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도쿄 리유니온.-4-
일본에 도착하여 처음 맞이하는 밤. 한껏 높아진 겨울 하늘 가운데에 걸린 보름달이 휘영청 영롱한 빛을 뿌리는 가운데.
여관의 극진한 대접과 훌륭한 설비에 추운 날씨가 무색하게도 녹은 버터처럼 노곤노곤 풀어진 한국팀 일행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각자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한발 앞서 침실로 들어가 잠을 청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조금 더 겨울의 풍경을 즐기고 싶어 하는 이도 있었다.
안영길과 유동건은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거실의 창가. 룸서비스로 주문한 몇 가지의 마른안주와 국적을 불문하고 모인 다양한 종류의 술병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
살짝 열어놓은 창문에서 새어 들어온 온천향 섞인 찬바람이 겨울의 주도酒道에 푹 빠진 남자들의 취기를 억누른다.
"크흐. 역시 와일드터키는 오랜만에 먹으니 톡 쏘는 맛이 있네요. 선생님은 좀 입에 맞으십니까?"
"으음…… 그러네요. 저는 전통 소주나 곡주 계열을 주로 즐기는지라 이런 서양 술은 조금 생소하지만…… 예. 아주 맛있어요. 진한 바닐라와 카라멜, 과일 향에 더해서 복합적인 곡물의 냄새…… 이런 부분은 또 전통 소주와 비슷한 부분이 있군요."
"생소하다고 말씀하시는 거 치곤 전문가 뺨치시는데요."
"유 사장님이야 말로, 이런 취미를 갖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소싯적에 서부극 영화에 한창 빠져 살았던 적이 있죠. 서부극 하면 총과 술 아니겠습니까. 총은 구할 길이 없으니, 결국 남은 게 이 녀석 뿐이덥니다."
마누라는 소주나 마실 것이지 무슨 이런 술을 마시냐며 극성이라 이런 데서나 간신히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죠. 그렇게 말하는 유동건의 얼굴에 쓴웃음이 맺힌다.
짭짤한 비스킷 위에 얇게 깎은 치즈와 초콜릿을 올린 간단한 카나페 스타일의 안주를 씹어 삼킬 때엔 그마저도 행복한 웃음으로 바뀌었지만.
첫 시합이 열릴 날보다 며칠 정도 앞서 도착한 덕분에 생긴 여유를 알뜰살뜰하게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대작對酌을 이어나가던 때였다. 그 잔잔한 분위기에 살짝 변주가 더해진 것은.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거실은 바깥 복도로 이어진 유일한 출입문의 바로 앞에 있는 곳이다.
그 말은 즉, 누구든 객실에서 나가려면 지금 거실에 있는 두 사람에 띌 수밖에 없다는 것.
만약 이곳이 추리소설의 배경이었다면 그 나름 무언가 트릭의 재료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이 여관은 지금 당장은 그 무대로 사용될 일은 없는 듯했다.
─철컥.
"아."
"어."
"음?"
왜냐하면, 오늘의 내방자는 그 누구에게도 감출 것이 없다는 듯 아주 당당하게 거실로 걸어 나왔으니까.
다만 거실에 아직 누군가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탓에 흠칫 놀랐을 뿐. 개인실에 더불어 각 방마다 완벽한 방음을 자랑하는 값비싼 객실의 힘이었다.
"찬혁아? 어디 나가냐? 이 시간에 무슨 옷을 그렇게 차려입었어?"
"선생님이랑 사장님이야말로 아직까지 약주하고 계셨어요? 아까 저녁때 하셨으면 됐지."
능란하게 대꾸하는 찬혁이었으나 그런 그의 차림새는 유동건이 술기운을 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것도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옅은 베이지색의 캐주얼 정장과 검은색 롱코트. 어느덧 성인이 되어 점점 남자답게 무르익기 시작한 훤칠한 사내가 그렇게 차려입으니 어울리기도 어울렸지만, 일본풍 배경과 서양식 옷차림이 서로의 인상을 강하게 만드는 미스매치가 되어 잡지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어때요? 어울려요? 저희 어머니가 성인되는 선물로 사주신 옷인데. 아, 코트는 여동생이 사준 거예요."
"……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안 어울린다고 말하겠냐."
굳이 뒤에 덧붙인 말이 아니더라도 어울리겠지만. 그런 말을 삼킨 유동건이 찬혁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야? 밤도 늦었는데 나가려고?"
"네, 뭐…… 그냥 잠깐 산책 좀 나가려고요."
'산책이라. 밤 11시가 다 된 이 시간에 말이지?'
당연하지만 유동건은 찬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산책을 가는 거야 그렇다 치겠지만 저렇게 완전무장을 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종종 그의 딸자식들이 말했던 '코디'인지 뭔지를 완벽하게 끝낸 모습.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유동건은 대충 이 상황의 내막을 이해했다.
'오호라.'
끄덕. 속으로 고개를 주억인 유동건이 말했다.
"그래. 다녀와라. 조심하고. 누가 뭐라 불러도 따라가지 말고."
"제가 뭐 애도 아닌데요."
"우리가 봤을 땐 충분히 애야. 아기는…… 그래. 아기 티는 간신히 벗었구나."
"…… 거 참. 아무튼 다녀오겠습니다."
어이없다는 듯 황당한 눈초리를 향하곤 문 바깥으로 나서는 찬혁을 배웅하며, 유동건은 여태 조용하던 안영길에게 툭 말을 건넸다.
"여자겠죠?"
"그렇겠죠."
"좋을 때네요."
"좋을 때죠."
"한 잔 더 따라드릴까요?"
"부탁드립니다."
과거를 추억하는 어른의 대화였다.
***
밤 11시. 양희연과 다시 만난 곳은 숙소 근처에 있던 자그마한 노상 카페였다.
말이 노상 카페지, 실상은 자판기 앞에 앉아서 쉴만한 자리를 만들어둔 적당한 공간이었지만 어차피 천 년 만년 이야기 할 것도 아니었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불만이 있다면 오히려 다른 것이겠지.
"일이 10시에 끝나면 끝나고 바로 만나면 되지, 왜 한 시간이나 지나서 보자는 거야?"
"마. 니 짐 씨부린 거 진심이면 최악이데이."
어지간히 진심인지 일본에 살던 시절의 말버릇까지 튀어나오는 녀석. 아니, 지금 당장 일본에 살고 있으니 '시절'은 아닌가.
뭐, 물론 해본 소리다. 일 끝나자마자 사람을 만나다니. 서로에게 실례인 짓이지. 씻고 단장할 시간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근데 어차피 나올 거면 좀 편한 차림으로 나오지 뭘 그렇게 차려입었어."
적당한 스키니 청바지에 폼이 넓은 하얀 티. 그리고 그 위로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양희연은 겉보기만 봐선 전혀 일하다 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세련됐다고 해야 할까.
녀석은 내 말이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살짝 성을 내며 빈정거렸지만 말이다.
"카는 니는. 하따 마 쫙 빼입었네."
"멋 좀 부렸지. 어때? 괜찮지?"
"기생오라비 같이 생겨가 어디 가믄 아굴창 털리고 다니겠다."
"우리 어머니가 사주신 건데."
"…… 그만큼 뺀질이 하나 사람처럼 보이게 맹그는 옷이라는 거 아이겠나. 옷이 날개라 카더니 참말이네."
오. 좀 치네?
낄낄대는 내 얼굴을 불퉁히 째려보던 양희연에게 지금 막 뽑은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니, 그제야 눈가에 힘을 풀고는 얌전히 옆에 앉는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뭐가?"
"알잖아. 왜 주방 못 들어가고 있냐고."
'안' 들어가는 게 아니라 '못' 들어간다는 표현. 그 차이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양희연은 둔감한 녀석이 아니었다.
"크게 대단한 일은 아이다. 그냥 쪼까 말썽이 있어가 내가 먼저 접객 일 하겠다 캤지."
"말썽?"
"으음…… 뭐, 오래된 가게 고질병 같은 게 있다."
"고질병?"
양희연의 설명은 이러했다. 양희연의 외가인 카츠라기 가문이 오사카에서 지역 토호 정도의 규모로 숙박업을 시작한 지 어언 2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200년이란 세월이 어마무시하게 길어 보일 수 있겠지만, 의외로 일본 전역을 뒤지면 수 세기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가게도 종종 나오는 판국이니 200년은 전통 노포라는 명함을 단 가게치고는 나름 소소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20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 세대로만 쳐도 양희연의 위로 7번은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야 카츠라기 여관을 창업한 이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말할 정도니까.
"가게가 200년쯤 되면 그때부턴 일하는 사람도 보통이 아이다. 아예 대대로 우리 집안 가게에서 일한 분도 있는데, 농담 반으로 가신이라 부른다 안카나."
"허……."
농담이 반. 반대로 말하면 진담이 반이라는 뜻.
과연, 과장이 좀 섞였다 해도 납득이 안 가는 수준은 아니다. 200년 전이면 정조가 조선을 통치하던 시절.
정조부터 대한민국 수립 후 현재까지.
그만한 시간 동안 한 가문 아래서 일했다면 그야 가신이란 말도 크게 과장으로 들리진 않는다.
"그런 사람들 상대론 우리 할아버지도 함부로 못 대한다. 호경기든 불경기든 사람 하나 빼고 넣는 데 눈치를 엄청 봐야 쓴다."
"갑을관계여도 평범한 갑을은 아니라는 거구만."
"맞다. 그래도 오너의 권위를 아예 무시하진 못하지만……."
뒷말에 감춰진 말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긴 했다.
아무리 오너 패밀리의 일가라 해도 출가하여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바꾼 출가외인의 딸인 양희연에겐 그만큼의 권위는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게다가 우리 여관에서도 주방은 특히 중요한 곳인기라. 주방 담당자가 바로 아까 말한 오래 일한 가문 사람 중 하나기도 하고. 이쪽 주방 크루도 다 그 아재 손 탄 사람이다카이."
"호오."
"니도 아마 봤을 긴데?"
"내가? 내가 언제?"
당황스러운 소리였다.
애당초 난 회귀한 뒤로는 일본에 오는 것 자체가 처음인 사람이다. 하물며 이런 고급 여관? 솔직히 말해서 좋기야 좋지만 내 돈 내고 오라면 못 오겠지.
그런 내가 어떻게 이 도쿄점보다도 설비도, 서비스도, 가격마저 한 수 위라는 오사카 본점의 주방장과 안면을 텄겠는가?
내 의아하다는 표정에 양희연은 진심이냐는 듯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지금 니 하는 프로그램 나오는 일본팀 고문단 대표다! 몰랐나? 한국이랑 미국에도 따라갔다 카더만."
"…… 뭐? 진짜로?"
전혀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일본팀을 조사할 때 분명 오래된 노포 여관의 주방 출신이라는 사람이 몇 사람 있긴 했다.
아니 근데 일본에 노포 고급 여관이 한두 곳이어야지, 그게 하필 이 녀석 외가일 건 뭐란 말인가.
'잠깐만. 이 말은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방금 우리가 먹은 요리를 준비한 건 그 고문단 대표의 제자들이라는 뜻이지?
'…… 이제야 알겠네.'
교장 선생님이 많은 돈을 써가며 굳이 이 숙소를 잡은 이유.
말하자면 이 여관에 있는 주방 종업원들은 일본팀의 하위호환 같은 것. 아주 완벽한 호환 관계는 아니겠지만. 뿌리가 같은 곳에서 뻗었다면 적어도 진짜 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정도는 된다.
요컨대 이곳은 단순한 휴식만이 아니라, 예습을 위한 장소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교장 선생님…….'
뭐? 얼만지 알면 편히 못 쉴 거라고? 이 정도면 처음부터 그냥 편히 쉬게만 놔둘 생각은 없었던 것 아닌가.
교장 선생님의 음흉한 속내에 치를 떠는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양희연은 여전히 투덜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뭐. 지금 당장 그 아재가 없어가 내 주방 들어가도 되나 실력 봐줄 양반도 없고, 멋대로 넣자니 눈치가 아예 안 보이는 게 아이니까 접객 일로 용돈이나 벌고 있다."
"흠……."
이거 참. 간단히 재회의 회포나 풀면서 궁금한 거나 좀 물어보려 부른 거였는데.
'생각보다 이야기가 복잡하네.'
아니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훨씬 간단하기는 하다.
요컨대 박힌 돌을 밀어내서 자리를 확보하고 파고들어야 하는데 돌이 너무 깊게 묻혀서 옴싹달싹도 않는다는 이야기 아닌가.
다만 다른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례와 다른 점은, 그 박힌 깊이가 200년 분량이라는 거고.
땅도 2 미터를 파려면 삽이 아니라 굴삭기를 가져와야 한다. 하물며 200년의 세월이 그보다 얕을까.
과연. 사람 한 명이 홀로 해결하기엔 도저히 엄두가 안 날 난관이었다.
'하지만…….'
이게 또,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실행하기 위해선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야, 양희연."
"와."
"주방, 들어가고 싶냐?"
내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은 녀석은 이윽고 황당하다는 듯 내 팔뚝을 주먹으로 밀어치며 답했다.
"와 당연한 소릴 하고 자빠졌노. 당연히 들어가고 싶지."
"…… 그치?"
당연…… 당연이라.
보통 주방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주방을 한 번 경험해 보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는 엿 같다.
둘째는 아주 엿 같다.
단언컨대 주방에서 첫 일을 마친 뒤 그걸 '재밌다'거나 '즐겁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걸 천재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그런데 종종, 그 엿 같음을 기꺼이 감수하고 다시 주방에 어떻게든 몸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요리사가 될 사람인 것이다.
"…… 당연하다 이거지?"
좋다. 조건은 채워졌다.
본인의 의지라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겸사겸사, 그것도 내가 어떻게 해결해줄게."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그러니 체크아웃할 때, 적당히 할인권 몇 장만 부탁한다. 되도록 가족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