다."
"예? 그런 거였어요?"
"저희는 분명 더 잘난 팀이 안 올라온 편이 우리한테 나아서 그런 건줄 알고……."
"멍청이들아! 고작 그런 이유로 두고 봤겠냐!?"
"아니, 그래도 캡틴이 분명 그때 그렇게……."
"책 좀 읽어라. 적을 속일 땐 아군부터. 어디 나온 말인 줄 알아?"
"아뇨."
"……당당하긴. 그래, 무슨 말을 할까. 아무튼."
잠시 숨을 고른 데이비드가 말을 잇는다.
"그때는 일부러 눈치 못 챈 척 기다린 거야."
"뭘 기다려요?"
"중국 녀석들이 실수하는 걸 말이다. 아마 태국과 했을 때 처음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닐 테지. 원래 못된 짓이나 꾸미는 놈들이 다 그래. 한두 번 별일 없이 넘어가면 다음은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마음을 놓거든."
"헤에……."
"그러니 분명 이번에도 무슨 짓을 할 거다. 그런 확신은 있었어. 그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증거를 잡아서 만천하에 공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데이비드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누군지는 몰라도 우리보다 먼저 사건을 터트린 놈이 있다."
"아, 연초에 시끄러웠던 그거요?"
"그래. 몇 개는 헛다리였지만, 그중에 맞는 이야기도 몇 가지 있었어."
누군지는 몰라도 똘똘한 녀석이었다. 아마 헛다리를 짚은 것도 자신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못하게끔 최대한 넓게 혼동을 주기 위한 계획적인 실수였을 터.
"그럼 전부 그 녀석 탓이라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그 녀석이 그렇게 터트려준 덕분에 중국팀은 상당한 의심을 받았어.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조심해서 해야 될 정도로 말이야. 다만……."
중국팀이 조금만 더 평범한 사고방식과 얇은 심줄을 갖고 있었다면, 그들도 제 발이 저려서 또다시 부정행위를 저지를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아니, 반대로 아주 대범했다.
"들킬 것 같으니까 최대한 조심해서 부정행위를 저지르겠다…… 하, 진짜."
참으로 대단한 결론에 다다르셨구만.
데이비드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미국팀도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다. 나름 있는 인맥, 없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혹시 모를 낌새라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어떻게 데려온 사람들은 물론이요, 일본 쪽 연줄 또한 '더 이상은 파고들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수사가 끊겼다.
이것은 량웨이가 야쿠자를 통해 움직인 탓이 컸다. 일반인이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안 사람들이 일찌감치 발을 빼 버린 것이다.
저번처럼 시설 관리자에게 접근하려고도 해봤지만, 야쿠자의 협박과 일이 끝나고 일정 기간 이내에 사고가 터지지 않을 시 선수금의 두 배를 받기로 약조한 직원은 그들을 만나주지조차 않았다.
결과만 따졌을 때, 찬혁의 폭로가 대단히 커다란 악수가 된 상황이었다.
사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내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좀도둑 전과자들을 본 이웃집 사람이 경찰에 신고했으나, 그 좀도둑들이 끝내 하수도를 통해 집으로 침입하여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완벽범행 계획까지 준비해서 말이다.
이 경우에는 과연 누굴 잘못했다고 해야 할까? 그래. 결국 잘못이 있는 건 도둑들뿐이다.
제대로 된 증거조차 남지 않은 탓에, 그들을 체포해도 범인이라 입증할 수가 없을 뿐.
"그럼……."
"저흰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한단 뜻입니까?"
"……어쩔 수 없지."
데이비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잿밥을 뿌리고픈 마음은 간절했으나, 그 증거를 모으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이며, 또 이 방송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증거를 다 모은다고 하더라도 이미 마지막 결승전이 끝난 뒤가 될 것이다. 앞으로 이 경기 일정은 채 2주도 남지 않았으니까.
"하……."
이렇게 본국에 돌아가긴 싫은데. 어디서 좋은 건수 하나 안 떨어질까.
본인도 허황된 상상이라 생각했지만, 가끔 사람도 꿈을 꾸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 법이다.
문제가 있다면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에 꿈이라고 부른다는 것이겠지.
이루고 싶다고 바랄수록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낙폭은 크다. 그 심정을 직접 피부로 느끼며 데이비드가 한숨을 짓던 그때였다.
─띵동
"어?"
"초인종? 누구지?"
갑자기 그들이 있던 호텔방의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일행의 고개가 돌아간다.
팀원이라고 해도 당장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이 전부고, 다른 일행도 없으니 이 방을 찾을 사람은 없을 텐데.
의아함을 느끼며 문을 여니, 그곳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일본인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슴팍에는 호텔의 직원임을 상징하는 명찰. 그들을 담당하는 호텔의 컨시어지였다.
그가 유창한 영어로 그들에게 종이박스를 내밀며 말한다.
"실례하겠습니다. 데이비드 얀 님. 고객님 앞으로 소포가 하나 도착했습니다만……."
"예? 제 앞으로요?"
"네. 그런데 그것이……."
종이상자를 받은 데이비드는 그가 받은 소포에 이상한 점이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상자에는 받는 사람의 거주지와 이름, 즉 데이비드가 머무는 이 호텔과 그의 이름은 쓰여 있었지만 보내는 이의 정보는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혹시 어쩌다 계신 곳을 아는 고객님 팬의 장난이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혹시 몰라 가져왔습니다. 확인하는 게 꺼려지신다면 저희가 따로 폐기한 후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컨시어지의 말에 데이비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기분 꿀꿀한데 누가 이런 장난을…….'
조심스럽게 흔들어본 상자 속에서는 몇 가지 가벼운 플라스틱 덩어리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심쩍은 생각도 잠시.
상자를 살피던 데이비드는, 상자의 아랫면에 무언가 단어가 적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그 단어는 바로 cheating.
8글자의 알파벳.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부정행위!?"
설마, 정말 설마 했지만, 이것은……!
거기까지 생각한 데이비드는 황급히 컨시어지에게 답했다.
"아, 아니! 이건 내게 온 게 확실합니다. 제가 알아서 확인하도록 하죠. 가져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예. 천만의 말씀입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다시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컨시어지가 돌아간 직후, 데이비드는 칼을 챙겨올 새도 없이 종이박스를 말 그대로 갈기갈기 찢어서 안의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뭐, 뭐예요!?"
"왜 그럽니까, 캡틴?"
"잠깐, 잠깐만!"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두 개의 USB와 하나의 구형 녹음기였다.
'바이러스라도 든 건가?'
아니, 바이러스가 들어있어 봤자 기껏해야 호텔 컴퓨터나 좀 망가트리고 끝날 터. 어떤 자료가 들었을지 모를 USB를 우선 소중하게 챙긴 데이비드는 이어서 녹음기를 확인했다.
"……녹음파일이 하나."
대체 누가 보낸 걸까.
잠시 의아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데이비드는, 녹음기에 담긴 파일을 재생했다. 이윽고, 싸구려 녹음기에서 증폭 탓에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한 차례 나더니, 이윽고 성별도 알 수 없을 만큼 변조된 목소리가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안녕하십니까. 데이비드 얀. 만약 당신이 이 인사를 들었다면 기쁘겠네요. 제 선물이 무사히 당신에게 도착했단 뜻일 테니까.
"영어? 근데 이 발음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인데. 미국 내 방언이 아니라, 좀 외국 쪽 영어 같아."
어느새 삼삼오오 데이비드 주변으로 모여든 팀원 또한 다 함께 녹음기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상자를 열었다는 건, 상자에 제가 따로 써놓은 메시지 또한 봤다는 뜻이겠죠. 예, 맞습니다. 당신이 기대한 대로 이 상자에 담긴 건 중국팀의 부정행위에 대한 증거가 담겨 있습니다.
"!"
"뭐, 뭐라고!?"
미국팀의 놀라는 와중에도, 녹음기 속 누군가의 말은 이어진다.
─이 증거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당신이 결정하시면 됩니다. 저는 아무런 말도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럴 시간에 중국팀의 뒷덜미를 잡는 게 중요할 테니까. 전 이 사건을 통해 어떤 개인적 이득도 취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에요.
한 차례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들린 뒤, 그는 이걸로 끝이라는 듯 인사로 말을 끝맺었다.
─부디 현명하고 재빠른 조치를 통해 여러분의 억울함을 해소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럼 이만.
─삑!
"……흥."
녹음파일의 재생이 끝나자, 데이비드는 코웃음을 쳤다.
'개인적 이득을 취할 생각이 없다고?'
거짓말하지 말라지.
'아무리 변조가 됐다지만, 방금 그 말투는 분명 프랑스 놈들 느낌이 났다.'
불어 특유의 발음으로 오랫동안 말을 하면 영어를 발음할 때도 자연스럽게 발음에 흔적이 남는다.
'중부 사투리를 억지로 구사하려고 한 것 같은데, 고작 그거에 속을 것 같아?'
대충 이 소포를 보낸 이들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프랑스팀이로군.'
적어도 프랑스팀의 조력자일지도 모른다.
어째서 프랑스팀이느냐? 그건 바로 현재 패자부활전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팀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중국팀이 부정행위를 저질렀음이 밝혀진다면, 당연히 그들은 쫓겨날 것이고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채워야 할 터.
그 빈자리를 채울 1순위 팀이 바로 프랑스팀인 것이다.
물론, 다시 한번 미국팀과 대결을 벌여 미국팀을 꺾어야 할 테지만.
"건방진 놈들 같으니."
다시 자리에 올라오기만 하면, 미국팀 정도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좋아, 한 번 뜻대로 놀아주마."
대신 춤판에 끼어 나가떨어질 건, 중국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데이비드는 손에 들린 녹음기를 으스러질 듯 부여잡았다.
***
"이렇게 오래 영어 써보는 건 오랜만인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회귀 전 영어를 쓰던 느낌을 살려서 녹음했는데, 혹시 이상하게 들리진 않겠지?
…… 모르겠다. 뭐, 잘 받았으면 그쪽에서 어떻게든 하겠지.
조만간 일이 터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며, 뜨끈한 온천 속에 어깨를 푹 담갔다.
추운 겨울밤에 온천에서 즐기는 시원한 탄산음료 한 잔. 아주 극락이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