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 시간의 마술사.-1-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대망의 세 번째 시합.
남은 팀은 총 8팀. 여기까지 도달한 것만으로도 이전 시즌의 시드권 보유팀과 동등한 능력을 보유했음을 증명하는 자리.
남은 8팀 중 시드권 보유팀은 한국, 이탈리아, 중국, 터키. 총 네 팀.
비보유팀은 미국과 러시아, 일본, 멕시코. 이 또한 네 팀.
어찌 된 우연인지. 8강에 이르러 정확히 파이를 반씩 가른 시드권 보유팀과 비보유팀은 마치 대항전이라도 하는 것 마냥 대진표를 양분하고 있었다.
그저 우연이라고 믿기에는 석연찮을 정도로 균일하게 갈라진 대진표.
그 대진표를 바라보는 찬혁의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이렇게 됐단 말이지.'
1시합. 한국 대 일본.
2시합. 터키 대 멕시코.
3시합. 이탈리아 대 러시아.
4시합. 중국 대 미국.
'평소 같았으면 이걸로도 꽤 말이 많았을 것 같긴 한데…….'
개인실에 비치된 컴퓨터를 통해 대진표를 살피던 찬혁이 마우스를 놀려 다른 화면을 띄웠다.
화면에 비치는 것은 시합이 재개하기에 앞서 중국팀이 공개한 성명문 발표 영상이었다.
중국팀의 감독이라고 자신을 밝힌 량웨이라는 남자가 단상에 서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성명문을 읽는다.
영어는 물론이요 이런저런 나라의 시청자를 위한 자막이 함께였기에 보는 데에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만약 자막이 없었다 해도 찬혁이 이해하는 데에 크게 문제는 없었을 테지만, 굳이 난해한 문장을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선 찬혁 또한 만족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쓰일 집중력을 다른 데에 쓸 수 있었으니까.
─당국의 조사 결과, 앞서 알려진 루머는 어느 특정 국가의 사용자가 다중 IP를 사용해 퍼트린 악의적 중상모략임을 확인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 명예와 신의를 걸고 말씀드리건대, 당국에서는 결코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없으며 이 루머를 퍼트린 사용자를 반드시 추적하여…….
"하이고 무서워라."
몇 번이나 돌려본 영상이지만 이 부분이 나올 때마다 찬혁은 빈정대는 입을 막을 수 없었다.
'악의적 중상모략. 그래 뭐, 반 정돈 맞는 말이지.'
사실은 절반 이상이긴 했지만 이제 와 진실과 거짓의 비율을 따지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찬혁은 믿었다. 적어도 본인은 그러했다. 어느 의미로는 경이로운 뻔뻔함이었다. 먼저 안면몰수하고 나선 건 그들이 먼저긴 했지만.
'그나저나 일단 반박은 철저하네.'
연막용으로 뿌린 루머에 대한 기자단의 질문을 조리 있게 답하며 좁혀오는 의심의 그물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량웨이의 모습에 찬혁은 혀를 내둘렀다.
'주제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루머만큼은 우연의 일치라거나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으나 그나마도 시간부족을 이유로 추가 질문이 들어올 새도 없이 회견장을 빠져나가는 량웨이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암전한다.
"처음부터 제일 확실한 거 하나만 뿌렸어야 했나?"
짧은 생각 후, 찬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랬었다면 이토록 커다란 논란으로 발전하지도 않았으리란 걸 알았으므로.
'중국의 사건 은폐능력은 빈말로도 무시할 수 없지. 그 나라만큼 거기에 경력이 많은 나라가 얼마나 되겠어.'
수상할 정도로 사건 은폐에 진심인 나라.
그다지 좋은 칭호는 못되겠다고 찬혁은 헛바람을 뱉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소정의 목적 정도는 달성한 것 같네.'
찬혁은 저런 성명문 발표 한 번으로 모든 의심이 해소되진 않으리라 생각했고, 그건 곧 사실이었다.
본래 의심의 씨앗을 심는 데에는 한마디 말이면 충분하지만, 무고를 입증하는 데에는 수백 배의 증거가 필요한 법인데, 중국팀의 발표는 그마저도 부족했으니까.
의심으로서 만인을 그들의 감시자로 만들겠단 찬혁의 발상은 아직까지 유효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당장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결과라며 찬혁은 웃었다. 애당초 실토하게 만들겠단 기대는 처음부터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기에 나오는 여유.
그 여유를 찬혁은 조금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사용할 셈이었다.
"이젠 우리 일에 집중할 차롄가."
자신을 위한 노력에 더해,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방향으로 말이다.
일본과의 시합이 코앞으로 다가온 때였다.
***
일본의 행사장은 도쿄 외곽에 위치한 카츠라기 여관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걸리는 도심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래. 아마 말만 들으면 다들 아는 그곳.
도쿄돔이라고 불리는 도쿄 행사장의 메카에서 말이다.
수용인원만 5만 명을 넘는 행사장. 행사장의 규모 자체로는 플로리다의 행사장보다 살짝 더 넓은 수준이었지만,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관객석의 빈자리의 유무겠지.
"야…… 사람 엄청 많네. 미국 때보다 더 많은 거 아니야?"
"그러게요. 솔직히 제 눈에도 더 많아 보여요."
새해가 되고 처음 맞이하는 거대 이벤트인 탓일까. 행사를 위해 모습을 일변한 도쿄돔의 관중석에는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사람들이 그득그득 들끓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하나의 군집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하! 보아라! 인간이 쓰레기 같구나!
…… 일본이라서 칠 수 있는 드립이었다. 그 만화 재밌게 봤거든.
뭐 아무튼. 요리사가 아무리 다른 사람 시선에 노출될 일이 적어 주목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지는 직종이라 할지라도, 같은 짓을 서너 번쯤 하다 보면 얼추 면역력이 생기는 법이다.
다만…….
'그것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좀…….'
오늘 도쿄돔을 채운 일본 본토의 일본인의 비율은 적게 헤아려도 6~7할 이상이겠지.
그 말은 즉 이 자리에 모인 5만 명의 사람 중 7할에 달하는 인수가 우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약 3만에서 4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보내는 거무스름한 감정이 담긴 눈빛. 시선이란 것은 일정한 수를 넘어 하나로 집결될 때엔 물리력에 가까운 힘마저 가지게 될 때가 있다.
비과학적이라고?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데 뭐 어쩌겠어.
솔직히 이런 거에 익숙해질 수 있으면, 그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죽도록 둔감하거나, 낯짝에 티타늄 합금을 두른 철가면이거나.
그리고 그런 우리들과 정확히 반대되는 팀이 하나.
"우와아아아아아!"
"어이! 믿고 있다고!"
"너희가 최고다! 가라! 가서 콧대를 눌러주고 와!"
'요란도 하시구만.'
우리들의 반대편. 그야말로 함성의 폭포를 온몸으로 받으며 우리 앞에 서는 그들.
이번 시합의 상대인 일본팀의 등장이었다.
"우리도 한국에 있을 때는 저랬던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죠."
차라리 프랑스랑 그때 붙어서 다행이다 싶다. 그런 강팀과 붙어서 홈팀 어드밴티지를 제대로 챙겼으니까.
'이번에는 반대지만.'
일본팀의 정확한 실력은 아직 미지수지만 스페인을 이기고 8강까지 올라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제 실력을 증명한 것이나 마찬가지.
강적이 확실한 상대가 하필 홈팀이라니.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우연치고는 과하게 운이 없다.
'웃긴 건 중국 쪽 부정행위랑 다르게 이쪽은 정말 순수한 운빨이었단 말이지.'
이쯤 되면 회귀의 대가로 내 여분의 행운 같은 걸 모조리 털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하며 앞으로 걸어 나오는 상대의 발에 맞춰 우리도 앞으로 나선다.
어깨에 비슷한 무게를 짊어진 상대.
저쪽이나 우리나 여기서 이겨야만 한다는 건 마찬가지이기에, 결연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한다.
자. 과연 오늘 승리의 여신은 누구에게 미소를 지을 것인가.
심판의 손가락을 떠난 코인이 핑그르르 돌아, 이내 심판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
"앞면입니다. 따라서 개인전 대표 선택권은 일본팀에게, 주제 선택권은 한국팀에게 주어지겠습니다."
대표 선택권. 그 단어에 일본팀의 팀장인 이시무라 유이치는 한치의 주저도 없이 입을 열었다.
"저희 일본팀은 대표로 제가 출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대 팀에서는 류찬혁 선수를 지목하도록 하죠."
한 팀의 팀장이 망설임 없이 상대 팀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 일본 기준으로는 성인조차 되지 못한 청소년을 자신의 상대로 지목하는 모습.
아마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지탄을 피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유이치는 자신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작 팀장과 청소년. 그런 단어로 치부하기엔 두 팀과, 저 어린 소년에게 쌓인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알기에.
'이게 옳다.'
유이치는 찬혁을 얕보아서 그를 지목한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그는 한국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를 꼽으라면 찬혁을 택할 것이다.
공개된 예선전부터 시작하여 두 번의 시합 동안 보여준 모습. 이미 나이 따위로 구분할 수 있는 수준은 한참 지났다.
'아마 천재가 있다면 저런 거겠지.'
그럼에도 유이치가 찬혁을 선택한 이유.
그건 바로 일본 대중의 인식에 깊게 박힌 '어린 천재'를 향한 패배감.
이전 시즌 때 지금과 아주 비슷한 구도에서, 안효민이란 어린 천재를 시작으로 한국팀에게 패배한 그날의 오점.
스포츠 같은 분야에서 나이 먹은 베테랑이 젊은 선수에게 패배하는 장면은 그리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나이가 먹을수록 하락하는 신체능력은 패배의 변명거리가 되어준다.
하지만 요리는 아니다. 요리만큼은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보다 많은 교육, 보다 많은 경험을 쌓은 이가 당연히 더욱 뛰어난 실력을 가진다.
그럼에도 맞이한 패배. 아마 그 역사는 수십 년도 넘게 하나의 기록으로서 회자되겠지.
그렇게 심어진 패배감이란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걸 해낼 수 있는 기회가 왔음을 유이치는 직감했다.
비슷한 구도, 비슷한 상대.
당시의 그녀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지만, 고작해야 두 살. 커다란 변동요인은 아니다.
'이 대결에서 이긴다면…….'
일본의 요리역사에 오점은 남겠지만, 패배의 굴욕까지 이어지진 않으리.
하지만 혹시, 정말 만약에 이번에까지 진다면.
그때는 명치를 파고든 칼날이 심장을 찌르는 날이 될 것임을 알기에. 유이치는 온 힘을 다해 시합에 임할 것을 각오했다.
'어떻게든 이겨주겠다.'
그런 그의 각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이치에게 지목을 받은 찬혁은 담담한 얼굴로 심판의 질문에 답했다.
"류찬혁 선수. 승낙하시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받았다. 굴욕을 뿌리치기 위한 도전을, 그보다 세 배는 더 나이를 먹은 늙은 고수의 도전을 마찬가지로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였다.
'자, 어떤 주제를 선택할 거냐.'
어떤 주제가 나오든, 설령 자신에게 크게 불리한 주제더라도 이겨야만 한다.
그러나 잠시 후, 찬혁의 입에서 나온 낱말은 그런 유이치의 각오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조림 요리로 합시다."
"…… 조림 요리?"
진심인가?
유이치는 그렇게 속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조림 요리는, 이미 인터뷰에서도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했던 그의 특기였으니까.
일이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음을 깨달은 유이치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