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 엑스트라 룰.-2-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의 단체전 규칙은 다음과 같다.
하나. 주제가 선택되면 해당 주제에 알맞은 조리시간을 산정하여 매뉴얼에 기록된 시간 이내에서 심판이 임의로 지정하여 주어진 시간 안에 조리를 끝마친다.
둘. 모든 주제는 메뉴 세 가지의 제출을 원칙으로 한다.
셋. 심사는 심사단의 고유한 권한이나 판정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합당한 이의라면, 심사단은 이에 대한 해명을 할 의무가 있다.
대충 크게 정리하면 이 정도고, 조금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사용할 수 있는 재료의 제한 같은 시시콜콜하고도 알아먹기 힘든 규칙이 몇 가지 더 존재하지만 이건 딱히 지금 알 필요는 없겠지.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모든 규칙 아래에 한 가지 특이사항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규칙에서 특별 규칙이 적용되는 주제는 예외로 처리한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특별 규칙이 적용되는 주제가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아니, 근데 그 많은 특별 규칙 적용 주제 중에서 하필 도시락이라고?'
도시락이 뭐가 문제냐고? 그건 아마 지금부터 심판 아저씨가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줄 테니 잘 들어보면 알 거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 건지.
"…… 도시락 주제에 대한 룰 설명을 시행하겠습니다."
이게 굉장히 큰일이라는 걸 깨달은 것인지, 서양인인 심판마저도 인상을 찡그리곤 '이거 실환가?' 싶은 얼굴로 설명을 시작한다. 솔직히 나도 헷갈린다. 이거 진짜 실화야?
"본 주제는 특별 규칙이 적용되오니, 상세 설명은 정면 전광판으로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일어와 한국어. 두 가지 언어가 주기적으로 뒤바뀌는 화면과 함께 새까맣게 물든 전광판 위로 하얀 글씨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하나. 본 규정은 도시락 주제에 적용되는 특별 규칙이다.
둘. 제한시간은 세 시간. 주어진 시간 이내에 100인분의 도시락을 완성하여 제출하라.
셋. 도시락의 내용물에는 실루엣, 이미지를 통한 은유 등. 국가를 특정할 수 있는 그 어떤 요소도 들어가선 안 된다.
넷. 도시락은 선수에게 주어진 준비시간 이내에 예상 완성도를 제작하여 기존 심사단과 심판의 검수를 통과한 완성도대로만 조리할 수 있다.
다섯. 심사는 행사장 입장 티켓을 소지한 관객 중 관객 참여 심사단 신청자 100인을 주체로 실시된다.
여섯. 심사는 두 팀 중 준비한 도시락이 더 먼저 소진된 팀, 혹은 심사 제한시간 이내에 더 많은 물량을 소비한 팀의 승리로 한다.
일곱. 2, 3, 4 규정을 준수하지 못할 경우, 해당 팀을 실격 처리한다.
'라는 건데…….'
어떤가. 언뜻 보기에는 제법 그럴듯한, 평등한 조건을 표방하는 규정처럼 보이지 않는가?
'뭐…… 평등한 규정이 맞긴 하지.'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만약 이게 일본팀과 우리 팀의 경기가 아니었다면…….
아니, 이곳이 상대팀의 홈그라운드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러지 않았겠지!
뭐? 세 시간 안에 도시락 100인분 만들기? 지금 우리 팀 멤버라면 세 시간에 100인분이 아니라 300인분도 거뜬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시합의 심사단이 바로 관객들 중 추첨으로 뽑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봐라. 만약 한국에서 한일전이 열렸는데 관중투표로 승자를 뽑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 이긴다! 심지어 일본어 사생대회를 열고 한국어로 시조를 써내도 이기는 건 한국이겠지!
이 상황은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5만 명의 관중 중 7~8할이 일본인. 당연히 저들 중 추첨으로 100명을 뽑아도 대부분이 일본인일 것이다. 평균적으로 5할 이상은 당연히 먹고 들어가겠지.
그 5할이 일본이 만든 도시락에 무지성 투표를 하면 우리가 무슨 생쇼를 하든 이길 수 있을 리가.
뭐? 그럼 3번 규정을 어기는 거 아니냐고?
그래. 바로 그거다. 거기서 이 규정의 함정이 생겨난다.
도시락 통은 제작진에서 준비해 둔 샘플 몇 가지 중 하나만 골라서 쓸 수 있고, 거기다 룰 3번 탓에 어느 요리를 어느 팀이 만들었는지 알기 힘들어지긴 하겠지.
그런데 말이다. 저 3번 규정의 제한이 과연 어디까지일까?
적어도, 내가 읽은 룰북의 내용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면 정답은 이러하다.
국기나 모종의 도형, 특정한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형상, 문자, 숫자, 기호, 심볼.
이 위의 제한사항만 지키면 된다.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만들라고 하면 만들지 못할 것도 없긴 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저런 사항이 포함된 음식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저것만 빠지면 무슨 음식이든 만들어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일본팀은 이상의 규칙만 지키며 일식 도시락을 만들어도 그 어떤 제지도 받지 않는다.
'이쯤 되면 알겠지.'
이게 정말 큰 일이라는 걸.
이렇게 말하면 조금 난감한 이야기로 들리겠으나, 지금 우릴 둘러싼 관객들에게 심사를 맡기면 맛있는 요리를 찾아서 고르는 게 아니라 일본팀의 요리를 찾아 고르려고 할 것이다.
물론 모든 관객이 그러리라고 일반화를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심사단으로 뽑힌 100명의 관객 중 3분의 1 정도만 그런 성향을 띄고 있어도 우리의 승리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된다.
저쪽은 그냥 평소 저쪽이 특기로 삼는 일식을 그대로 만들어서 제출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만약 우리가 프렌치가 됐든, 아니면 한식이나 중식을 하든 평소 우리가 잘 하던 걸로 도시락 메뉴를 구성해서 제출하면 어떻게 될까?
볼 것도 없다. 그 순간 이 시합은 끝난다고 봐도 좋겠지.
실력 차이가 난다는 가정을 깔고 들어가도 오히려 불리한 건 이쪽인데, 설상가상으로 저쪽의 실력은 우리와 비교해도 아주 큰 차이는 없다.
"와…… 이거 진짜 어쩌면 좋냐."
이쯤 되면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 뭔가 부정행위를 저지른 게 아닐까?
설령 부정행위를 저지르더라도 이렇게 대놓고 저지르진 않으리란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의심이 절로 들 만큼 작금의 상황은 답이 없었다.
이쪽은 팔다리에 족쇄를 차고 링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저쪽은 제 전력을 온전히 쏟을 수 있으니.
"나, 진짜 똥손인 건가."
이쯤 되면, 이 상황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아 참으로 서글픈 기분이었다.
***
양 팀의 도시락 예상 완성도 구상과 관중 참여 심사단의 선발을 위해 다시금 20분가량의 시간이 주어졌다.
앞선 휴식시간에 이은 또 한 번의 공백이었으나, 이 상황에 불만을 품는 관객은 단언컨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 그건 바로 이 순간이 관객이 직접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여태껏 행사장에 직접 찾아와 대회를 관람하던 관객들은 국적과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같은 이유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 이유란 간단하다. 흔히 말하는 '위꼴'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간단함을 간소하다고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예로부터 배고픔을 자극하는 행위는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의 일종으로 사용된 전적도 있으니, 사람의 음식에 대한 열망은 참으로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법이었다.
거기다 그런 강렬한 열망이 세계에서 돈을 줘도 쉬이 만나지 못할 세계 최정상 셰프들이 힘을 모아 만든 요리와 만나자, 그 열망은 이윽고 불꽃이 되었다.
행사장을 유치한 며칠 동안, 행사장 주변 상권과 대회 중계 시청률이 높은 지역에 소재한 식당의 매출이 100% 이상의 상승세를 기록했던 걸 보면 이해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렇게 식당 매출에 커다란 공헌을 한 관객들은, 입으로는 고기와 채소를 씹으면서도 눈으로는 행사장에서 각 팀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요리문화의 결정체를 좇았다.
그리고 지금, 오로지 눈으로만 좇았던 그 열락의 기회를 비로소 손에 쥘 때가 왔다.
사람이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도시락 승부의 특별 규정이 생방송으로 일본 전역에 방송된 그 순간, 특히나 커다란 반항이 일어난 곳은 다름 아닌 일본의 티켓팅 사이트.
그중에서도 중고 티켓을 판매하는 중고장터였다.
가끔 특별한 공연의 티켓은 그 자체로 컬렉션의 가치가 있기에 나름 활기를 가진 채 운영되던 티켓 중고장터.
그러나 오늘, 그곳을 찾는 이들의 목적은 '컬렉션'의 가치를 지닌 티켓이 아니었다.
─[삼삼삼삼삼]도쿄돔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QR코드 미사용 티켓 구매합니다.
─[입장료두배지불용의있음]도쿄돔 글푸서 추첨 안 한 티켓 사요.
─[5만엔부터경매]도쿄돔 글푸서 관객 참여 심사단 당첨 티켓 판매.
└5.5만.
└5.8만.
└6만.
└6만5천.
└10만 엔.
└└미친; 도시락 하나에 10만을 태워?
└└└5성 호텔 파인다이닝 코스 한 끼가 5만쯤 된다. 거기 주방장 급 셰프 다섯 명이 같이 만든 요리면 10만 크게 안 아까움.
그들의 목적은, 다름 아닌 세계적 유명세를 지닌 다수의 요리사가 힘을 합쳐 만들어낸 세계 최고의 요리를 먹겠다는 것.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일본 내에서 해당 티켓을 현장 중고거래 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는 거의 대다수가 먹통이 될 지경이었고, 심지어 그 사이트의 글 목록 대부분을 차지한 건 판매가 아닌 구매의사를 밝히는 글이었다.
극소수의 중고티켓 판매 글은 사기거나, 혹은 글이 목록에 뜨기가 무섭게 상당한 가격으로 팔려 버렸고, 개중 정말로 보기 드물게 올라온 당첨 티켓은 그 가격이 한화로 백만 원이 넘어간 가격에 판매되기도 했다.
그 이상의 가격도 찾으려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정말로 예상치 못한 순간 갑자기 터져 버린 급보.
일본열도 전체…… 아니. 세계 전체가 패닉과 동시에 광기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든다.
각국의 트위터에서는 티켓을 가진 도쿄돔 관중을 진심으로 부러워했고,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몇몇 갑부는 온 커뮤니티를 통해 이렇게 알리기도 했다.
─지금 당장 자가용 제트기를 타고 도쿄로 가겠다. 심사가 시작할 세 시간 이내에 반드시 도착하겠다. 당첨된 티켓을 가진 이는 그걸 내게 팔아라. 현재 시세의 열 배의 가격을 주고 내가 구매하겠다.
이 시점에서 정말 두려운 것은 이런 글을 올린 게 비단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단 것이며,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을 올리는 이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단 사실이었다.
간단하게 넘어가기에는 너무나도 규모가 확대되어 버린 사태 속.
점차 풍속을 더해가는 폭풍의 눈에 선 두 팀의 모습은, 놀랍도록 대조적이었다.
***
"이건 기회다."
팀원을 그러모은 유이치의 한마디였다.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승부, 우리에게 아주 유리하다."
유이치의 말에 일본팀 전원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홈그라운드에서 관객 평가 심사라니. 아무리 만든 이를 밝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패배할 리가 없는 싸움이었다.
일본의 요리문화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도시락 문화.
맛있는 건 당연하고, 아름다운 치장과 그 안에 의미를 담는 정성은 동아시아 삼국 중 그 어느 나라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진 내가 말하기엔 염치가 없지만, 한국팀은 우리가 아무리 유리하다 한들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 말에 부정을 뜻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이 남자. 유이치가 팀장을 맡은 이유는 본신의 실력과 통솔력이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구도 유이치의 주특기인 조림 요리란 영역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찬혁은 그에게 이겼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경계심을 한 몸에 사기엔 충분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번 심사에 모든 것을 불태워도 좋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할 예정이었다.
"우리들의 도시락 메뉴는 오세치御節 요리다."
그들의 전력이, 불리하기 짝이 없는 한국팀에게 칼날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
"…… 솔직히, 죽도록 불리하네요. 이 경기."
찬혁이 피곤하다는 듯 툭 던진 말에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하필 제대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시점에 이토록 불리한 주제라니. 어지간히 멘탈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길 궁리는 해야겠죠. 여기서 그냥 멍하니 져줄 수는 없으니까."
그 또한 맞는 말. 하지만 어떻게?
그야말로 사면초가인 상황 앞에서, 찬혁은 얄궂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네요. 저희, 한 번 더 해볼까요?"
"한 번 더?"
"뭘 한 번 더 한다는 거야?"
찬혁의 속내를 알지 못한 유동건과 차윤구의 질문에, 찬혁이 담담하게 답했다.
"일식 정면대결이요."
다만,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된 일식으로.
이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
가끔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어야만 보이는 활로라는 것도 있다.
찬혁의 두 눈은 그런 말을 당돌하게 외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