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도시락 전쟁.-3-
장어덮밥과 오세치.
많은 관객을 당황스럽게 만든 두 팀의 도시락이었으나, 같은 일식이라는 대분류 안에 있으면서도 두 팀의 도시락은 서로 추구하는 바가 너무나 달랐다.
장어덮밥은 말하자면 아주 잘 갈아놓은 한 자루의 식칼.
사용자가 원하는 바에 따라 채소, 고기, 생선, 과일 등. 어느 것에든 마음껏 사용할 수 있고, 홀로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는 명검.
그러나 오세치는 그 반대.
과거 일본에 있던 명절에서 그 이름을 따온 오세치 요리는, 이름 그대로 일본 사람들이 새해 명절을 기념하며 먹는 일종의 잔치요리다.
오세치의 특징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반찬의 가짓수를 빼놓을 수 없다.
새해가 되고 며칠 동안 불을 써선 안 된다는 풍습에 의해 탄생했기에, 그동안 먹을 반찬을 한 번에 만들어두고 명절 기간 내내 나누어 먹었기 때문이다.
그런 풍습도 시대가 바뀌며 조금씩 변화를 겪으며 마침내 변화한다.
커다란 반합에 다양한 반찬을 조금씩 담아 한 끼 식사에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오세치 요리.
새해 때가 되면 일본의 마트나 음식점, 도시락집 등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오세치 요리는 기본적으로 일곱에서 여덟 가지 정도의 반찬이 들어가고, 보다 고급형으로 나아가면 열 가지 이상의 메뉴가 담긴 것마저 판매한다.
그리고 오늘, 일본팀이 준비한 오세치 요리는 4단 찬합.
표고와 죽순, 물에 불려 색을 뺀 팥을 넣어 지은 밥과 식기만 담긴 1단을 제외하면 1단 당 6가지의 요리가 담긴, 총합 18가지의 요리를 자랑하는 초호화 오세치 찬합!
그야말로 손잡이에 달린 도구 하나하나를 전부 명품 브랜드에서 특수 제작한 맥가이버 나이프와 같다!
각각 도시락을 고른 선발대가 첫 모습을 선보인 그때. 당장의 스코어는 한국팀이 만든 장어 도시락이 앞서고 있었으나 정작 사람들의 시선을 앗아간 것은 일본팀의 오세치 찬합이었다.
한국팀 입장에선 억울할지도 모르나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팀의 장어 도시락은 맛은 모르더라도 겉보기는 수수하다.
일본팀의 오세치 찬합이 자랑하는 눈길을 사로잡는 형형색색의 화려함에 맞서기엔 역부족.
그저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관객들의 관심이 오세치에 쏠리는 건 당연지사.
장어의 가장 강력한 강점은 식욕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향. 그러나 향을 맡기엔 너무나 먼 거리에 앉은 관객들에게는 제 진면목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잠시 뒤로 빠진 채 어떤 도시락을 고를지 고민하던 관객 심사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기회.
자신의 선택에 따라 원하는 것을 먹겠다고 다짐한 그들이었으나, 그들 뒤에 자리한 수많은 관객이 주도하는 흐름에는 쉽게 거스를 수 없었다.
본래 사람은 누군가의 의견에 휩쓸리기 쉬운 존재였고, 관객 심사단 또한 무언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그저 운이 좋아 이 자리에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
결국 선발대의 뒤를 따라 등을 떠밀리듯 앞으로 나아간 몇 명의 관객 평가단이, 이번에는 일본팀의 오세치 찬합을 들고 자리로 돌아간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90명 남짓의 사람 중, 지금 이때 움직인 이의 수가 약 열 하고도 대여섯. 그 대부분이 오세치 찬합을 고르며 전광판의 스코어가 다시금 움직인다.
"15 대 11……."
양희연이 전광판의 숫자를 보고 작게 중얼거린다.
짧은 주도 끝의 역전. 아직 이 시합의 결말은 보이지 않았다.
***
"후, 일단은 점수를 다시 가져왔네요."
"저쪽이 장어덮밥을 만들었을 줄이야. 잠깐 철렁했지 뭡니까."
"그래 봤자 고육지책에 불과했단 거겠죠. 내용물이 드러나니 금방 밑천이 나오는 걸 보면."
일본팀의 대기실.
모니터로 상황과 스코어를 지켜보던 일본팀의 요리사들은 순식간에 흘러간 사태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중이었다.
당초 스타팅 포인트가 세 배나 벌어졌을 때엔 설마 이대로 계속 밀리기만 하다 지는 줄 알고 기겁했으나, 조금 더 지나 한번 기울었던 점수가 이제는 반대로 기울어진 것을 보곤 간신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일본팀의 요리사들은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 유지된다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으리라고.
"……."
그러나 그런 낙관적 예측을 늘어놓는 팀원들 사이에서, 팀장인 이시무라 유이치만은 굳게 입을 닫고 있었다.
'아까 전에…….'
유이치가 떠올리는 것은, 당초 관객 심사단의 선발대가 첫 도시락을 고를 때 보여준 영문 모를 반응.
화면 너머의 그들은 분명 무언가 알 수 없는 반응을 기점으로 한국팀의 요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이치는 그것이 온기, 그리고 향기 때문임을 전혀 모른다. 화면으로 습득할 수 있는 정보라 해봐야 오로지 시각뿐이기에.
그러나 그 갑작스런 반응.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보기엔 분명히 이상하다. 유이치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내심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상황이 돌아가는 추이를 관찰했다.
'뭔가 있다.'
이 자리에선 확인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자신과 대결한 류찬혁. 그 기상천외한 소년이 숨긴 무언가가.
무언가의 존재를 아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믿는 것이다. 한국팀이 고작 이 정도로 끝날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믿음은 유이치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아!"
"움직인다! 아직 안 움직인 관객들도 움직여요!"
"잠깐만, 근데 저 방향은……."
"…… 한국팀 도시락 방향이잖아!"
허망한 팀원들의 목소리 가운데서 유이치는 생각했다.
차라리 기대를 배반해주는 게 기뻤을지도 모른다고.
***
잠시 시계를 뒤로 돌려 일본팀이 목격한 관객 심사단의 두 번째 대규모 이동이 시작되기 전.
각 팀의 도시락을 고른 관객 심사단은 스테이지에 임시로 차려진 자리에 앉아 제가 가져온 도시락을 펼쳤다.
"이야, 저거 좀 봐봐."
"와…… 저긴 진짜 상다리가 부러지겠는데?"
아니, 일본팀의 오세치 찬합의 경우에는 '펼치다'라는 말보다 '늘어놓다'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4단이나 되는 찬합을 한 층, 한 층 빼내어 먹는 탁자 위에 올려두니, 관객 한 사람에게 주어진 자리가 가득 찰 지경이었다.
단순히 면적만의 문제가 아니다.
형형색색, 겹치는 색조가 거의 없는 18개의 반찬.
버섯의 백색과 갈색.
나물의 녹색.
참치의 적색.
계란의 노란색.
고구마의 금색.
그 외에도 etc…… etc…….
마치 탁자란 이름의 정원에 꽃 수십 송이가 모여 화원이라도 만들어진 것 같은 환시가 그들의 눈을 스친다.
─꿀꺽
그 광경에 군침을 삼킨 장어 도시락을 고른 관객들이 제 앞에 놓인 도시락을 바라본다. 그 눈에는 미약한 실망감이 섞여 있다.
"그에 비해 우리는……."
"꼴랑 두 층이 끝이야."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저쪽을 고를걸."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4층이나 되는 찬합에 비해 이쪽은 딱 그 절반인 2층. 심지어 도시락통 자체의 디자인도 고급스런 옻칠 위로 고즈넉한 장식이 가미된 일본팀의 것에 비하면 투박하기 그지없다.
'뭐 협박이라도 당한 거 아냐?'
'누가 뒤통수에 총 들이대고 꼭 이것만 쓰라고 협박해야 고민고민 끝에 고르게 생겼는데.'
그들은 잠시 진심으로 도시락을 바꾸고 싶단 충동이 일었으나, 규칙에 따르면 선택을 한 이상 낙장불입. 되돌릴 순 없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장어덮밥이면 평범하게 만들어도 기본 이상은 하잖아. 뭔가 다른 게 있지 않겠어?"
그렇게 스스로 납득한 관객들이 각자 도시락의 뚜껑을 연다.
"흐음! 역시! 그래도 장어는 장어야."
"뚜껑이 닫혀 있을 때도 그만큼 향이 풀풀 풍겼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야말로 광속과도 같은 태세전환. 장어의 강점인 향기가 도시락 전체를 감싼 열기에 힘입어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오오! 1층이 통째로 장어야!"
"장어 한 마리를 다 쓴 것 같은데!"
뚜껑을 열자마자 그들을 반기는 것은 넓적한 도시락에 빈틈없이 담긴 새하얀 쌀밥과 그 위를 빈틈없이 덮은 장어구이.
"…… 응? 아니 잠깐만. 뭐야 이거? 장어가 왜 이렇게 잘려 있어?"
가 아니었다.
보통 어느 지방에서 만드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장어덮밥 위에 올라가는 장어는 적당히 토막낸 것 같은 크기로 잘려 있을 때가 많다.
어째서 밥이랑 같이 먹기 편한 한입 크기가 아니라 커다란 토막으로 잘려 있느냐.
그건 그렇게 잘라두어도 먹는 데에 크게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어덮밥에 올라가는 장어는 그냥 단순한 구이가 아니다. 양념을 발라 숯불에서 굽고, 한 차례 증기에 찐 뒤 다시 숯불로 살짝 소스 그을음을 만들어 올린다.
이렇게 하면 장어구이가 아주 부드러워져서 젓가락으로 간단히 자를 수 있다. 덕분에 먹기도 편하고, 밥과 함께 씹어도 맛이 하나로 잘 섞이게 되는 것.
여태껏 그런 장어덮밥을 가장 많이 접했던 일본인 관객들 앞에 놓인 도시락 속 장어는, 그런 그들이 보기에 굉장히 이질적인 형상을 띄고 있었다.
"반쪽은 평소에 보던 모양인데……."
"반은 꼭 채썬 것처럼 장어가 가늘게 잘려 있잖아?"
관객이 알고 있던 장어덮밥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형태. 그러나 그보다 더욱 그들을 놀라게 만든 것은 그 채썬 장어구이 아래 가려져 있던 것이었다.
"잠깐만 여기 이 아래 있는 거! 설마 이거!"
"며, 면이다! 채 썬 장어구이 아래에 면이 들어있어!"
면? 면이라고?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조합. 혼이 나간 듯 심취하여 오세치를 먹고 있던 관객들의 시선이 저절로 장어 도시락 쪽으로 쏠린다.
"이, 이건 장어덮밥 도시락이 아니야!"
"한쪽은 덮밥, 다른 한쪽은 소바…… 야끼소바다!"
장어 야끼소바!
야끼소바가 무엇인가. 저렴한 음식집이나 축제 가판대에서 심심하면 먹을 수 있는 일본식 볶음국수의 총칭이다. 인스턴트 제품이 수도 없이 나왔을 만큼 만드는 게 간단하고, 또 국민적인 간식.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장어 야끼소바'라는 장담컨대 들어본 적도 없다!
"아하! 이 장어는 면과 쉽게 비벼 먹을 수 있게끔 일부러 이렇게 자른 거구나!"
"지금 보니까 덮밥 쪽 장어랑 야끼소바 쪽 장어는 구워진 방식이 달라! 알겠다! 야끼소바 쪽 장어는 찜기에 찌지 않은 거야! 일부러 쫄깃한 맛을 살려서 면발의 식감이랑 잘 어울리도록!"
"마, 맛있어! 말도 안 되게 맛있다! 야끼소바도 야끼소바지만, 덮밥도 장난 아니야!"
"장어 아래에 아주 얇게 채친 초생강이 먹을 때마다 혀를 씻어 내린다!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질 않아!"
─꿀꺽!
이상한 일이었다.
오세치를 먹고 있던 관객들의 입에서, 군침이 흘러넘칠 듯 솟구친다.
분명 그들 또한 어디서 맛보기 힘든 대단한 요리를 먹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어째서 입에서는 군침이 흐른단 말인가?
"면은 기름으로 볶은 건가? 만든 지 시간이 꽤 지났을 텐데 조금도 불지 않았어! 여전히 쫄깃하다!"
이 또한 찬혁의 잔꾀였다.
수분이 쫙 날아가도록 볶은 장어 뼈에서 짜낸 장어기름에 들기름을 섞어서 혼합 향미유를 만들고, 차윤구가 진땀을 흘리며 만들어낸 100인분의 수타면을 살짝 수분기만 있게 데친 뒤 향미유에 볶아 익힌다.
최소한의 수분과 다량의 장어기름으로 볶은 수타면은 엄청난 장어 풍미와 오랜 시간 보관해도 불지 않는 절정의 유지력을 손에 넣는다.
물론 뼈에서 그만큼 많은 기름을 빼내는 건 엄청난 육체노동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유동건은 때아닌 육체노동으로 반쯤 죽기 직전까지 갔다.
"찬합 2단에는…… 아하! 락교랑 계란말이, 그리고 단무지!"
"단순하지만 딱 적당한 반찬이야! 오히려 이런 게 좋지. 장어 맛에만 계속 집중할 수 있으니까!"
"생와사비랑 작은 강판도 같이 들어있어! 이걸로 직접 와사비를 갈아서 취향껏 넣어 먹으라는 거구나!"
"다른 칸에 든 건 엽차 티백이다!"
"이것만 있으면 간단하게 히츠마부시도 해먹을 수 있겠어!"
"싸구려지만 오히려 좋아. 괜히 맛 좋은 국물로 히츠마부시를 해먹으면 오히려 장어 맛을 해친단 말이야!"
찬사, 찬사, 찬사!
11명의 입에서 쉼 없이 터져 나오는 찬사!
샘솟는 향기와, 그에 지지 않고 연달아 터져 나오는 참신한 발상!
그러면서도 기본을 벗어나지 않는 전통에 대한 미덕!
'이거다!'
'이거야말로 진짜 일본인이 만들 수 있는 도시락이야!'
잠시 물러나 상황을 관조하던 관객 심사단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름 아닌 한국팀의 도시락 선반을 향해!
이 상황의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단 생각이 절로 들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