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 시간의 마술사.-5-
유이치는 이어지는 심사단의 반응에 얼굴을 굳혔다.
마치 입사를 앞둔 최종 동시면접 자리에서 함께 면접을 보는 다른 입사 지원자가 저 혼자 면접관의 칭찬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기분.
짧게 축약해서 굉장히 찝찝하단 뜻이었다.
"국물은…… 역시 흠잡을 데 없다 이건가."
심사위원 중 그 누구도 악담 하나 없이 칭찬만 쏟아내니, 저래선 흠이 아니라 더 치켜세울 점을 찾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대단해."
유이치의 입에서 순수한 칭찬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진심으로 찬혁의 요리에 찬사를 보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 요리를 만들어낸 찬혁이란 외국의 요리사를 향한 찬사였다.
사람의 생애 백 년. 그 평생을 쏟아부어 공부해도 조국의 요리조차 진실로 깨우치지 못한 요리사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저 소년은 어떤가. 저토록 어린 나이에 온 세상의 진미란 진미는 접하지 않은 것이 더 적을 세계적인 심사위원단이 단 한 입에 경탄을 터트리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 주체는 현지의 요리사라 한들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의 수준 높은 전통 일식.
쇼와昭和 후기부터 시작한 유이치의 요리인생이 어언 40년.
전통적인 일본의 카이세키 요리도 외국의 문물과 만나 수많은 가지를 뻗친 지금. 저토록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가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그중에서 정말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그런 사람을 찾는 건 자신과 같은 라인이나, 혹은 그보다 더 선배인 요리사 사이에서 찾는 편이 훨씬 빠르단 건 확실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진 않았다."
국물은 완벽하다. 조림이란 요리의 완성도를 가르는 기준에서 8할 이상을 점유하는 것이 국물의 퀄리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찬혁의 요리는 이미 거의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건. '거의 완성된 것'과 '완성된 것'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사실.
1할을 완성하든 9할을 완성하든 미완성은 결국 미완성인 법. 9할의 부족함을 채우는 요리가 있는가 하면, 1할의 부족함을 두 배, 세 배로 늘리는 요리도 있다.
그 어떤 탑이라도 기반을 제대로 다지지 않았다면 종국에는 결국 무너질진저.
유이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안다.
찬혁의 요리는 기반을 다지기에는 너무나도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을.
이제 그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일만 남았다는 걸.
하지만.
"세상에…… 이 야채들! 익은 정도가 완벽해요! 겉은 포슬포슬, 부드럽게 무너지지만, 속에는 약간의 식감이 살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식감의 그라데이션! 씹을수록 새로운 천변만화한 식감! 놀라워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저는 시간이 워낙 부족해서 양념이 속까지 밸 시간이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제 오산이었습니다! 모든 채소가 속까지 양념 국물로 가득해요! 마치 두꺼운 스테이크의 육즙처럼! 채소 모양을 한 고기를 씹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단숨에 이런 요리를!"
무너지지 않는다.
"뭣이……?"
당장에라도 모래 아래 먼지와 함께 가라앉을 처지로만 보이던 드높은 탑은, 여전히 하늘의 태양에 닿아 보이겠다는 듯 꼿꼿이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다.
"닭날개의 익은 정도도 완벽합니다. 쫄깃한 껍질에 부드럽지만 탄력 넘치는 살코기, 거기다 오독오독 씹히는 연골의 조화가 아주 찰떡궁합이에요."
"닭고기 중에서도 날개 부위는 익히는 정도를 조절하기가 아주 어려운 부위입니다. 간이 완전히 배일 때까지 익히면 너무 질겨지고, 어느 수준을 넘어가면 아예 살이 풀어질 정도로 익고 말죠."
"그래서 닭날개를 조리할 때는 고기가 질겨진 다음 살이 풀어지기 직전까지 딱 맞춰 익히는 게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얘기합니다만…… 이건 이상을 뛰어넘었어요. 간은 딱 알맞게 뱄는데, 살에는 치킨 같은 쫄깃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니. 이런 건 태어나 처음 봅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손질, 조미, 처리. 분명 모두 완벽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은, 시간만큼은 이 세상 누가와도 해결할 수 없는 숙제였을 터.
'대체 어떻게……!?'
유이치의 눈동자가 비로소 흔들리기 시작했다.
***
"아니, 저거 진짜 어떻게 한 걸까요?"
"그러게. 분명 한참 시간이 모자랐을 텐데."
유이치가 상대인 찬혁의 예상치 못한 선전에 경악하는 한편, 한국팀의 베이스에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시간을 단축…… 아니. 저 정도면 이미 단축이란 수준이 아니야."
차윤구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린 유동건이 찬혁의 자리를 바라봤다.
거리가 있는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무엇 하나 크게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마술사도 마술을 부리려면 도구가 필요한 법인데, 그럴듯한 도구라곤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니…….
오죽하면 같은 팀인 그들마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아리송한 속마음만 애태우고 있을까.
이런 복잡한 상황 속. 그들 중 유일하게 마술 트릭의 일부나마 깨달은 사람이 한 사람.
"오호라. 그렇게 한 거네요. 재미있는 발상이에요."
"예?"
안영길. 한국팀 팀장인 그만큼은 찬혁이 꽁꽁 숨기고 있던 비밀의 장막을 들추는 데에 성공했다.
안영길의 혼잣말에 뒤로 빠져 있던 이영율이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선생님. 재미있는 발상이라뇨? 뭔가 눈치채신 건가요?"
"그런 것 같네요. 어디까지나 추측일 따름이지만."
"선생님의 추측이면 셜록 홈즈의 추리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참, 그렇게 띄워주는 것 좀 하지 말래도요."
멋쩍게 웃는 이영율을 난처한 얼굴로 바라보는 안영길. 두 사람의 옆으로 끼어든 차윤구가 질문을 이었다.
"혹시 힌트라도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도저히 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저도 마찬가집니다."
"흐음……."
차윤구와 유동건의 질문에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찬혁의 조리대 위를 훅 훑어본 안영길은, 이윽고 팔을 들어 조리대 한편을 가리켰다.
"힌트는…… 그래요. 저게 좋겠네요."
"?"
팀원들의 시선이 안영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안영길이 가리킨 저편. 찬혁의 조리대 위에 자리한 물건.
그것을 발견한 그들이, 이윽고 의아함을 표출했다.
"저건……."
"착즙기?"
그렇다. 그것은 착즙기였다. 그것도 기계식이 아니라, 과거에 쓰이던 펌프 같은 커다란 레버를 직접 눌러서 써야 하는 수동 착즙기가.
착즙기.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무언가의 찌꺼기.
수분을 전부 잃고 빼빼 마른 그 하얀 찌꺼기의 잔해. 그 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거의 모든 사람이 찬혁이 부린 마술의 정체를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단 두 사람.
찬혁의 조리대를 보고 금세 마술의 트릭을 눈치챈 안영길. 그리고…….
"저, 저 문디자슥이 저게 뭐 하는 짓이고?"
달에 며칠 주어지지 않는 휴가까지 써가며 도쿄돔에 내방한 양희연.
그 두 사람만이.
***
"저, 저마 저……!"
입을 떡 벌린 채 숨이 멎도록 굳어 버린 양희연은 쉽게 말을 이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당초 찬혁이 그 이시무라 유이치를 상대로 조림 요리를 주제로 꺼냈을 때조차 이토록 놀라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현재 도쿄돔에 모인 선수를 포함한 약 5만의 관중.
그중에서 저 기법을 눈치챈 이의 숫자는 고작해야 한 손에 꼽을 수준.
그들의 공통점은 자국만 아니라 타국의 요리에도 조예가 깊으며, 과학적 원리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런 그들 중에서도 예외가 있다.
무엇을 숨기랴. 그 예외야말로 바로 이 소녀. 양희연이었다.
그녀는 분명 뛰어난 요리사지만, 안영길과 같은 수준의 요리사가 볼 때에는 아직 미숙한 수준의 요리사.
그런 그녀가 어떻게 찬혁의 마술트릭을 눈치챘는가.
그건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내, 내 요리를 와 지 멋대로 쓰고 지랄인데!?"
해당 트릭을 만든 장본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양희연이었으니까.
조림이란 요리의 조리시간을 최대한 단축시키는 조리기법의 비밀은 생각보다 아주 단순하다.
상식의 틀을 조금 깨부술 필요가 있지만, 한 번 발상에 성공하면 '뭐야. 고작 그거야?'하고 피식 웃을만한 비밀.
일종의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해야 할까. 양희연은 그 비유가 아주 찰떡처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콜럼버스는 '달걀을 세워보시오'라는 말에 달걀을 깨트려서 세웠다고 한다.
비웃는 사람은 많았지만, 확실히 그건 크게 틀린 방법은 아니었다. 달걀을 세워보라 말한 사람이 무조건 멀쩡한 상태로 달걀을 세우라 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다만 여기서 문제인 건 콜럼버스의 기발한 상상력이 아니라 깨진 신세가 된 달걀 쪽.
군중의 상상력을 뛰어넘은 창의력을 발휘한 콜롬버스조차 달걀을 깨지 않으면 달걀을 세울 수 없었다.
물론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받침대를 가져오거나, 왁스로 책상에 고정시키거나.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그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달걀은 세웠지만. 동시에 파괴됐다.
이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조림요리에 드는 소요시간을 크게 단축시킨 건 좋지만, 세상에는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얻은 게 있다면 대가를 치르는 법.
지금 찬혁이 사용한 조리기법은 시간을 얻은 대신, 더욱 커다란 것을 대가로 바쳐야 하는 양날의 검.
그 커다란 것이 이윽고 저 닭날개 적된장 조림의 약점이 되어 찬혁의 목덜미로 들이닥친다.
양희연은 그 사실을 안다. 그리고 찬혁 또한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대체 뭔 생각인데, 니."
양희연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동시에 찬혁 또한 자리로 돌아온다.
찬혁의 심사는 끝났다. 이제는 다가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양희연의 시선이 태평하게 웃는 찬혁에게로 향한다.
여전히 뒤통수를 한 대 후려주고 싶은 웃음이라고 생각하면서.
***
"세상에. 가정식 요리라고 생각한 부리다이콘에서 이런 깊은 맛이 나올 줄이야."
"10kg이 넘어가는 대방어에서도 손바닥만큼 밖에 구할 수 없다는 볼살. 그리고 속을 깨끗하게 씻어낸 장과 심장, 간을 함께 졸인 방어머리 내장 조림…… 최고의 맛이 아닐 수 없군요."
"주로 쓰이는 가쓰오 육수 대신 방어의 뼈와 뱃살로 만든 육수를 쓰고, 거기에 더해 방어가 잡힌 곳 근방의 바다에 지은 염전에서 채취한 최고급 소금으로 만든 양념으로 간을 했죠. 한 번 서로를 떠난 생선과 조미료가 같은 냄비 속에서 다시 결합하다니…… 정말 원숙한 일체감이었습니다."
찬혁의 심사가 끝난 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유이치의 심사 또한 마무리가 지어졌다.
첫 번째 심사와 두 번째 심사 사이에 제법 긴 시간 텀이 있었지만, 도쿄돔의 관중은 지루한 기색도 없이 그 시간을 잠자코 기다리며 관람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위기감.
찬혁의 그 놀라운 평가에 혹시나 자국의 요리사가 패배할까 싶은 위기감에 젖은 관객들이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으니까.
풍선처럼 부푼 5만 관중의 긴장감.
그것이 터질 순간이 바로 코앞까지 찾아왔다.
유이치가 자리로 돌아간 뒤 서로 긴 논의를 나누는 세 명의 심사단.
그들은 과연 어느 쪽을 이 대결의 승자로 지목해야 하는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논의 끝에 간신히 승자를 결정한 세 명의 심사위원이 다시금 자리에 앉는다.
목에 칼이라도 들어온 듯 잔뜩 긴장한 태세로 그들을 바라보는 관중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비로소 그들이 입을 열었다.
"심사를 마친바.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대 한국, 한국 대 일본. 그 첫 번째 대결의 승자는─"
이때, 사람들은 이 적막한 행사장 어딘가에서 거친 북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것이 본인의 심장 소리라는 걸 깨달은 것은, 심사단의 입에서 마침내 결과가 발표된 뒤였다.
"한국팀입니다! 축하합니다, 한국팀! 첫 번째 개인전 승점을 한국팀이 차지합니다!"
심사단석 뒤쪽의 스테이지. 그 위에서 길쭉하게 인쇄된 태극기 현수막이 레드카펫 펼쳐지듯 떨어진다.
정확히 빈 공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크기의 현수막.
그것은 두 팀에게 주어진 최대 세 번의 경기 중 하나가 한국팀의 것이 되었다는 증거였으며, 동시에 힘차게 쿵쿵대던 관중의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순간을 알리는 알람이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주먹을 으스러질 듯 쥐어짠 유이치가 끓는 목소리로 절규를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