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65화 (365/403)

365. 도시락 전쟁.-4-

심사가 진행되며 남아 있던 관객 심사단 중 반수 이상이 도시락을 선택했다.

한국팀과 일본팀의 스코어 비율은 대략 3:2가량.

남은 인원이 40명 남짓이니, 이들의 선택에 이번 시합의 승패가 걸려 있다고 봐도 좋았다.

"음……."

"대체 어딜 골라야 하냐고……."

관객 심사단도 바보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기에 신중함 하나만큼은 알아준다고 보아야 할 터.

그런 신중함에 겹쳐 그들의 손에 시합의 승패가 걸려 있다는 부담감은 그들에게 적지 않은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이제는 일본팀 도시락이 어느 쪽인지도 전혀 모르겠고."

"누가 무슨 도시락을 만들었든, 확실한 건 두 팀 다 초일류 일식 요리사라는 거야."

장어 도시락도 분명 엄청난 퀄리티를 자랑했지만, 오세치 도시락 또한 전통적인 일본의 멋과 맛을 맛깔나게 살린 뛰어난 요리!

현지인들조차 혼란스럽게 만드는 두 도시락 앞에 선 관객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선택을 보류한 채 머뭇거릴 뿐이다.

"……."

그리고 그런 관객들 사이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양희연이 비로소 앞으로 나선다.

'아직 어느 게 한국팀 건진 모르겠는데.'

당장 그것보다 계속 신경 쓰였던 것이 있다. 아까부터 묘하게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상한 현상.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그녀는 이 고착 상태 속에서 홀로 모두의 앞에 나섰다.

그런 그녀에게 카메라가 향하는 것은 당연지사. 화면의 클로즈업에 더해 특유의 미모까지 더해지자 관객석과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제법 커다란 화제가 되었지만, 양희연 본인은 그런 것에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의아한 심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맞네. 요 근처, 이상하게 따뜻해.'

양희연의 시선은 한국팀의 장어 도시락이 쌓인 선반을 향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느껴지는 온풍.

도시락이 막 들어왔을 때 느껴졌던 온풍은 이해할 수 있다. 도시락을 통까지 같이 데워놓았다면 백 개나 되는 도시락통의 열기 탓에 냉풍이 온풍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

'도시락통을 일부러 철제로 골라 쓴 건 데웠을 때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나무는 열전도율이 굉장히 낮은 재료. 구식 영업용 냉장고 중에선 나무를 재료로 사용해서 만든 물건까지 있을 정도니, 아무리 목제 도시락통 겉면을 달궈봤자 내용물은 그다지 따뜻해지지 않는다.

플라스틱? 그런 거에 열을 가했다간 아무리 무공해 플라스틱이라도 요리에 특유의 플라스틱 냄새가 밴다.

장어처럼 향기라는 무기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는 요리에서 그런 잡내는 아주 조금이라도 치명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철제 도시락 통은 나름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 흥."

사실, 그걸 깨달은 시점에서 양희연은 장어 도시락을 만든 것이 한국팀이란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이런 발상은 보통 일본에 익숙해진 사람은 못 하지.'

특히 그것이 요리사라면 더더욱.

장어요리는 그 가격 탓에 일본에서도 상당한 고급 요리 라인에 속하며, 아예 장어요리만을 위해 만들어진 반합까지 있을 만큼 대중적이기까지 하다.

대중적인 고급요리라는 건 그만큼 이미지의 정형화가 심하다는 뜻.

고급 초밥집에선 평평한 나무접시 위에 초밥을 담는 것처럼, 장어요리 또한 쉽게 변하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그 상식을 이렇게 사정없이 깨부술 수 있는 건 글자 그대로 몰상식한 사람뿐이다.

그래. 처음부터 장어요리의 이미지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이기에,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 이미지를 혁신할 수 있다.

"하."

파격적인 몰상식함에 저도 모르게 외마디 웃음을 터트린 양희연이 도시락을 집어 든다.

"뜨거라."

과장 조금 보태서 이제 막 아궁이에서 꺼낸 호일 고구마 같은 뜨거움. 국밥집 등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공깃밥보다 살짝 더 뜨거운 정도일까.

윗부분은 찬바람에 닿아 살짝 차갑지만, 밥이 담긴 아랫부분은 상당히 뜨겁다.

'헤에, 그런 거구마.'

보따리의 매듭 부분을 한 손으로 잡아 든 양희연은 남은 빈손으로 조심스럽게 선반을 쓸었다.

그러자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뜨거움.

그렇다. 온기의 정체는 데운 도시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도시락이 올라간 선반 자체에서 올라오고 있던 것이다.

'선반 자체는 평범한 것 같고…… 열선? 열선 매트 같은 걸 깔았나?'

과연, 재미있는 발상이다. 양희연은 웃었다.

몇몇 특이한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밥 요리는 뜨거울 때 먹는 것이 제맛. 장어덮밥은 말할 것도 없다. 차가운 장어는 기름이 다 굳어 느끼하기만 할 따름이니까.

이런 식으로 가장 맛있는 순간을 계속해서 보존하는 노력은 양희연에겐 비교적 생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거야말로 도시락일 수도.'

도시락이란 결국 사람의 편의를 위해 탄생한 운반식.

과거에는 그저 맨밥에 반찬 한두 가지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 요즘에는 5첩, 6첩 도시락을 달랑 5천 원만 있으면 누구나 편의점에서 살 수 있다.

그냥 딱딱하게 먹던 맨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기도 한다.

도시락이란 이유로 식은 밥을 먹는 시대는 옛날 옛적에 끝난 것이다.

'요리가 아니라 도시락 자체에 대한 고민.'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요리 시합임과 동시에 도시락 승부였으므로. 도시락 통에 음식을 담아두기만 한다고 최고의 도시락이 되는 건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 마음 씀씀이에 깊은 영감을 받은 양희연이 도시락의 뚜껑을 연 그 순간이었다.

─화악!

"…… 어?"

양희연은 문득, 자신이 연 도시락 뚜껑 틈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오는 감촉을 느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꽉 닫힌 압력솥을 열 때처럼, 알 수 없는 기류가 느껴진 것이다.

과연 이건 착각일까. 의문스런 눈으로 기류를 직접 느낀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던 양희연은 거기서 한술 더 떠 이번엔 코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에 정신을 빼앗겼다.

"뭐꼬 이거?"

이게 장어덮밥 냄새라고?

그런 의문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응축되고 또 응축된 향기.

부산에 있는 가게의 주방에서 장어소스를 만들 때나 맡아본, 극한으로 압축된 장어의 향.

처음 맡았던 도시락 냄새보다 수 배는 강해진 것 같은…… 아니, 실제로도 훨씬 농후해진 향이 온 사방에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너무 향이 강한 나머지 잠시 코가 마비된 것 같은 얼얼한 감촉. 그러나 그 와중에도 끊이지 않고 존재감을 어필하는 장어의 향!

"이게 머선 일이고?"

이상했다. 평범한 장어덮밥의 향이 아니다.

이 정도 향이 날 만큼 농축된 소스를 밥에 붓는다면 너무 짜서 먹지도 못할 물건이 될 터. 그러나 여태껏 이 장어 도시락을 먹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건 오로지 극찬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도시락만 실수를 한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찬혁이나 안영길은 밥에 소스 붓는 양을 착각할 만큼 어수룩한 인물이 아니다. 고작 백 인분을 만들다 실수를 저지를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이 강렬하리만치 농후한 향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뚜껑을 연 도시락의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밝혀졌다.

"눌어붙은…… 거야?"

도시락의 밑바닥에 끈적하게 남은 진한 검은색 자국.

그것은 분명, 장어덮밥에 주로 사용하는 소스가 눌어붙은 흔적이었다. 가게에서 비슷한 걸 몇 번이고 보았던 양희연이기에 알 수 있었다.

"저게 와…… 아!"

이윽고, 양희연은 그 현상의 정체를 알아챘다.

열선 매트 위에 여태껏 올라가 있던 도시락.

철제 도시락통.

그렇다. 계속해서 열기를 받은 도시락통 바닥에 닿아 있던 소스가, 자연스럽게 졸아들며 끈적한 자국을 남긴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시락의 밑바닥에 닿아 있던 건 비단 소스만이 아닌, 야끼소바의 면과 덮밥의 쌀밥 또한 마찬가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두 가지의 바닥을 살짝 들춰보자, 역시 양희연의 생각대로 덮밥의 밑면에는 누룽지처럼 눌어붙은 자취가. 그리고 바닥에 닿아 있던 면에는 마치 기름에 튀긴 듯 진한 갈색으로 물든 면이 깔려 있었다.

'류찬혁 이 마 진짜 또라이네……!'

이제야, 양희연은 이 모든 연출 속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어디로 향하는지 눈치챘다.

열선, 도시락통, 온도, 향기.

마치 전부 어쩌다 따로따로 발생한 것 같은 이상 현상.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모든 이상 현상은 마치 마인드맵처럼 서로가 서로와 끈끈한 선으로 이어져 있다.

자그마한 일 하나조차 결코 이유 없이 일어난 게 아니란 뜻이다.

"열선은 계속 도시락에 열기를 가하고, 도시락통은 계속 뜨거워진다."

도시락통의 온도 자체는 상승하지만 차가운 공기 탓에 전부가 뜨거워지진 않는다. 계속 열을 받는 건 도시락통의 밑바닥뿐.

"속에서 조금씩 졸아든 소스는 당연히 맛과 향기가 응축되고……."

도시락통은 말 그대로 향기의 폭탄이 된다.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소스가 졸아든 만큼 밥이랑 면도 일부만 뜨거운 열에 익게 되면……."

누룽지가 되고 튀긴 면이 되면서, 결과적으로 식감의 변천이 생긴다.

"하, 하하!"

양희연은 웃었다. 이 모든 것이 설계라는 것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기에 웃었다.

그 스케일의 크기에 웃었다. 이 시합에 대한 이해도의 깊음에 웃었다.

"참말로, 웃음뿌이 안 나오네."

이 모든 결과가 그녀에게 증언하고 있다.

한국팀의 장어 도시락이 가진 장어라는 테마가, 사실은 그저 대외적인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속에는 그보다 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름 붙이자면, '시간이 지날수록 맛있어지는 도시락'.

그것이 바로, 한국팀의 요리가 가진 진정한 강함이었던 것이다.

"이건 안 봐도 누가 이길지 알겠다."

실시간으로 점점 맛있어지는 요리와, 시간이 지날수록 딱히 맛의 변화가 없는. 아니, 오히려 맛이 점점 떨어지는 요리.

양희연은 생각했다.

결과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고 말이다.

"저, 그거 장어 도시락 맞지?"

"나 한 번만 봐도 될까?"

그것은 향기에 직격 당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좀비처럼 그녀 주변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이날, 생방송 인터뷰로 남은 어느 일본인의 인터뷰는 이후로도 오랜 세월 인터넷 커뮤니티를 떠도는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심사 시간이 거의 종반에 달할 무렵. 일본팀과 한국팀의 스코어 격차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고 말았다.

심사의 결과가 거의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MC는 마침 막 시식을 끝낸 어느 일본인 관객 심사단에게 가서 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잠시 인터뷰 가능하신가요?"

"네.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손에 드신 걸 보니까 장어덮밥 도시락을 선택하신 거 맞으시죠?"

"예! 전 그쪽을 선택했어요!"

"스코어를 보면 장어덮밥 도시락의 승리가 확실시 되는데요. 혹시 장어덮밥 도시락을 고르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MC의 질문에, 그 남자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만약 일본인이 아니었다면 보기에 화려한 오세치를 골랐겠죠. 하지만 일본인인 제 눈에는 이런 추운 날에 따뜻한 밥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싶다는 같은 일본인의 따스한 마음이 그대로 보였습니다. 오세치는 분명 차갑게 먹는 요리지만, 원칙을 중시한 요리로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걸 부디 알아주었으면 하네요!"

남자의 발언은 생방송 내내 1초의 컷조차 없이 그대로 방송에 송출되었고.

잠시 후 시간이 지나, 두 팀이 만든 도시락이 무엇인지 공개된 순간. 그 관객의 모습은 행사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이후 몇 달의 시간이 지나도록, 커뮤니티에서는 그 남자의 사진이 올라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 하, 참."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오네.

찬혁은 자신이 놓친 인터뷰를 녹화해온 양희연의 노력 덕에, 오랜만에 정말 큰 목소리로 폭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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