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 도시락 전쟁.-2-
시간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딱히 질량과 속도에 의한 물리학도나 이해할 특수 상대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좀 더 단순한 체감 시간에 대한 이야기.
한국팀과 일본팀의 조리가 시작된 지도 두 시간이 넘었다.
고작해야 두 시간.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영상 몇 개, 드라마 한두 편만 봐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시간.
하루 평균 10시간에 가까운 근무시간을 자랑하는 현대인들에게 두 시간가량의 시간은 그리 대단찮은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 사람은 그보다 더욱 긴 시간을 훨씬 짧게 느끼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짧은 시간이 길게 느껴질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오랜만에 맞이한 휴일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것처럼.
예를 들어 점심시간을 앞둔 4교시. 교실의 시계에 달린 초침이 거북이보다 느리게 느껴지는 것처럼.
지금 같은 경우, 사람들의 심정은 당연하게도 후자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보다도 심했다.
"이제 슬슬 두 시간 반쯤 지났나……? 아니 잠깐, 이제 겨우 두 시간 남짓이라고?"
"벌써 하루 종일 기다린 것 같아……."
"슬슬 완성될 때도 되지 않았나? 두 시간이나 됐으면 적당히 끝내야지!"
양희연은 마지막으로 들려온 어느 관객의 말을 듣고는 인상을 구겼다.
'몰상식한 거 보소.'
요리라는 건 기본적으로 시간에 비례해서 맛있어진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만큼 요리사가 음식의 이모저모를 다듬을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한국팀이든 일본팀이든 100인분의 음식을 만들며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취급하지 않도록 온힘을 다해 요리하고 있을 터.
맛있는 요리. 곧 이기기 위한 요리를 만드는 이들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리라는 건 굳이 말할 것도 없이 뻔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기다리는 게 지루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어디서 잠시 시간이라도 보내고 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건 양희연도 잘 안다. 요리라는 건 가끔씩 기다리는 것조차 맛을 즐기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뭣보다 저렇게 기대하는 사람이 바깥으로 나가 뭘 한다고 해봤자 그게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완성품이 어떤 모양일지는 몰라도 부디 잘 만들어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 진심으로 요리를 기대하고 있는 수만 관객. 그리고 500대 1의 확률을 뚫은 관객 심사단의 심정을 배신하게 될 테니까.
"뭐, 그칼 리는 없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게 걱정됐다.
어떤 메뉴를 들고 나오든, 과연 이 상황에서 이길 수 있을까.
아마 양희연 본인이었다면 진즉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딱히 방안이 떠오르질 않았으니까.
'…… 가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찬혁이라면, 매번 양희연의 예상과 상식을 깨부순 그라면 이번에도 무언가 색다른 방법을 제시하여 이 난관을 빠져나오겠지.
그렇게 믿으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양희연이었다.
동시에 기대도 됐다. 과연 자신이 먹을 요리는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하는, 평범한 관객 같은 기대가 말이다.
그들의 어깨 위에 한 사람의 기대가 추가로 실렸다.
거기서 더욱 시간이 흘러 다시 한 시간. 총합 세 시간이 지나갔을 때. 오랜 기다림 끝에 눈에 핏발까지 서기 시작한 관객들 앞에 드디어 두문불출 감감무소식이던 MC가 환한 조명과 함께 스테이지 위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 여러분! 참으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방금 심사위원단에게 들은 따끈따끈한 정보! 두 팀의 도시락 제작이 끝났음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
─기다렸다고, 젠장!
MC의 외침을 들은 관객들이 너무 오래 앉아 있던 탓에 저린 팔다리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함성을 내질렀다.
─팡!
그와 동시에 돔의 천장에 달린 조명 여럿이 일제히 움직여 MC의 뒤편에 있던 장막이 드리운 백 스테이지를 비춘다.
이어서 개막.
커튼이 걷힌 자리로 들어서는 두 개의 커다란 선반.
여러 개의 바퀴가 달린 선반 위에는 각각 정확히 백 개씩 되는 도시락이 놓였다.
같은 유니폼을 갖춰 입은 힘 좋은 장정들이 가득 붙어 운반된 선반이 이윽고 무대 양쪽으로 나뉜다.
그것을 만들었을 요리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든 이를 특정하지 못하도록 짜인 특수 규칙이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
요리사라는 간판 없이, 오로지 맛만으로 정해지는 이번 승부. 관객들의 핏발 선 눈에 열기가 깃든다.
"자!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던 도시락의 등장! 그리고 요리가 있는 곳엔 언제나 먹는 이가 필요한 법! 행운의 주인공 여러분! 지금 무대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
행사장의 광경은 우리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현장에서 보는 건 아니다. 대기실에 있는 간이 모니터로 바깥 상황을 살필 뿐이지.
'…… 아니, 여기도 현장이라면 현장인가.'
전력을 다한 100인분 도시락 제작.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군대 같은 데서야 짬 좀 찬 아마추어 대여섯 명이 사백, 오백 인분을 준비할 수 있다지만, 그건 질을 상당량 희생하고 양을 챙긴 결과물이다.
이번처럼 완제품은 거의 아무것도 쓸 수 없고, 밥 한 톨부터 시작해서 모든 음식을 최고의 퀄리티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야 하는 건 업무의 고됨이 전혀 다르다.
'특히 이번 같은 경우는 조금 더 힘들었지…….'
컨셉에 따른 고됨이라고 해야 할까.
일단 장어 모듬 도시락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만큼 도시락 하나에 장어 한 마리 정도는 넣어주는 게 양심적이잖아?
이 말은 무슨 뜻이냐. 곧 내가 방금 해체한 장어만 백 마리 정도 된다는 뜻이다.
아니, 뭐 물론 쌩으로 백 마리를 나 혼자 다 하진 않았지. 아마 머릿수만 따지면 내가 3분의2 정도 될 거다.
다만 장어를 요리한다는 게 그게 전부가 아니라서 문제였을 뿐.
해체와 손질까지는 어떻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다음부터 장어 하나만큼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장어 백 마리를 꼬치에 꿰고, 숯불에 굽고, 살이 뭉개지지 않게 적당히 식혀서 밑 준비가 끝난 도시락에 얹어 마무리하고…….
물론 내가 그런 걸 하는 동안 다른 분들도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아마 차윤구 셰프는 육체적인 것만 따지면 나보다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생고생을 해가며 만든 도시락이니만큼, 부디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되도록 전부 나가기를.
관객 심사단이 고르지 않은 도시락은 폐기될 운명이니까 말이야. 그건 아깝지 않은가.
편의점 도시락 하나 폐기하는 것보다 열 배, 스무 배는 안타까운 일일 거다. 원가적인 의미로.
***
비로소 시작되는 심사. 마치 먹이를 향해 내달리는 치타처럼 도시락 선반 앞으로 달려간 관객들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부터 사냥감의 눈을 피해 수풀로 숨는 맹수처럼 조심스러워진다.
앞뒤가 바뀐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앞두고 누가 첫 번째 타자가 될 것인지 망설이는 관객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인다.
본 심사단도, 요리사도 참견할 수 없는 관객의 선택.
선택의 책임은 그 스스로가 지기에, 당장 달려들어 도시락을 집어 들고 싶어도 더더욱 앞으로 나설 수 없는 딜레마.
도시락보로 쌓인 탓에 통의 외관조차 확인할 수 없다.
관객이 시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
관객 심사단 모두가 제자리에서 머뭇거리며 쉽게 선반 앞에 서지 못하던 그때, 관객의 또 다른 감각기관이 새로운 정보를 수신한다.
"…… 어?"
"이건……."
온기. 그리고 향기.
아무리 실내라 해도 아직 한파가 한창인 1월 초.
돔처럼 넓은 내부공간은 아무리 난방을 잘 돌려도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찾아온다.
아주 껴입진 않아도 된다지만 얇은 옷을 입기에는 여전히 제법 추운 실내. 그런데 어디선가 느껴지는 따스한 공기.
그저 히터에서 나온 공기가 우연찮게 닿았다고 생각하기에는, 그 훈훈한 바람의 손을 잡고 건너온 무언가가 걸린다.
그것은 냄새였다. 달달하고, 짭짤하고, 묵직함이 느껴지는 냄새.
하지만 일본인이 대다수인 관객들에게 아주 익숙하게 다가오는 냄새.
관객 심사단 중 코가 좋은 한 사람이, 이윽고 그 냄새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이건…… 장어다! 장어구이 냄새야!"
"장어? 장어라고?"
"장어구이면…… 설마 장어덮밥? 그렇다면 저게……!"
장어덮밥이라고 한다면 일식의 꽃 중 하나. 즉 저 장어덮밥이야말로 일본팀이 만든 것이다.
일본인 관객 심사단 중 성미가 급한 이들이 속으로 결론을 짓고는 온기가 느껴지는 방향을 찾아 걸음을 돌린다.
"제발 일본인이면 일본팀 좀 응원합시다."
"장어덮밥 도시락보다 맛있는 도시락이 또 있겠어?"
그렇게 쏜살같이 달려가는 이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본 몇몇 해외에서 온 관객 심사단, 특히 한국에서 온 이들은 앞서 달려간 사람들의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들어 보니까 저쪽이 일본팀 것 같다는데."
"그럼 저희는 저쪽 걸로 합시다."
백 명의 관객 심사단 중 움직인 사람은 고작 열 명 남짓.
그러나 이미 치우쳐 버린 2:8 정도의 비율로 치우친 그들의 행방은 이 심사가 얼마나 한국팀에게 불리한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우스운 것이라면, 일본팀을 응원하겠다며 발걸음을 돌린 이들이 고른 도시락이야말로 한국팀이 만든 장어 모듬 도시락이라는 것일까.
어찌됐건 양측의 도시락이 처음 바깥에 모습을 드러낸 건 거의 같은 타이밍이었다.
"뭐지?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이 도시락 주변만 이상하게 따뜻해."
"도시락 통 조심해! 왠지는 모르겠는데 꽤 뜨거워!"
"그러게. 안 그래도 도시락 통이 스테인리스 재질인가 봐. 쇠 느낌이야."
"나무가 아닐 줄은 몰랐는데……."
천으로 된 포장을 풀자 모습을 드러내는 도시락 통.
짙은 검은색 계통으로 색이 칠해진 도시락 통은 그 감촉이 어딜 어떻게 보아도 쇠였고, 맨손으로 오래 잡고 있다간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오, 이거는 찬합이다."
"이게 다 몇 단이야. 하나, 둘, 셋, 넷…… 사단 찬합? 반찬을 몇 개나 만들었으면 찬합이 네 개씩이나 된대."
그리고 반대편에 있던 도시락 통은 매끄럽게 옻칠이 된 아름다운 찬합. 윤기 없는 새하얀 염료로 그린 꽃이 찬합의 옆면을 장식했다.
넓적한 모양새에 2단 도시락 통과 옆으로 뻗은 면적은 보다 좁지만 높이가 더욱 돋보이는 3단 찬합.
시식을 위해 준비된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자신이 가져온 도시락의 뚜껑을 연 선발대 일행은, 이윽고 서로의 도시락 속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이 도시락은 장어덮밥…… 근데 아직 한 단이 남았는데. 반찬인가?"
"그럼 저기 한국팀 도시락은 뭘까?"
"뭔진 몰라도 장어덮밥에 비할 건 못 되지. 도시락은 높이 쌓아서 반찬 가짓수만 늘린다고 좋은 게 아니…… 어라? 아니, 잠깐만."
드디어 공개된 도시락의 내용물.
그 두 내용물이 도쿄돔의 거대한 전광판을 양분하며, 당첨되지 못한 비운의 관객들에게 제 모습을 선보인다.
그리고 이 순간, 수만 명의 관객이 하나같이 무의식적으로 기함을 내지른다.
한국팀과 일본팀. 분명 두 팀이 서로 갈라져 만들었을 도시락이, 놀랍게도 같은 전통적인 일식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에!
"저, 저거저거! 저거 오세치 요리잖아! 얼마 전에도 먹었는데!"
"다른 하나는 장어덮밥인데?"
"아니 뭐야. 하나는 한국팀에서 만든 거 아니었어?"
모양으로 흠을 잡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한 두 종류의 도시락.
"잠깐만……."
"이거 혹시, 우리가 너무 성급했던 건가……?"
혼란에 빠진 좌중 속에서, 아직 도시락을 고르지 않고 뒤로 빠져 있던 양희연이 얕게 웃었다.
"하, 새끼. 잔머리 굴리는 재주는 있어가."
파란의 시작. 한일 양팀의 스타팅 스코어는 9:3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