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 엑스트라 룰.-1-
"긴박감 넘친 첫 번째 경기! 승리의 주인공은 한국팀입니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고, 우레와 같은 성원이 내게 쏟아지는 일은……. 아쉽지만 없었다.
아니, 사실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대충 이런 분위기가 되리란 건 예상했으니까.
'쓰레기가 안 날아와서 다행이지.'
지금 이 장소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다지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감을 못 잡겠다고? 대충 만석 찍은 잠실운동장에서 한일전을 뛰었는데 일본이 이겼다고 생각해봐라.
어휴. 이거 돌아가는 길에 칼 맞는 거 아닌가 몰라. 가능성이 0이 아니라는 게 진심으로 소름 돋는 부분이다.
뭐 아무튼 그건 그거고.
심사단 측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경기가 끝나면 연례행사처럼 치르던 분위기 띄우기를 그만두고 서둘러 차례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 그럼 다음 시합을 진행하기 앞서 잠시 휴식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합은 20분 후에 시작될 예정이오니 오늘의 명승부를 놓치지 않고 관람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MC의 인사가 끝남과 동시에 스테이지 조명이 소등된다. 살짝 어둑하지만, 적당히 걸어 돌아갈 정도의 시야는 확보되는 상황.
무대에서 내려와 대기실로 돌아가는 동안 내 머리에 적잖이 커다란 고민이 샘솟는다.
조금 이따 있을 두 번째 경기? 아니. 그건 아니다.
내 걱정은, 그보다는 좀 더 빨리 나를 찾아올 어떤 무서운 연락에 대한 것이었다.
***
─니 진짜 미쳤지? 어? 니 진짜 미친놈이지!?
거봐라. 벌써 왔지?
"아 좀, 고막 나가겠다."
─좀은 지랄이 좀이가. 나와라. 내가 직접 후벼줄게.
"죄송합니다."
농담조로 대꾸하자마자 빠꾸 없이 날아오는 고막 빵꾸의 위협.
타지까지 날아와 그런 꼴이 되는 것만큼은 사양이었기에 나는 금세 꼬리를 말고 사과했다.
─……하아, 됐다. 내가 닐 데꼬 무슨 말을 하겠노.
사실 개인적으로는 난 딱히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저쪽이 먼저 날 찾아올지도 모르니 입을 꾹 닫았다.
─근데 진짜 뭔 생각인데? 주제를 조림으로 고른 것도 그렇고. 처음부터 다른 주제를 골랐음. 더 쉽게 이기지 않았겠나?
"쉽게? 글쎄다. 그건 모르지."
원래 사람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 들수록 방심하게 된다. RPG게임 따위를 할 때 고레벨에 만난 저레벨 몬스터를 보면 그냥 생각 없이 평타를 치게 되는 것처럼.
사실은 그게 물리 무시에 즉사기를 가진 기믹 몬스터라는 걸 모르고 말이다.
뭐, 이런 비유는 아마 철정이 녀석이나 알아듣지 않을까 싶긴 한데…….
─아, 뭐 크라운 퀘스트 나오는 메탈 슬라임 같은 거 말하는 거가.
"……그게 뭐야?"
─크퀘도 모르는 게 아가리를 놀리고 자빠졌나.
틀렸다. 이 녀석은 '진짜'였다.
"크, 크흠. 어쨌든.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라 이거지. 그중에 마침 좋은 레시피가 생각나서 써봤을 뿐이고."
─흐응…….
잠시 콧소리로 시원찮은 호응을 뱉은 녀석은 이내 툭 쏘아내듯 말했다.
─택도 없는 소리란 건 니도 알제?
이것도 안 통했나.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난제. 여자들의 직감은 어느 때엔 날카로운 통찰력보다도 예기를 더할 때가 있다는 것.
─됐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내가 뭐라 캐도 들어먹을 놈도 아이고.
"하, 하하……."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듯 자비를 베푸는 녀석. 나는 순순히 그 자비를 받아들였다.
─거는 거고. 니 지금 큰일 난 거 아나?
"뭐? 내가? 왜?"
─아이고 마, 죽자고 주방에만 매달려가 사니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모르네.
작게 깔깔대며 웃은 양희연이 말을 이었다.
─아까 니 이겼을 때 이쪽 반응 어땠는지 아나? 내는 사람이라도 죽었나 했다.
"……그 정도였어?"
─아니. 뭐, 그 정도는 아이다.
아, 역시. 나는 작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요리 시합에서 좀 진 걸 갖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거겠지.
─아마 니 생각보다 심하다 싶다. 웬만하면 대기실에서 나오지 말고 시합할 때만 나오래이. 지금 바깥 나오면 정말 앗 하는 새에 골로 갈 수도 있다.
"맞나……."
─갑자기 미칬나 왜 사투리를 쓰고 지랄인데.
여보세요? 그게 당신이 할 말일까요?
어쨌든. 이어진 양희연의 말에 따르면 지금 관객석 분위기는 정말 장례식장 5분 전인 느낌이라고 한다.
일본 요리계의 원로에 가까운 사람이 하필이면 한국의 소년에게, 그것도 일식으로 패배했다는 것이 커다란 충격이 된 것 같다나.
사실 내가 만든 건 딱히 일식은 아니었지만, 겉보기만큼은 제법 그럴듯한 일식이긴 했으니까. 계통을 면밀히 따지면 일단은 퓨전 일식이 맞기도 했고.
─아무튼 조심하고, 다음 경기도 잘 해봐라.
"어, 땡큐."
─혹시 다음 시합도 연승으로 이겨서 시합 끝나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잽싸게 튀어 온나. 그땐 우리 여관보다 안전한 곳도 따로 없을기다.
"네."
정말 도움 되는 조언 감사합니다. 뼛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근데 그거 괜찮은 거야? 너네 가게에 안 좋은 일 생기는 거 아니지?"
─걱정 붙들어 매라. 우리 여관 대표적인 자랑거리가 뭔지 아나?
"아니. 뭔데?"
─연예인 숙박객이 와도 파파라치 한 번 당한 적 없다는 거다.
오호라. 그거 참.
일본이란 나라에서는 쉬이 달성하기 힘든 어려운 업적이었다.
***
양희연과의 짧은 통화가 끝난 뒤. 휴식을 마친 우리는 다시 스테이지로 돌아왔다.
아까와 다르게 이번에는 양팀의 전원이 한자리에 모인 상황. 서로를 마주 보는 열 명의 요리사 사이에 선 MC는 여전히 표정이 안 좋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닌가.'
서로를 향한 시선에 깃든 호승심. 개인 수준의 호승심은 열정과 투지, 그러나 혼자가 아닌 무언가를 짊어진 이의 호승심은 곧 전의가 된다.
저쪽도, 그리고 물론 이쪽도. 이 자리에 걸린 건 우리 개인의 명예나 위신만이 아니기에 눈에는 전의가 섞인다.
그 전의가 맞부딪치는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으면 당연히 좋은 표정은 지을 수 없겠지.
심지어 오늘 행사장의 MC를 맡은 사람은 당연히 일본의 연예인. 안 그래도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때에 자그마한 말실수라도 했다간 그대로 온갖 조리돌림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일거수일투족이 조심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잠시 우리와 일본팀. 그리고 관중의 눈치를 살핀 그는 이어 마이크를 잡고는 아까보다 조금 텐션이 내려간 목소리로 멘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다시 무대에서 재회한 두 팀! 이제야 첫 번째 경기를 마쳤을 뿐, 이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황에 관계없이 몇 마디 말로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솜씨. 과연 프로다웠다.
"자! 과연 이번 승부의 행방은 어떻게 될 것인가! 승리의 흐름을 타고 첫 득점의 어드밴티지를 지켜낼 한국팀인가? 그렇지 않으면 일본팀이 패배를 만회하고 역전의 발판을 세울 것인가! 그 답이 곧 밝혀진다!"
……뭐, 멘트 선정이 조금 유치한 건 어쩔 수 없나. 나는 통역이 없어도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는지라 조금 낯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럼 2라운드를 시작하기 전 양 팀의 각오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쪽!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일본팀! 팀장인 이시무라 유이치 셰프.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MC가 자신의 마이크를 유이치 셰프에게 들이댄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으나, 패배의 충격을 어떻게든 털어낸 듯 보이는 유이치 셰프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번씩이나 패배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하! 1라운드의 패배를 반드시 만회하겠다는 각오, 아주 잘 들었습니다!"
힘내라며 주먹을 쥐는 모션을 취한 MC가 이번엔 교장 선생님께 마이크를 돌렸다. 통역은 필요 없다고 미리 제작진 측에 공지한 상태였기에, 그쪽에서도 부담 없이 말을 건넨다.
"안영길 셰프. 부디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 젊은 친구가 따낸 소중한 승리를 반드시 지키고자 합니다."
"과연, 한국팀은 소중한 승점을 무산되게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 그렇다면 이 시합의 모양새가 얼추 보이는 느낌이로군요!"
MC가 과장된 동작으로 큐카드를 휘두르더니, 그것이 검지라도 된 것 마냥 일본팀을 가리킨다.
"일본팀은 배수의 진! 물러날 곳이 없는 공격 일변도! 그에 비해 한국팀은 얻은 승리를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디펜딩 챔피언의 자세! 일본팀의 창이 한국팀의 방패를 뚫을 것인가? 한국팀의 방패가 일본팀의 창을 막을 것인가! 그야말로 모순! 그러나 오늘의 시합은 동화가 아닙니다! 두 팀 중 하나는 부서질 수밖에 없는 운명! 과연 부서지는 건 누가 될 것인가! 창인가? 그렇지 않으면 방패인가!"
도대체 어떻게 저 긴 대사를 단박에 쏟아내는지 신기할 정도로 열변을 토한 MC가 크게 손을 치켜올리며 말에 마무리를 지었다.
"그 결과를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부터 주제 추첨의 시간이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격한 해설과 함께 자리를 빠져나간 MC.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채우는 건 무뚝뚝한 인상의 심판이다.
"지금부터 주제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주제가 선정된 후, 선정된 주제에 따라 규칙 안내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태껏 몇 번이나 들어본 심판의 안내. 다른 상대를 만날 때마다 들리는 언어가 바뀌긴 하지만, 내용 자체는 항상 똑같았다. 사실, 규칙도 크게 다를 건 없었고. 해봤자 시간 차이였던가.
가끔 특이한 주제가 나올 때에는 규칙도 바뀐다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다.
'끝까지 가도 안 나올 것 같기도 한데…….'
그거야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거겠지만.
여태껏 한국과 미국을 돌며 다양한 형태의 전광판을 봤지만, 됴쿄돔의 전광판은 조금 더 신선하다.
본래 콘서트의 무대로 자주 사용하는 탓일까. 스테이지 뒤편의 벽 한 면을 통째로 채운 초대형 디스플레이가 바로 도쿄돔에 설치된 전광판.
룰렛이 돌아가는 효과음과 함께 전광판에 수없이 떠오르는 온갖 단어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그 속도가 줄어들다가, 이윽고 룰렛이 제자리에 멈추며 어느 한 가지 단어를 가리킨다.
"어?"
"아."
"뭐?"
"잠, 잠깐."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광판 전체를 채울 만큼 커다란 단어가 화면에 출력 됐을 때, 우리는 서로의 팀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입을 떡 벌린 채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몇 초의 순간. 나중에 생각하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충격적인 시간이었지만. 고민 끝에 나온 결론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와, 조졌다."
아니. 지금 와서 다시 되새기면 생각이 아니라 말로 한 것 같기도 하다.
***
"두 번씩이나 패배할 생각은 없습니다."
유이치에게 이 말은 굉장히 중의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
하나는 당연히 1라운드 개인전에서 찬혁에게 당한 패배.
1라운드를 그렇게 허망이 내주고, 2라운드마저 빼앗길 수 없다는 각오.
그리고 하나 더.
'저번 시즌에 이어서, 이번 시즌까지 한국에게 질 순 없다.'
만약 그랬다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몰매를 맞을 것이며, 또 자신에게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그런 미래, 유이치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각오했다. 이번 시즌만큼은 결코 질 수 없다.
아니. 보다 근시안적으로는 결코 이번 라운드만큼은 넘겨주지 않겠다.
그야말로 이 한 번의 경기에 얼마 남지 않은 현역 인생 전부를 불태울 각오.
"이, 이건……."
그런 유이치의 각오를 하늘이 들어주기라도 한 것일까.
그 기적은 갑작스럽게 일본팀에게 찾아왔다.
전광판에 뜬 단어를, 유이치는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멍하니 바라봤다.
한 차례 겉으로 빠져 있던 MC가, 그들을 대신하여 커다란 외침을 내지르며 주제의 정체를 알린다.
"도시락! 일본 대 한국, 한국 대 일본! 2라운드 단체전의 주제는 도시락 승부다아아!"
도시락 승부.
말 그대로 도시락을 만들어 평가를 받는 심사지만, 유이치가 본 참가자용 룰북에 그런 구절이 있었다.
기본적인 룰의 적용을 받지 않는 '특수 규칙extra rule'을 가진 주제.
그렇다. 도시락이 바로 그 '특수 규칙'을 가진 주제였다.
도시락의 특수 규칙은 수많은 특수 주제 중에서도 특히나 유이치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그 수많은 주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락 승부는……."
유일하게, '관객 평가'로 승부가 정해지는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