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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52화 (352/403)

352. 도쿄 리유니온.-3-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여태껏 내 친구 중 가장 부자인 건 안 씨 남매나 백예은일 거라고 생각했다.

안 씨 남매의 경우엔 현재 안상필 대가가 운영하는 안가람에 더해 우리가 다니는 성심고를 '소유'한 재단의 최대주주인 집안.

백예은은 아버지가 대기업까진 아니더라도 요리사들 사이에선 이름만 대도 알아주는 커다란 식품, 식자재 무역회사의 사장이자 어머니는 온새미로의 오너임과 동시에 인터뷰에 글 한 줄 실어주기만 해도 엄청난 돈을 버는 요리연구가.

이 정도만 설명해도 일단 이 녀석들이 물질적 풍요로움에 얼마나 커다란 선택을 받은 존재인지는 아리라 믿는다.

지금이야 나도 어디 가서 돈 없다고 징징댈 수준은 아니지만, 회귀 전에는 말이지…… 아니, 말을 말자.

어쨌든, 내 친구 중 자세한 가정사를 아는 건 그 정도밖에 없어서 여태껏 그 둘이 가장 부자라고 생각해왔지만, 지금 알았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이야, 이건……."

"엄청난데……."

옆에서 입을 떡 벌리고 계신 차윤구 셰프나 유동건 사장님의 심정이 격하게 공감됐다.

좌우로 5미터. 상하로는 3미터는 될 거대한 대문. 지금은 영업시간이기 때문인지 활짝 열렸지만, 만약 닫혀 있다면 성문을 방불케 할 박력이리라.

그리고 그 문을 따라 주르륵 늘어선 하얀 담벼락과, 담벼락 위로 한 번 더 머리가 솟은 길죽한 대나무.

듬성듬성 솟은 대나무 사이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목조건물은 창문의 배치만 보면 2층으로 보이지만, 층 하나의 사이즈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뭣보다 저 목조건물 바깥쪽으로 솟는 새하얀 수증기. 저건 분명…….

"온천도 있어?"

"눈이 좋으시네요, 손님. 말씀하신 대로 저희 여관은 객실의 전용 온천을 제외하고도 공용 노천탕을 남, 여 두 곳으로 나누어 운용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용 설명은 체크인 후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안으로 드시죠."

"어? 아, 어."

세상에. 개인 온천에 더해서 노천탕? 그 정도 서비스면 일본에서도 특급에 들어가는 수준의 서비스다.

내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관의 범상치 않은 사이즈에 놀라움을 느끼며 양희연의 뒤를 따라 걷는 동안, 그녀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본 도쿄점에는 병丙급, 을乙급, 갑甲급 객실을 합쳐 총 17개의 객실과 한 개의 특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모실 객실은 갑급으로 개인 욕실은 물론 타 노천탕과 분리된 프라이베이트 온천을 상시 준비해 두고 있사오니, 마음껏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 걸음 더 걷고, 다시 손을 뻗는다.

"1층에는 대합실, 연회실, 휴게실 밑 간단한 실내 운동을 즐기실 수도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사오니, 이쪽도 모쪼록 청소시간인 오후 11시부터 0시 정각을 제외하고 자유롭게 사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깥에서 봐도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건물이었지만, 내부로 들어서서 본 위용은 그 이상이었다.

덩치 네 명이 스크럼을 짜고 걸을 수도 있을 것처럼 넓은 복도와 온갖 잡다한 편의 공간. 거기다 바깥에서 봐도 열 사람은 누워 뒹굴 수 있을 것처럼 커다란 방까지.

저게 고작 거실이고 실제 숙박공간은 더욱 안쪽에 있단 걸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크기였다.

'이 정도면 제일 낮은 급도 1박에 인당 40은 받겠는데……?'

우리가 다섯 명이니까 하루에 200은 될 거란 이야기다. 그것도 최하급 기준으로.

물론 최하급이 말이 최하급이지 어지간한 호텔 스위트 급은 되겠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묵을 갑급 객실이란 곳은 대체 어느 수준이란 말인가.

그 호기심은 이내 풀리게 됐다.

"우와……."

갑급 객실이란 곳은, 갑을병정의 첫 번째라는 말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마치 예전에 보았던 일본 영화의 부잣집 저택을 그대로 뚝 떼어놓은 것 같은 풍치.

바깥으로 통하는 미닫이문 저편으로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아름다운 눈 내린 정원이 우리를 반긴다.

"이곳이 앞으로 여러분께서 묵으실 곳입니다. 식사는 조식이 9시. 중식이 12시. 석식이 6시이며 매 식사시간 1시간 전에 여러분께 식사 여부를 여쭈어 식사 여부나 메뉴 등을 고르실 수 있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실 때엔 거실의 인터폰으로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직원이 24시간 상시 대기하고 있사오니 언제든 맘 편히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상상 이상의 설비와 상상 이상의 대접이었다.

이렇게 극존칭까지 쓰며 공손함을 보이는 양희연의 태도까지 합쳐서, 뭔가 다른 세상에 온 기분.

이게 동양권 최고급 숙박시설의 서비스인가. 유럽 호텔과는 다른 점이 많아서 재미와 놀라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럼, 전 이만 자리를 비키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본 도쿄점에서의 휴식이 좋은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사라진 양희연의 모습을 눈으로 좇던 난, 이내 교장 선생님을 돌아보곤 물었다.

"아니, 선생님. 여기 대체 1박에 얼마에요?"

"궁금한가요?"

물론 궁금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어르신들도 다 궁금한 눈치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다.

"모르는 편이 나을 거예요. 알면 모처럼 생긴 휴식시간이 불편해질 테니까."

"그 말씀은……."

알면 심란해질 정도의 가격이다. 그거구나.

순식간에 어벙한 표정이 되어 버린 우리들을 눈앞에 둔 교장 선생님이 이어 말했다.

"그래도 도쿄점은 오사카 본점보다는 못해요. 본점 규모는 도쿄 지점보다 세 배는 크다고 하니까요."

"세, 세 배요?"

세 배? 여기보다? 대체 얼마나 큰 거야?

"양희연 학생의 외가는 300년도 더 전부터 부농으로 시작해서 주조酒造업, 숙박업까지 가지를 뻗쳤다고 하더군요. 옛날에 형제끼리 사업을 가르면서 양희연 양의 외가는 숙박업을 물려받아 내려오고 있다고 하지만…… 아마 전부 합치면 어지간한 대기업 일가 정도의 재산은 있겠죠."

그 먼 옛날부터 부농에 주조?

'그 정도면…… 거의 지역 실세 급인데?'

예로부터 주조업자는 정말 부자 중의 부자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술을 만들기 위한 곡식과 물. 그리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땅을 가지려면 한두 푼 정도로는 정말 어림도 없었으니까.

오죽하면 미국의 옛 정치인 중에선 주조업자 출신이 그토록 많았다던가.

지금. 내 속에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친구 중 가장 부자는 여태껏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했었다.

'…… 앞으로 누나라고 부를까.'

돈 많으면 누나지. 아무렴.

근데 아마 본인이 싫어하겠지. 사람 키 작다고 놀리냐면서. 멍청한 생각이었다.

***

일단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이 여관의 설비와 서비스는 그야말로 돈값을 제대로 하는 곳이었다. 나도 얼만지는 모르지만.

바닥은 온천수를 사용한 보일러 시스템을 사용한 건지 내가 아는 평범한 일본식 건물과 다르게 방 전체가 훈훈했고, 묘하게 향긋한 유황 냄새 같은 게 아주 살짝 올라오는 게 은근 기분이 좋았다.

꼭 눈에 안 보이는 투명한 아로마 캔들을 켜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1류의 서비스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더니, 맨날 그 안 보이는 곳에만 있던 나로선 이런 작은 것조차 제법 참신한 경험이었다.

물론 보이는 곳에서도 제법 참신하고 놀라운 게 많았다.

예를 들어서,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상황이라던가.

"……."

"……."

"…… 큽."

"…… 웃지 마."

"예?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종업원이 손님한테 반말 까게 되어 있나?"

"…… 손님.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식사나 마저 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전통복인 기모노의 일종, 유카타를 차려입은 양희연이 핏줄이 빠득 선 표정으로 윽박을 지르듯 말한다.

직원용인 탓에 멋스러움이고 뭐고 없는 평범한 민무늬 투톤 유카타지만, 애당초 저런 전통복 비슷한 옷이라도 우리 앞에서 입은 적이 없던 녀석이라 괜히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터졌다.

저녁식사 시간. 아무래도 우리의 편의를 봐주는 역할이 양희연에게 낙점된 걸까. 미닫이문 하나를 두고 옆에 정좌해서 대기하고 있는 녀석.

그렇게 혼자 떨어트려 두고 나만 먹기 미안해서 농담을 좀 던진 건데, 반응이 격하다.

잠시 후, 우리 모두가 식사를 마치자 어느새 등장한 종업원들이 우리가 먹은 상을 재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양희연은 우리 옆에 붙어 우리에게 물었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좋았어요. 아주 맛있더군요."

"회도 아주 신선한 걸 쓰고 있고, 대게가 특히 질이 좋던데요."

"계절이 계절인지라, 훗카이도에서 좋은 물건을 구해왔습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리사인 우리조차 입에서 찬사가 터져 나오는 걸 막기 힘들 만큼 훌륭한 식사였다.

요리사라고 항상 고급 식사만 먹으리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하는 일이 많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밥을 잘 차려 먹을 시간이 없어서.

애당초 나만 해도 요리사 일만 40년 가까이 했는데 배에 장식한 회나 초밥 같은 걸 먹어본 건 처음이다. 만들기야 많이 만들었지만.

"나도 맛있게 먹었어."

"……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사실, 잘 먹은 건 그렇다 치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넌 주방 안 들어가?"

맛은 있다. 맛은 있지만, 내가 아는 양희연의 솜씨라면 이런 음식에 크게 지지 않는 요리도 얼마든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요리 중에 몇 개 섞여 있던 조림요리 같은 경우, 양희연이 만들었다면 월등히 맛이 좋았겠지.

그런 인재가 왜 주방이 아니라 접대 쪽으로 나와 있는지 모르겠어서 건넨 질문에 녀석은 잠깐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 제 현재 직책은 여러분을 전담하는 것이기에, 지금은 주방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케이. 의심 스택 하나.

방금 이 녀석이 우릴 안내할 때 보여준 모습을 보면 대단히 접객에 익숙하단 걸 알 수 있다.

양희연이 여기서 일을 시작했다고 해봤자 세 달도 채 안 지났을 거다. 얘가 처음 요리를 배우며 일을 시작한 건 성 셰프를 따라 한국에 건너온 다음이었고, 일본에 온 지는 기껏해야 두 달. 견습 딱지나 간신히 뗄 시간이지 않은가?

그 말은 즉, 양희연은 요 두 달 동안 주방이 아닌 접객 쪽에서 근무하며 일을 배웠을 것이란 소리.

최초부터 주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여태껏 접객을 보고 있었단 것.

내가 인사 담당자였으면 얘 이력을 보자마자 주방에 꽂아 버렸을 텐데. 의아한 일이다.

'본인도 접객보단 주방이 더 편할 텐데 말이야.'

배운 게 어디로 가지 않으니까.

아무리 출가한 딸의 아이라지만 나름 오너 패밀리의 일원인 양희연이 자기가 원하는 업무를 맡지 못할 리도 없을 터.

슬슬 풍겨오는 요상한 감각에 눈을 가늘게 뜨고 양희연을 바라봤지만. 양희연은 날 마주 보곤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말해줄 수 없다는 태도다.

어째서일까?

뭐, 속내를 말하든 말든 그건 자기 마음이지만, 가끔은 외부의 요인 탓에 그럴 때도 있다.

'지금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시간과 장소. 장소?

"…… 아."

과연. 알겠다.

생각해보면 양희연의 태도가 저렇게 완전히 고객을 대하는 태도로 바뀐 건 이 여관에 들어온 다음부터.

그렇다는 건 녀석이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가게에서는 해선 안 되는 이야기.

'혹은 가게 사람이 있는 곳에선 못 할 이야기.'

그걸 이해하자마자, 난 양희연을 향해 왼쪽 손목을 들어 보이며 손목 등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시계는 차지 않았지만, 만약 시계를 찼다면 시계가 있었을 자리.

쉽게 말해,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 언제냐는 뜻.

그 사인을 눈치챈 녀석이 작게 한숨을 짓고는 두 손을 활짝 펼친다. 열 시?

'아하, 일본 나이로는 아직 미성년자였지?'

그럼 10시 이후까진 일을 못 하지. 오너가 아니라 알바생 신분으로는.

작게 웃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도 한심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럼에도 작은 미소를 짓곤 날 바라본다.

아무래도 내 애프터 신청이 성공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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