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56화 (356/403)

356. 시간의 마술사.-3-

"화식和食이라고……!?"

화식. 단어의 뜻만 보아서는 짐작하기 힘드나 이것은 일본식 요리를 총칭하는 단어 중 하나.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의심하면서도, 유이치의 두 눈은 찬혁이 만드는 요리가 화식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앞서 유이치는 조림 요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가 식감이라고 말한 바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심화 단계의 영역일 뿐. 세간에서 통하는 조림 요리의 기본은 식감이 아니다.

조림 요리의 기본은 양념!

같은 돼지고기를 간장으로 조린 요리라 하더라도 일본식 소유타레醬油垂れ로 졸이면 부타가쿠니豚角煮가, 한국식 간장양념으로 졸이면 돼지고기조림이, 중국식 간장인 노추로 졸이면 동파육이 된다.

물론 그 조리법 사이에는 수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그 차이를 만드는 첫 분기점이 되는 것이 바로 양념의 베이스.

즉, 일본식 된장인 아카미소赤味噌를 양념의 베이스로 쓴다는 건 답안지를 보여주고 문제를 푸는 것과 다른 게 없을 만큼 찬혁의 의중을 확실히 내보이는 것이었다.

가이세키 요리의 대가인 일본팀 팀장, 이시무라 유이치 앞에서 일식 요리를 만들겠다는 의중을!

'진심인가?'

유이치는 제 눈에 보이는 광경이 혹시 찬혁의 기만책이 아닌가 진지하게 의심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선수인들 야구선수와 야구로 겨룰 생각을 하진 않는다. 하물며 개인이 아닌 국가의 위신이 걸린 자리라면 더더욱.

심지어 정보에 이르길 찬혁의 주특기는 프렌치와 이탈리안 등의 유럽 양식.

아무리 요리라는 게 기본적인 바탕이 잘 갖춰져 있다면 뭘 하든 평균 이상으로 해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이기기 위한 승부를 펼치는 곳이며, 이시무라 유이치의 실력 또한 평균 이상이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기에.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많고 많은 조림 요리 중 일식을 고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짓이다.

하지만…….

"……."

자국의 나이를 기준으로 며칠 전에야 간신히 성인이 된 아이.

그런 아이가 만국의 강자를 정면으로 쳐부수고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이미 저건 상식의 틀 안에서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치로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도동동 동동동!

세리머니라도 하듯 경쾌한 리듬을 타며 '으깨기'를 멈춘 찬혁의 여유로운 웃음이 그의 망막에 잔상처럼 새겨졌다.

***

조림 요리는 각 나라마다 크게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이 얼마든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반드시 공유하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그건 바로 시간.

식재료를 졸이며 본래 갖고 있던 식감이 부드럽게 변하고, 국물의 양념이 식재료 깊숙이 침투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공통점.

주재료가 육류든 생선이든 채소든 할 거 없이 식재료가 모종의 화학적 변형이 일어날 때까지 익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단 것이다.

'그래서 조림 요리가 보기에 지루하단 소리를 듣는 거지.'

아무리 남이 라면 끓이는 게 맛있어 보여도 두 시간 동안 물 끓는 것만 보고 있다간 지루해 미칠지도 모른다.

'그것도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시간이 다르긴 하겠지만…….'

예를 들어 익을 때 수축 현상을 일으켜 한 차례 질겨진 뒤에야 부드러워지는 과정으로 들어가는 덩어리 고기 계열의 조림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몇 시간 단위로 익혀야 한다.

생선류는 그나마 상황이 괜찮다. 하지만 이것도 생선의 종류가 너무 많은지라 어떤 생선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은 게 흠이지.

야채는 익히기 시작하면 점점 부드러워질 뿐이기에 조리과정 자체는 단순하지만, 문제는 식물성 세포 특유의 세포벽을 가진 채소는 심부까지 익는 과정의 진행속도가 너무 느려서 겉과 속을 비슷한 식감으로 익히는 게 아주 힘들다.

이래저래 말은 많았다만, 결국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일장일단이 있다는 뜻.

보통 이렇게 특별히 빼어난 무언가가 없을 때 우리 요리사들은 본인의 기호에 맞춰 재료를 선택하곤 한다.

당연한 일이다. 요리사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나은 요리를 고객에게 대접하길 원하고, 가장 나은 요리를 선택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로 조림 요리를 만들 때 가장 선호하는 재료가 있다.

'고기지, 고기.'

그것도 굵은 뼈가 튼실하게 붙은 고기. 흔히 생각하는 소갈비나 돼지다리 같은 거 말이다.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고기를 좋아하는데, 고기 조림을 만들 때엔 뼈가 붙은 걸로 만들어야 정말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 있어서 그럴 뿐.

'뭐, 그걸 이번에 못 쓴 건 조금 아쉽게 됐지만.'

왜냐고? 아니, 그야 그럴 수밖에. 뼈가 붙은 고기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맛이다.

아기 주먹만큼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씹자마자 혀와 함께 녹아내리는 것 같은 부드러움. 그리고 그 심지에 남는 쫄깃함. 뼈에서 우러나온 감칠맛과 고기의 결 사이사이에 녹아든 달콤짭잘한 양념.

그러나 그런 고기조림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건 바로…….

'무지막지하게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 이게.'

그 정도 고기조림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드는지 아는가? 한 시간? 두 시간? 어림도 없지. 적어도 20시간은 필요하다. 말 그대로 맛과 시간이 완벽한 비례 관계에 있다 그거다.

무슨 개인전을 내일까지 치를 것도 아니고, 시간제한이 딸린 시합에서 그런 걸 어느 세월에 만들고 있을까.

그래서 내가 선택한 재료가 바로 이것.

'치킨 윙은 이럴 때 딱 좋지.'

뼈가 붙은 고기의 장점을 얼추 가졌으면서도 단점을 최소화한 형태.

충분히 쫄깃한 살코기와 껍질에 있는 지방질에서 나오는 콜라겐 성분의 젤라틴. 연골과 뼈에서 우러나오는 맛도 충분한 조림요리계의 올라운더.

'하지만…….'

결국 윙은 뼈가 붙은 고기의 하위호환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인 살코기의 양적 차이 때문에 고기 본연의 맛은 소나 돼지에 비해 모자라고, 뼈가 가느다랗기 때문에 뼈에서 우러나오는 맛도 그리 대단치 않다.

그만큼 양념이 배기 쉬워서 비교적 빠르게 요리가 완성된다는 점만큼은 장점이지만 그런 장점 하나를 얻기 위해 희생한 것이 너무 많다.

'저쪽이 준비하는 건 방어무조림…… 은 당연히 아니겠지.'

일본에선 부리다이콘이라 불리는 방어무조림은 일본의 대표적인 가정식 중 하나다.

맛이 없는 요리는 아니지만, 시합의 일품요리로 내놓기에는 어딘가 심심한 요리인 것도 사실.

실력 있는 요리사라면 당연히 뭔가 다른 물건을 내놓을 것이고, 하물며 이시무라 유이치 셰프 정도의 실력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거에 이기려면 평범한 닭날개 조림으로는 부족해.'

그래서 만드는 거다. 평범하지 않은 닭날개 조림을.

먼저 준비할 건 두꺼운 도마다. 딱딱하고, 쉽게 움직이지 않고, 칼을 내리쳐도 파이지 않는.

그다음에는 미리 뼈와 살을 얼추 발라낸 닭고기.

고기와 뼈를 적당한 사이즈로 토막을 내준 뒤, 반쯤 손도끼처럼 보이는 두꺼운 몽둥이 칼을 들어, 날과 칼등이 반대되게 잡는다.

이후엔 단순하게, 두드린다!

─쿵! 쿵! 쿵! 쿵!

처음에는 뼈와 살이 적당히 섞여서 으깨질 수 있게 힘차게!

칼등으로 도마를 부술 기세로 내리찍지 않으면 뼈가 확실하게 으깨지지 않는다. 이 힘을 버티기 위해 두껍고 튼튼한 도마가 필요했던 것이다.

'적당히 부서져서 섞였으면……!'

이번에는 좀 더 가볍고 빠르게, 그러나 힘이 빠진 만큼 칼의 동작 반경을 넓힌다.

양손에 들린 두 자루의 칼을 각각 교대로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려 내리치고 있자니 절로 흥이 올라 입에서 기묘한 기합이 흘러나온다.

"슉, 슈슉, 슉, 슈넬 통닭! 슉, 슈슉! 슉, 슉, 슈슉, 슈, 슈, 슈넬 통닭! 슉, 슈슉! 슉! 슉!"

아아, 들리십니까. 전국 50만 육해공 장병 여러분. 여러분을 위한 헌정곡입니다.

물론 슈넬 통닭은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이렇게 만들어진다 생각하면 당신은 완전히 오해하고 계신 겁니다.

……뭐, 아무튼.

이것도 개인전이라 혼자 조리대를 써서 할 수 있는 쇼맨십이다. 주변에 팀원이 있었다면 위험해서 이런 짓도 못 했겠지.

아니, 그보다 이렇게 난리를 칠 바에 그냥 블렌더나 믹서기를 쓰는 것이?

……지금 와서 깨닫기엔 너무 늦었나. 그래도 이것도 다 필요해서 하는 일이니까.

닭날개 조림에 고기 본연의 맛과 뼈에서 우러나온 맛이 부족하다면, 외부에서 그 맛을 끌어오면 되는 이야기다.

그래. 이 고기반죽은 이 자체가 요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요리의 맛을 추가하기 위한 부산물.

산산조각이 나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으깨진 뼈와 살은 아주 살짝만 끓여줘도 닭고기 깊게 숨어 있던 맛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렇게 다지기 전에 한 차례 삶아서 불순물을 제거했기 때문에 잡내가 섞일 걱정도 크게 줄일 수 있고.

완성한 고기반죽을 미리 만든 채소육수와 적당한 비율로 섞어, 일종의 고기죽 같은 비주얼을 한 베이스 육수를 만든다.

'그리고 여기다가 마찬가지로 한 번 데쳐서 불순물을 제거한 윙을 넣어주고…….'

마무리로 한 번 데쳐서 살짝 익힌 감자와 당근 등의 가니쉬용 부재료와 양념을 넣고 졸이면 끝.

적된장을 베이스로 간장과 후추, 소량의 마늘, 생강 등의 조미료를 섞어 만든 양념이 기분 좋은 구수한 향을 풍기며 보글보글 끓는다.

보리로 만들어진 적된장의 특징은 여타 된장에 비해 강한 단맛과 구수한 향. 그리고 특유의 적갈색이 감도는 색채.

그 특징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이 향기로 알 수 있다.

"……좋아."

이 상태로 졸이기만 하면 끝.

그걸로 내 요리는 완성된다.

'그런데 말이지.'

당연한 소리지만 내 서프라이즈 쇼는 고작 쌍칼난타가 전부가 아니다.

관객도, 그리고 유이치 셰프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지금 만드는 요리가 하나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요리라는 것을.

냄비에서 솟는 증기 사이로 내 표정이 감춰진다.

이번 대결의 끝이 가깝다.

***

'앞으로……. 대략 15분 정도 더 졸이면 되겠어.'

찬혁의 조림이 냄비 속에서 끓기 시작한 뒤로 약 10분.

그때부터 찬혁과 유이치는 미묘한 신경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앞서 몇 차례 설명했다시피 조림이란 요리는 한 번 냄비에서 끓기 시작하면 요리사가 할 일이 없어지는 탓에 벌어진 일이다.

가끔 냄비를 확인하며 재료가 골고루 익도록 살짝 저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없이 가만히 서서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

다른 요리였다면 이렇게 시간이 드는 작업이 진행 중일 때 소스를 만들든 곁들일 가니쉬를 만들든 했겠으나, 조림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소스나 가니쉬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오히려 맛을 보는 데에 방해가 되는 탓에 그마저도 만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대치가 이어진 지가 어언 10분인데, 아직까지 15분을 추가로 이러고 있어야 한다니.

유이치는 조림이 이런 공개 시합 형식의 요리대결에는 어울리지 않는 주제임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내가 15분 정도 남았으니 저쪽은 아마 20분 정도 남았나?'

닭날개 조림은 일식에서도 꽤 자주 만드는 요리 중 하나이기에 유이치도 당연히 조리법을 안다.

1kg 내외의 닭의 날개를 한 차례 데치고 졸였을 때 가장 맛이 좋게 나오는 타이밍은 대략 30분 전후.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면 10초 단위로 최적의 조리 시간을 알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심사는 내가 먼저 받아서 다행이군. 만드는 걸 보아 간이 제법 강해. 담백한 내 요리가 뒷 순서로 가면 조금은 영향이 있었겠지.'

유이치의 방어무조림.

아니, 더 정확히는 '방어머리와 내장조림'이라 부르는 편이 더 옳을 이 요리는 유이치 또한 아주 가끔 가게를 찾는 VVIP를 위한 고급 요리 중 하나.

담백한 양념과 풍부한 기름기를 듬뿍 머금은 방어의 쫄깃한 머릿고기와 내장조림은 말 그대로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었다.

이미 검증이 확실한 최고의 요리.

거기다 오늘의 컨디션을 생각하면 곧 완성될 이 요리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일품이 되겠지.

후에 심사를 받는다 한들 커다란 문제는 없겠지만, 모처럼 나온 완벽한 일품의 심사를 약간이라도 방해 받는 일은 원치 않던 그에게 당장의 상황은 기꺼이 바라는 바였다.

"……좋아, 슬슬 됐네."

"음?"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여태껏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냄비를 노려보고 있던 찬혁이, 갑자기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뜨겁게 온도를 맞춘 접시를 준비하고, 심사위원을 위한 식기를 세팅하고.

그리고 끝으로, 여태껏 끓고 있던 냄비의 불을 껐다.

"자, 잠깐만."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유이치가 아니다.

그러나 유이치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갑작스럽게 그의 상식을 부수려 드는 행동이었기에.

보통 때였다면 냉정하게 멍청한 짓이라고 냉소라도 지었겠으나, 문제는 저런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는 게 찬혁이었다는 점이다.

상식을 부수고 예상치 못한 짓을 할 때마다, 매번 놀라운 요리를 선보이는 것이 바로 저 상상력 풍부한 젊은이였으니까.

잠시 후,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찬혁의 움직임이 잦아들고. 갑작스런 소란에 덩달아 소란스러워진 행사장의 중심에서 찬혁이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외친다.

"완성했습니다!"

냄비가 끓기 시작한 뒤로 약 10분.

이시무라 유이치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상황이 도래했다.

완성까지 남은 예상 추정시간 20분의 벽을 깨고, 마법사는 자신의 시곗바늘을 제멋대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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