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 시간의 마술사.-6-
"말도 안 돼!"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 버린 유이치의 외침에 좌중의 시선이 모였다.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부담을 느낄 만도 한 상황이었으나, 이미 유이치의 사고는 거기까지 신경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당황스런 얼굴로 어쩔 줄 모르는 심사위원단 앞에 선 유이치가 그들에게 물었다.
"판정이 이렇게 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판정에 대한 이의제기. 드물기는 하나 처음인 일도 아니었기에, 심사단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유이치에게 되물었다.
"어떤 부분에서 납득하지 못한 건지 먼저 여쭤보고 싶군요."
"심사 기준에 대한 의문입니다. 제 요리가 상대의 요리보다 맛이 없었던 겁니까?"
"음……."
어려운 질문이었다.
맛이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것이고, 심지어 그게 서로 다른 요리일 경우에는 우열이라는 것을 나누기가 더욱 힘드니까.
다만 이번 같은 경우에는 심사단도 그 질문에 어렵잖게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희의 논의 끝에 나온 결과입니다만, 두 선수의 요리는 외관과 향미에 대한 부분에서는 거의 동등한 점수를 기록했습니다."
"……!"
동등한 점수. 그 발언에 유이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인다.
'동등하다니.'
전통 일식 요리사로 평생을 살아온 자신의 요리와 이제 갓 성인이 될법한 외국의 소년 요리사가 만든 일식이 동등.
찬혁과 자신의 나이 차이는 40에 가까울 터. 좋게 말해도 녹록치 않던 그 생애가 단숨에 좁혀졌다는 사실이 유이치에게는 더없이 쓰라리게 다가왔다.
심지어 미식에 정통한 심사단이 직접 공인했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조차 없어지고 말다니.
요리사의 프라이드가 산산이 부서졌다. 이미 할 말이 없어야 정상이다. 유이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승패가 이렇게 갈린 건 어째서입니까?"
그럼에도, 그의 속에 남은 승부욕은 이유를 바랐다. 그것은 이시무라 유이치라는 인간 개인이 가진 호승심이 아닌, 일본 요리계의 자존심을 어깨에 짊어진 이의 책임감이었다.
"사실, 맛과 멋이란 부분에서 저희는 승부를 도저히 결정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차적인 요소로 눈을 돌리게 됐죠."
"부차적인 요소?"
"예. 주제에 대한 이해도나 조리 시의 위생 등. 이런저런 부분을 까다롭게 검토했죠."
"그리고 그중에서 저희가 가장 주목한 부분이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시간. 찬혁의 요리가 완성된 시점부터 무시할 수 없었던 키워드가 기어코 튀어나오고 말았다.
"두 요리의 수준이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비등하다면, 그다음 볼 부분은 역시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하나의 설계도로 같은 건물을 만들었을 때, 완성도가 서로 동등하다면 더욱 우수한 건 빨리 완성된 쪽이겠죠."
"그것이 저희의 판단 근거였습니다."
"큭……!"
심사단의 판단 근거에 대해 유이치는 전혀 토를 달 수 없었다. 실제로 현장에서도 요리의 퀄리티와 위생 다음으로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이 시간이니까.
같은 퀄리티라면 손이 빠른 직원이 우수하다. 어느 현장에서든 당연하게 통용될 상식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의문스럽다.
유이치 또한 어디 가서 손 빠르기로 뒤져본 일이 없다지만, 찬혁의 그것은 단순히 손이 빠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의 비밀. 유이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말 미치도록 궁금했다.
"이걸 이렇게 말씀드리자니, 저희도 궁금해지는군요."
그리고, 유이치와 같은 호기심을 갖고 있던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사단과 선수들, 관중. 심지어는 같은 한국팀의 팀원들까지.
찬혁이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인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저희가 전문적인 요리사는 아닙니다만, 요리사가 아닌 일반인 중에서 요리에 대한 지식이 평균 이상은 되리라 자부합니다."
"그런 저희가 보기에도 류찬혁 선수의 요리에는 수수께끼가 많아요. 류찬혁 선수.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 해답을 저희에게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말머리가 갑자기 자신에게 향하자 찬혁은 흠칫 놀라며 자신에게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심사단을 바라봤다.
아니.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건 비단 심사단만이 아니다.
해답을 요구하는 5만 관중의 시선은 그야말로 칼날처럼 뾰족하게 찬혁의 전신을 찔렀다. 시선에 압력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짜부라졌으리라 확신할 만큼 보는 대상이 명확한 시선의 군집.
"저기, 그러니까……."
이거, 거절했다간 진짜 큰일 나겠구나. 그렇게 직감한 찬혁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 예, 알겠습니다."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찬혁은 심사단의 인사에 웃음으로 답했다.
반쯤 강요당한 친절에 살짝 굳어 버린 미소긴 했지만 말이다.
***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자신에게 건너온 마이크를 잡은 찬혁의 가벼운 인사에 승패가 갈린 뒤로 줄곧 웅성거림에 소란스럽던 도쿄돔이 고요한 적막에 빠진다.
그 모습이 마치 어느 유명한 박사쯤 되는 사람이 수많은 학도를 모아두고 강의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으나, 정작 그 중심에 선 건 올해부로 20세를 맞이한 소년.
그 묘한 엇갈림에 좌중마저 당혹스러움을 느낄 때쯤, 찬혁이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우선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 앞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사실 그렇게 대단한 기법을 사용한 건 아닙니다. 대놓고 말해서 상당히 단순무식한 방법이었거든요."
단순무식한 방법? 호기심을 자극하는 단어 선택에 좌중이 조금이라도 말을 잘 들어보겠다는 듯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인다.
그 중심에 있던 찬혁의 입장에선, 그것만으로도 거대한 벽이 자신을 향해 한 발짝 거리를 좁히는 느낌이었다.
"가타부타 없이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조리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사용한 재료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찬혁의 손에 들린 무언가.
"저건……."
"혹시?"
길쭉한 원통 모양. 연두색에서 하얀색으로 그라데이션을 그리는 듯한 껍질의 색채.
거의 성인남정의 허벅지에 비견될 굵기와 크기를 가진 식재료의 등장에, 좌중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치켜뜨며 숨기지 못한 놀라움을 표출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생소한 환상의 재료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 재료가 좌중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흔한 식재료였기 때문이다. 수십 미터 넘게 떨어진 관중석에서도 실루엣만 보고 그 정체를 특정할 수 있을 만큼.
"무? 설마 그건 무입니까?"
"예. 맞습니다. 무 중에서도 더 나은 걸 찾아보기 힘들 만큼 특상품이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평범한 무죠."
"그게 비밀이라고요?"
"예."
무라니. 다른 특별한 재료도 아니고, 고작 무라니?
그 충격적인 비밀의 정체에 가장 먼저 반발한 건 찬혁의 바로 맞은편에 있던 유이치였다.
"그럴 리가 없어요!"
자신의 외침에 좌중의 웅성임이 멎자, 유이치는 뒤이어 찬혁에게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무의 효능이라면 저도 압니다. 탄수화물을 분해하는 디아스타아제, 단백질을 분해하는 프로테아제, 지방을 분해하는 리파아제 등, 다양한 분해효소를 화학적으로 포함하고 있기에 소화 등에 큰 도움을 주죠. 소바의 메밀을 잘 소화하기 위해 쯔유에 무를 갈아 넣는 건 그런 효과를 보기 위함입니다."
"정확하십니다. 그렇게 잘 아신다면 무에는 또 다른 쓰임새가 있다는 것도 아시겠네요."
"당연하죠!"
단박에 말을 쏟아낸 탓에 메마른 목을 침을 삼켜 간신히 적신 유이치가 말을 잇는다.
"민간 소화제로 쓰일 만큼 탁월한 분해 능력을 가진 무는 요리에도 자주 이용됩니다. 질긴 재료와 함께 넣고 삶기만 해도 분명 부드러워지는 효과를 볼 수 있어요. 문어를 데칠 때도 그렇고, 제가 방금 만든 방어 조림에 무를 넣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효과가 있다 한들 시간을 20분씩이나 단축할 순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죠?"
"……!"
말을 끊고 들어오는 찬혁의 지적에 유이치의 말이 멈춘다. 그만큼 정확한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무를 같이 넣고 삶는다고 조리 소요 시간이 극단적으로 변하진 않죠. 분명 연육제와 비슷한 효과는 있습니다만, 실제 파인애플이나 양파, 키위 같은 단백질 분해효소를 과다하게 가진 재료와 비교하면 효과 자체는 미미한 편입니다."
"아니, 그럼 아까 한 말은 뭔가요? 무를 사용하셨다는 거 아니었습니까?"
찬혁의 설명에 의문을 품은 심사단이 묻자, 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무를 사용했죠. 하지만 사용방법이 다릅니다."
"사용……."
"방법……?"
"기존에 사용하던 방법. 예를 들어 무를 갈아서 양념에 넣는다거나, 토막 낸 무를 함께 넣고 삶는다거나 하는 방법이 아닌, 조금 더 거칠지만 효과가 빠르고 강하게 오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최 무슨 소린지……."
"여길 보시죠."
찬혁이 가리킨 것은 조리대의 한 구석. 그곳에는 이전 안영길이 한국팀의 팀원들에게 힌트라고 소개했던 커다란 수동 착즙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착즙기?"
"지금부터 제가 간단한 시연을 하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아니, 잠깐만요. 류찬혁 선수?"
심사단이 채 제지할 새도 없이, 찬혁은 무 하나를 대충 토막치고는 껍질 채로 강판에 갈기 시작했다.
거친 강판에 순식간에 갈려나간 무. 하얀 건더기와 무즙을 무명천에 보따리 싸매듯 가득 욱여넣은 찬혁은 그렇게 만들어진 무명천 주머니를 착즙기 속에 넣고 레버를 힘껏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후. 착즙기 주둥이에서 바위틈으로 솟는 샘물마냥 가느다란 물줄기가 졸졸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갈린 무에서 짜인 순수한 무즙.
티 하나 없이 투명한 무즙이 담긴 그릇을 받아든 유이치는, 그제야 이 갑작스런 쇼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 설마……."
"아무래도 유이치 셰프께선 눈치채신 것 같네요."
"설마 자네, 이렇게 짜낸 무즙에 재료를 넣고 졸인 건가……!?"
"그렇습니다. 사실, 저 조림 냄비에는 이렇게 짜낸 무즙을 제외하면 그냥 수분은 거의 전혀 들어가지 않았어요."
"세상에……."
유이치는 그제야 이 마술의 트릭을 알아챘다.
이 방법이라면 졸이는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갈은 무에 재우거나, 혹은 무와 함께 데치는 것과는 재료에 작용되는 분해 효소의 양적 차이가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를 테니까!
"미, 미쳤어."
유이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무가 수분 함량이 많은 채소라지만 주먹 하나 분량의 무를 갈아서 나온 무즙의 양은 기껏해야 종지 하나를 간신히 가득 채울 정도.
냄비 하나를 가득 채우려면, 대체 이 정신 나간 과정을 몇 번을 거쳐야 하는가.
진실로 미치지 않고서는 생각해내지 못할 방식의 기법.
"하, 하지만 이런 조리법으로는 분명 문제가 생길 텐데……!"
"예. 처음 이 방법을 구상했을 때엔 좀처럼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하나 있었죠. 이렇게 만든 무즙에 재료를 졸이면 음식 전체에 무 냄새가 너무 강하게 나서 도저히 먹을 게 못 되더라고요."
그렇다. 유이치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나 찬혁의 요리는 분명 유이치의 요리와 막상막하의 동수를 이루었다. 그런 문제가 있었더라면 당연히 이번 대결의 승자는 유이치였을 것이다.
"예? 설마요. 저희는 그렇게 과한 무의 풍미는 맡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은은한 무향이 상쾌한 베이스가 돼서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는데……."
심사단조차 그렇게 말하는 상황. 찬혁은 웃으며 그들의 의문에 대꾸했다.
"당연히 저도 예전 방법 그대로는 내지 못했죠. 그래서 즙 전체에 스며드는 무의 향을 어떻게든 억누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를 들어 무를 믹서에 한 번에 갈지 않고 일부러 강판에 갈아서 사용한 것이 그러했다.
무에서 매운맛이 나게 하는 성분인 시니그린은 매우 휘발성이 강한 화학성분. 강판에 어떻게 갈아내느냐에 따라 향을 살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예 매운맛을 죽일 수도 있다.
적된장처럼 특유의 향이 진한 조미료에 더해 그 향을 강조하는 재료를 사용한 것도 무의 향을 최대한 덮으며 딱 적당한 맛을 내기 위해서.
일부러 닭의 뼈와 살을 힘겹게 분쇄해서 사용한 것 또한, 여타 조미료의 향에 닭의 풍미가 완전히 가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이건, 이건 일식이 아니야. 일식은 이런 요리가 아니라고……!"
"그렇죠. 이건 딱히 일식이 아니에요."
일식의 기본적인 모토는 조화.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장점을 함께 부각시키는 요리.
그러나 이 요리는 다르다. 이것은 한 냄비 속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길 반복한 온갖 재료의 각축전. 어떻게든 스스로를 부각시키기 위해 조화가 아닌 사투를 택한 재료들의 군웅할거.
"그야 뭐, 여기에는 소량이지만 고추장도 조금 들어갔으니까요. 보리 향 때문에 고추장 자체의 풍미는 거의 죽어 버렸지만, 대신 무즙에 남은 무 냄새를 깔끔하게 다잡는 역할을 했죠."
물론 그 고추장 또한 보리를 사용하여 담근 보리고추장이었다.
"애당초 제가 정한 주제는 조림 요리였지 일식이 아니었잖아요?"
다만 사용한 조미료나 요리의 형식이 겉보기엔 너무 일식과 닮아서 유이치가 멋대로 착각했을 뿐이지.
"내가, 내가……."
설마 사람도 아닌 허수아비를 상대로, 그저 실체 없는 허깨비를 좇고 있었을 뿐이란 말인가.
찬혁의 발언에 마음이 꺾인 유이치가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트릭에 심취하여 정작 쇼 자체를 즐기지 못한, 어느 눈치 없는 관객의 말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