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55화 (355/403)

355. 시간의 마술사.-2-

찬혁은 고민할 새도 없이 지목을 받아들였다. 유이치는 그가 그렇게 나오리란 걸 얼추 예상하고 있었다.

사람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도전을 굳이 피하지 않는 성격이란 건 이때까지 본 모습으로 잘 알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자기가 먼저 도전을 거는 성격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이런 주제를 선택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이 상황만큼은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니코미にこみ?"

유이치는 잠시 심판의 통역이 잘못 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예. 맞아요."

"……일본어를 할 줄 압니까?"

"친구한테 좀 배워서요."

그러나, 의심이 담긴 그의 혼잣말에 답한 찬혁의 말을 들은 순간 그것이 심판의 실수가 아님을 깨달았다.

조림 요리. 정말 그는 그것으로 승부를 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유이치가 방송에서 몇 번이나 언급한 특기가 바로 조림 요리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것임에도, 찬혁은 스스로 그 주제를 골랐다.

"……."

유이치로서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전개였지만, 동시에 이빨 사이에 무언가 낀 것 같은 찝찝함 또한 느끼고 있었다.

어리석은 이가 구덩이에 빠지는 건 발밑이 어두운 탓이지만, 현명한 이가 구덩이 위에 발을 올릴 때는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과연 류찬혁이란 인물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유이치는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좋은 시합을 치르도록 합시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찬혁과 악수한 손끝에서 느껴지는 투박한 감각. 마치 마감을 덜 끝낸 거친 나무토막 같은 느낌만이 유이치에게 생생한 경고가 되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합이 막을 올린다.

***

조림이라는 요리는 그 실상을 따져보자면 아주 간단하고 심플하다.

주재료를 포함한 부재료를 양념한 국물에 오랜 시간 끓인다.

그것이 졸인다는 조리법이며, 동시에 그렇게 만드는 요리에 조림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요리 과정 자체를 크게 세 단계 정도로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조림이란 것은 대체적으로 간단한 요리이기 때문에 전 세계의 가정식에도 비슷한 요리과정을 가진 요리가 수없이 많다.

갈비찜, 생선조림, 야채조림, 힘줄조림 등등.

'하지만 전문가 수준의 조림이란 건 보기보다 간단한 게 아니지.'

자타가 인정하는 조림 요리의 고수인 유이치가 생각하는 조림 요리의 포인트는 간도, 모양도 아닌 식감.

조림에 들어가는 원재료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그저 흐물흐물 물렁물렁하게만 만드는 건 조림이라는 요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초보나 저지르는 실수이자 식재료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어떤 특정한 재료가 수십 그램의 덩어리로 나뉘어 있을 때 그것을 얼마나 익혀야 가장 알맞은 식감이 되는지.

가장 알맞은 식감이 되었을 때 재료 속에는 국물의 양념이 얼마나 배었을지.

그때 재료가 알맞은 간이 되기 위해서 국물에는 어떤 조미료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국물을 끓임으로써 소실되는 수증기의 양까지 계산하여 그날의 습도, 온도, 제철 식재료, 손님의 상태까지 파악하고 만드는 유이치의 조림.

그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이룩하는 데에는 그야말로 탈인간적인 노력과 직감, 그리고 식재료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

유이치 자신조차 '완벽한 조림'을 만든 적은 많지 않다고 평가할 정도로 최고의 음식을 만드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유이치는 요리를 만들어 나가는 손이 조금의 부담도 느끼지 않고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은 느낌이 좋은데."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감각.

마치 정밀한 측정기처럼 맛을 파악하는 혀의 예리한 미각.

평소 안경을 쓰던 눈도 지금은 당장 안경을 벗어 던져도 괜찮을 듯 시야가 선명하다.

뒤에서 자신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수만의 응원단. 그리고 전국의 시청자가 보내는 기대에 의한 부담.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각오. 찬혁이란 강적의 존재.

그 모든 게 이시무라 유이치라는 인간의 생애에 다신 찾아오지 않을 최고의 집중력을 선사했다.

요리든 스포츠든, 무엇이든 사람이 한 굴만 평생을 파헤치다 보면 가끔 그런 느낌이 드는 날이 있다.

'오늘은 된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자신에겐 오늘이 바로 그날임을, 유이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느껴진다!'

자신이 손에 잡은 대방어의 비늘 아래 모습이 마치 X-ray로 투시하듯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비늘 아래 작은 흠집 하나 없는 껍질.

추운 겨울을 맞아 먹이를 잔뜩 먹어 껍질 아래로 두툼하게 쌓인 지방층.

그 커다란 무게로 헤엄치기 위한 격한 운동과 차가운 해수에 의한 냉각을 반복하여 탄탄하게 다져진 살.

잘못 칼로 내리쳤다간 오히려 칼날이 상할 것처럼 단단한 뼈까지.

신선함을 증명하는 듯 물에 적신 유리구슬처럼 영롱한 빛을 반짝이는 탱글탱글한 눈알을 반짝이는 제철 방어.

한화로 따지면 수십만 원을 호가할 생선을 유이치의 손에 들린 칼날이 헤집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일반인은 물론이요, 같은 요리사들마저 감탄을 숨기지 않을 수 없는 신속.

뼈의 굵기와 살의 배치 탓에 생선 중에서도 제법 해체가 까다로운 방어를 단숨에 해체하는 솜씨에 관중석이 환호성을 내뱉는다.

"우와아아!"

"저 커다란 대방어를 고작 1분 만에 해체했다고!?"

"역시 이시무라 대장이야!"

3만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함성조차 지축을 울리는 음파로 바꾼다. 오죽하면 스테이지에서 그 함성을 듣던 대기선수들이 과도한 음량에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

그러나 그런 소음에도 유이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필요한 소리를 제외한 소음은 아무리 커도 무시해내는 집중력. 지금의 그는 귓가에서 갑자기 폭죽을 터트리더라도 놀라지 않으리라.

방어 해체를 끝마친 유이치는 커다란 솥으로 미리 끓여두었던 방어의 지느러미와 다시마, 볶은 건새우 등을 넣은 육수에 둥글게 깎은 무와 방어의 머리, 두툼하게 잘라낸 뱃살, 그리고 각종 조미료를 넣고 적당한 세기의 불로 뭉근히 끓이기 시작한다.

"후우……."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는 듯, 유이치는 그제야 작은 소리와 함께 긴 숨결을 내뱉었다.

'완벽해.'

그 말 외에는 더 이상의 표현이 어려울 정도였다.

평소 같았다면 자화자찬하는 것이 부끄러워서라도 털어냈을 생각이건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사실이 그러했기에.

고작 재료를 완벽하게 해체했다거나, 그런 수준의 완벽함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방금 국물에 넣은 양념.

다른 때에는 시작할 때는 조금 밍밍한 맛이 날 정도로 양념을 넣고,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간을 보며 양념을 추가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졸아드는 물의 양과 양념의 밸런스가 깨져 버릴 테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양념을 전부 때려 넣은 것이다. 그리고 이 요리가 완성될 때까지 그 어떤 재료도 추가하지 않겠지.

이 요리는 이미 이 상태로 완성된 것이다. 여기에 더 필요한 거라곤 오로지 시간뿐.

계산의 영역을 넘어선, 어찌 보면 미래를 예지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성된 요리를 향한 유이치의 예감은 그만큼이나 확고했다.

"흠."

자신의 상황이 일단락되자 유이치에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돌아왔다.

조림 요리는 하는 본인이야 어떨지 몰라도 타인이 구경하기에는 그다지 좋은 요리가 아니다.

슬로우 푸드의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스테이크처럼 기름이 팡팡 터지며 실시간으로 고기의 색이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튀김처럼 보글거리는 기포가 단숨에 올라오지도 않는다.

냄비에 들어갔다면 완성되기 직전까지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요리. 그게 바로 조림이기 때문에.

때문에 요리강습을 하더라도 조림 요리는 크게 인기가 없는 항목 중 하나다.

그러나 유이치는 조림 요리의 그런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마치 게임에서 곧잘 나오는 땅속 깊숙이 숨겨진 보물상자 같지 않은가?

"크흠."

유이치는 저도 모르게 배어 나오던 웃음을 헛기침으로 다급하게 숨겼다.

아무리 요리가 훌륭하게 완성되리란 보장이 있다고 해도 수십, 수백만의 자국민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너무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으리란 걸 알았기에.

한 차례 숨을 돌린 그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조리대를 바라봤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요리에 크게 집중하느라 상대가 어떤 요리를 준비하는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단언컨대 이번 요리는 유이치 본인에게도 이례적인 속도로 진행됐다.

지금부터 상대를 살펴도 결코 늦지는 않을 터.

유이치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이미 냄비에 넣고 졸이는 과정을 시작한 유이치와는 달리, 찬혁은 아직도 재료 손질이 한창이었으니까.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린 것 같은데.'

평소라고 해도 그가 아는 찬혁은 영상에서 보거나 멀찍이서 보았던 무대 위의 찬혁뿐이었지만, 그것만 봐도 충분히 무서운 상대임을 짐작할 만큼 찬혁은 특히나 손놀림이 빠른 요리사였다.

인도팀과의 마지막 시합 때 보여줬던 3종의 아이스크림을 동시에 만드는 기술은 지금 다시 보아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지금은…….'

약간이긴 하지만 분명 느린 것이 보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다른 때보다 진행이 늦다.

'……아니, 하긴 이래서는 그럴 수밖에 없나.'

유이치는 찬혁에게서 시선을 돌려 사방을 훑었다.

수만이란 숫자는 보는 입장에서도 절로 압박감이 생기는 숫자.

심지어 그 수만이 보내는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을 경우에는, 과연 어떤 압박감이 생길지.

조금 전의 유이치처럼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가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집중하고 있다면 모를까, 이미 다 큰 어른조차 오금이 저리는 시선의 화살에 쏘인 어린 소년의 심중은 어렵잖게 예상할 수 있었다.

"흠."

이런 식으로 이기고 싶지는 않았다.

마치 다 이긴 것처럼 구는 오만한 발언이지만, 당장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자신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긴 했다.

닭고기 조림을 할 생각인지 닭을 해체하는 찬혁.

날개를 분리하고, 살과 뼈를 나눈다.

'닭고기 조림을 할 생각이라면 살은 뼈와 붙여두는 것이 나을 텐데.'

조림이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인 만큼 뼈에서 우러나오는 맛이 살에 배이기 쉽다.

저런 단순한 선택에서도 실수가 튀어나올 정도로 긴장했다는 것일까. 유이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 됐다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진검승부다. 나도 절대 질 수 없는 이유가 있어.'

찬혁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유이치의 눈에는 이미 승부의 결과가 보였다.

유이치가 그렇게 생각한 그때였다.

─쾅!

"!?"

마치 누가 바닥을 몽둥이로 내려찍는 것 같은 엄청난 굉음.

갑작스런 소리에 어깨를 흠칫 떨며 놀란 유이치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시선을 향한 그곳에는, 다름 아닌 찬혁이 있었다.

척 보아도 1kg 정도는 나갈 것처럼 두터운 몽둥이 칼.

그런 엄청난 물건을 두 손에 하나씩 나눠 잡고서.

대체 저것이 무엇인가 유이치가 놀라는 찰나, 찬혁은 두 손에 들린 칼로 도마를 난타한다.

분쇄, 분쇄, 분쇄!

그러나 내리치는 건 칼날이 아니다. 그 반대. 내리치는 것은 칼등!

그렇기에 그토록 엄청난 굉음이 사방을 울린 것이다.

도마 위에는 방금 찬혁이 손질한 닭의 고기와 뼈가 있다.

아니.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그것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뼈와 고기가 뭉개져서 섞인 반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을 치다가 내던진 흙반죽처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고기와 뼈가 섞인 덩어리가 된 닭.

그것만으로도 유이치가 놀라기엔 충분했으나, 뒤이어 찬혁이 꺼낸 재료를 보았을 때 유이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삿대질을 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저, 저……!"

찬혁이 꺼낸 것은 하나의 조미료가 든 병.

그러나 그 조미료에 쓰인 글자는, 유이치로선 못 알아볼 리가 없는 것이었다.

"적된장……?"

왜냐하면 그 글자는, 일본어로 쓰인 이름을 가진 일본의 조미료였기에.

그때야 유이치는 눈치챘다.

찬혁이 지금 만들고 있는 조림 요리. 그것이 다름 아닌 일식이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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