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 도시락 전쟁.-1-
실제로 요리를 만들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순서가 돌아왔다.
도시락 예상 완성도 제작. 일종의 견적서 제출이라고 봐도 좋겠지.
하지만 고작 견적서 제출이라고 이 과정을 얕잡아봐선 안 된다.
'한 번 제출해서 통과되면 그다음부턴 수정이 아예 불가능해지니까.'
어찌 보면 이 예상 완성도를 제출하는 그 순간부터 승패는 반쯤 결정 나는 걸지도 모르지.
우리 팀원들도 그 사실을 모를 리는 없기에, 우리의 대기실에선 시합에서 이길 수 있는 레시피를 만들기 위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우선 정리를 좀 해보자. 그러니까 이번 주제인 도시락은 서로 도시락을 백 개씩 준비해서 먼저 다 떨어지거나, 아니면 심사가 끝났을 때 더 적게 남은 쪽이 이긴다. 그렇지?"
"네. 그리고 심사단 역할을 맡을 관객은 총 백 명이고요."
"거기다 관객 심사단이 한 명당 교환권이 하나씩……."
"이건 역시……."
"예. 엄청나게 불리하죠."
하필 홈그라운드에서 이런 주제가 걸리다니.
우리가 운이 더럽게 없는 건지, 아니면 저쪽이 운이 억수로 좋은 건지.
행운이 누구를 따르고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더라도, 여기서 가만히 지는 것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그럼 우선 중요한 건 컨셉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죠. 일단 그걸 먼저 정하고 가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유동건 사장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차윤구 셰프.
그건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건물이든 터를 봐야 설계를 시작할 수 있듯이, 요리도 컨셉을 먼저 잡아야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지 결정할 수 있다.
"일단 전 일식을 기본 메인으로 잡는다는 데에는 찬성이에요."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편파적 판정이 있을 거란 의심을 버려선 안 돼요. 이 상황에서 그런 의심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낙관이 지나친 거겠죠."
"하지만 선생님. 아까 찬혁 학생의 개인전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쪽의 셰프들은 대부분 일식을 전공으로 수학한 사람들이고, 전공이 다른 셰프라 해도 기본적인 문화 이해도는 저희보다 훨씬 높을 겁니다."
이영율 셰프의 말이 맞았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한국팀 일행 중 제대로 일식을 파고들어 공부한 사람은 없다. 내가 했던 몇 년간의 일식 공부? 그 정도로는 일본팀과 비교하면 새발에 피도 안 되지.
다른 어르신들도 나와 그다지 큰 차이가 난다고 보기는 어려울 터.
자신의 장기를 살릴 수 있는 영역을 제 발로 벗어나야 한다는 건 우리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할 수밖에, 해볼 수밖에 없다는 게 진실이니까.
일식. 적어도 일식풍 도시락을 만들겠다는 대전제 외에는 제대로 정해지는 게 없는 상황.
모처럼 시작한 회의가 지지부진하던 그때, 교장 선생님께서 새로운 제안을 꺼내 들었다.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면 반대로 무엇을 하면 안 될지를 먼저 생각해서 하나씩 빼보는 거예요."
소거법. 확실히.
그렇게 하면 최소한 선택지가 줄어든다.
선택지의 다양성이란 건 어떨 때에는 뭐든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되지만, 또 어떨 때에는 배를 산으로 가게 만드는 사공 패거리가 되는 법.
옳은 길을 확실히 다지기 위한 방법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좋은 것 같아요. 일단 하나씩 길을 솎아내다 보면 언젠간 서울 가는 길이 보이겠죠."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지만, 우리는 지금 길을 잘못 들 여유가 없으니까.
자, 그럼 하나부터 시작해보자. 천리 길도 시작이 반이라 한 만큼.
***
이후로 십여 분. 우리는 제법 활발한 논의를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를 차근차근 소거해나갔다.
"일단 반찬 종류에는 되도록 매운 걸 빼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매운맛이 좀 가미되더라도 캡사이신 계열보단 알리신이나 시니그린, 진저롤 계열이 나을 것 같고요."
"하긴, 캡사이신 계열의 매운맛은 일본에서 그리 환영받는 타입은 아니에요."
"뭣보다 그걸 저희 기준으로 조절해서 넣으면 못 먹진 않더라도 상당히 호불호가 갈릴 테고요."
누군가는 맛의 성분에까지 입각한 통찰력을 보여주었고.
"음…… 그럼 전 튀김 계열 요리는 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날씨가 건조하다지만 튀김옷이 수분을 못 견딜 거예요."
"확실히……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나가는 요리라면 모를까, 이런 심사환경이면 완성된 요리를 손님들이 드시는 건 못해도 완성되고 30분은 지난 다음일 거예요. 맨 마지막에 완성한 도시락이면 또 모를까, 가장 처음 완성된 도시락이라면……."
"확실히, 튀김옷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네요."
누군가는 도시락이라는 주제의 심사 환경에 주목하여 주의사항을 제시했다.
그 외에도 현재 얻을 수 있는 재료 중 철이 지난 것.
도시락이라는 요소와 맞지 않는 것.
현재 그들이 가진 기술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불가능과 가능을 구분하여, 정교한 작두처럼 칠 것은 쳐내고 써먹을 수 있는 것은 골라내가며.
그렇게 그들은 올바른 도착지로 향하는 길을 지혜와 노력의 땀으로 조금씩, 그러나 전력으로 닦아나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시합에 이기기 위한 준비에 한창인 이때,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
"우와……."
지랄 났네.
티끌만 한 가감도 없이, 양희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인 성미설이 들었다면 계집애가 채신머리 좀 지키라고 한 소리를 들었겠으나, 아마 그런 그녀도 직접 이 광경을 본다면 틀림없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켜! 비키라고!"
"제발……! 제발 맞게 해주세요……!"
"당첨, 당첨, 당첨, 당첨, 당첨, 당첨, 당첨─"
"QR코드를 센서에 대고 스위치. QR코드를 센서에 대고 스위치."
현재, 도쿄돔의 관중석은 그야말로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기어 나온 망령들이 판치는 도박판이 되어 있었다.
기회는 딱 한 번.
랜덤으로 뽑히는 당첨자가 나올 때마다 남은 자리가 하나씩 줄어드는 선착순 로또.
"……."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양희연은 문득 어릴 적 보았던 어느 광경이 떠올랐다.
일본에는 합법적인 도박기계인 파칭코라는 물건이 있고, 그런 파칭코를 즐기기 위한 도박장이 있다. 물론 경품이니 뭐니 온갖 우회적인 통로가 있고, 해외 관광객도 가볍게 놀다 갈 만큼 개방적인 공간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역시 도박장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개방적인 도박장인 탓에 더더욱 얕게 접할 기회가 많았다.
도박장이라는 곳이 원체 온갖 인간군상이란 군상은 어디 부럽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 곳이라, 양희연 또한 그 입구를 지나며 상당히 다양한 형태로 망가진 사람을 본 기억이 있다.
"으, 으아아아아! 안 됐어!? 왜, 왜 나만 안 돼! 난 왜 당첨이 안 되냐고!?"
"…… 끄흡, 끄윽……! 히윽, 히끅! 흐, 흐흐허어……."
'…… 마 시방 참말로 울고 자빠졌네…….'
그러나, 그러나 이건…… 이건 그녀가 본 과거보다 몇 배는 심했다.
누가 보면 전 재산에 대출까지 끌어다가 꼴아버린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다.
한편, 관객석 어딘가에서는 세상을 다 잃은 사람의 울음소리와는 전혀 반대되는, 그야말로 돈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환희로 가득한 함성을 내지르는 이도 있었다.
"…… 어? 어어? 우, 우오, 우와아아아아! 됐다! 됐다아아아!"
"당첨됐다! 난 당첨이다아아!"
어찌나 목청이 큰지 관객석 전체에 모인 사람들의 질투로 불타오르는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으나, 그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커다란 기쁨에 빠진 그들의 관심을 돌릴 수는 없었다.
'…… 아니, 돈벼락이 맞나?'
아까 커뮤니티를 잠깐 살폈을 때 본 글에 따르면, 어느 나라의 갑부가 당첨 티켓 한 장에 수십만 엔으로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고작 도시락 한 통에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둘째 치더라도 그만한 돈이면 어지간한 회사원의 한 달 월급 수준이다. 고작 500분의 1 확률을 뚫은 것치곤 상당히 짭짤한 수익 아닐까.
물론 그걸 팔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었고, 누군가는 원화로 수백만에 달하는 금액을 포기하면서까지 도시락 한 통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
그리고, 또 누군가는 그 선택의 기로 앞에서 고민을 하는 이도 있었고 말이다.
"이를 우짜면 좋노."
양희연은 자신의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관객 심사단 당첨'이라는 화면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적어도 한 학기 학비는 거뜬히 낼 돈이냐, 그렇지 않음 친구의 도움이 될 한 표를 행사할 권리냐.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던 양희연은, 이내 쓸데없는 생각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뭐, 쪼매 비싼 밥이나 한 끼 했다 치자."
첨언하자면, 양희연은 부잣집의 하나뿐인 외손녀다.
***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지?"
"예.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저희들한테 이 이상은 없을 것 같아요."
레시피를 만들기 위한 시간이 거의 막바지에 달했다.
토론을 통해 뺄 것은 과감하게 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집약한 레시피.
'이 레시피대로면 내가 조금…… 아니, 더럽게 힘들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뭐, 젊다는 게 뭐냐. 젊으면 고생도 사서 한다 했다.
물론 그 고생을 해서 얻을 게 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 같은 경우는…….
'당연히 있지.'
우리의 승리라는, 아주 값지고 멋진 얻을 것이 말이다.
"뭐……."
그걸 정말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가 계획한 요리가 관객들한테 얼마나 잘 먹히느냐에 걸렸겠지만.
"레시피는 이쯤 했으면 충분하겠죠. 찬혁 학생. 심사단 측에 제출 부탁드립니다."
"넵."
교장 선생님이 정리해서 건네주신 서류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 그걸 들고 심사단이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로 향한다.
대기실 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전조 없이 열리는 문.
문이 열리고 잠시 후 심사단 대기실에서 나온 얼굴을 확인한 나는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
"……."
이시무라 유이치 셰프. 그쪽도 지금 막 레시피를 제출한 것일까. 나를 보고 놀란 기색을 비추던 눈이 이윽고 평소처럼 완고한 인상으로 돌아온다.
"…… 수고하세요."
"아, 네. 셰프도요."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것도 잠시. 딱히 할 말도 없었던 건지 짧은 인사를 건넨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내가 온 방향 반대쪽으로 떠나갔다.
하긴, 이쪽도 딱히 할 말이 없어 찜찜했던 참이긴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의아해하며 심사단 대기실로 들어가자, 면밀히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심사위원들이 나를 반겼다.
"아, 류찬혁 선수. 어서 오세요."
"한국팀도 레시피를 완성하셨나요?"
"예. 제출하러 왔습니다."
보던 서류도 제쳐둔 그들은 내가 내민 예상도를 잽싸게 받아들곤 검토하기 시작했다.
1분, 2분.
차근차근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 완성할 것인지, 도시락에 어떤 트릭을 숨겨둘 것인지를 확인한 심사단이, 뒤이어 상당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 이 레시피, 진심인가요? 한국팀이 이렇게 요리를 만들겠다고요?"
"네."
"허어…… 그야 일식을 쓰리라곤 예상했습니다. 저희도 주제가 정해졌을 때 깜짝 놀랐을 만큼 지금 상황은 한국팀에게 너무 불리하니까요. 하지만……."
잠시 말을 흐린 심사위원이, 날 보며 이어서 말한다.
"장어덮밥…… 아니, 모듬 장어요리 도시락이라니."
대담한 승부수를 던지셨군요. 그렇게 눈으로 묻는 그들에게 난 답했다.
"고객이 좋아하실 요리를 준비하는 건 요리사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일본인이 없어서 못 먹는다는 장어덮밥 요리.
심지어 장어덮밥 소스만 뿌린 맨밥조차 기꺼이 돈을 주고 사 먹는 그들에게, 우리는 보여주리라 굳게 다짐했다.
장어 요리의 새로운 지평을.
그것을 위해선,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저, 그래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도시락 이외'의 소품은, 어디까지 허가가 됩니까?
우리가 공략할 키워드는 '온도'.
오늘의 최종 승리는 바로 그 키워드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