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50화 (350/403)

350. 도쿄 리유니온.-1-

"내가 전부터 생각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뭔데요?"

"우리, 뭔가 너무 운이 없는 거 아니냐?"

"……."

인천공항의 활주로 위. 비행기에 타기가 무섭게 심장을 쑤시듯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온 유동건 사장님의 뼈아픈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첫 번째부터 프랑스랑 싸워, 두 번째는 어찌저찌 넘어갔더니 갑자기 부정행위 루머가 터져, 세 번째는 한일전이라고 긴장했더니 아예 일본에서 해 버리네? 내가 봤을 때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어."

옛날에 영화였던가, 아님 책이였던가. 아무튼 거기서 본 구절이 하나 떠올랐다.

사람은 폐에 칼이 꽂히면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고 한다. 너무 아파서 몸이 자연스럽게 근육을 조이는 동시에, 구멍 뚫린 폐를 통해 공기가 쑤욱 하고 빠져 버리는 탓이라던가.

지금 내가 딱 그 기분이었다.

"음……."

말이 안 나오네 이거.

사실 앞서 유동건 사장님이 말씀하신 불행 중 8할 정도는 내 탓 아닌가? 어느 의미로 저 불평은 날 향한 타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그래도 3번째 시합 개최지가 일본인 게 나 때문인 건 아니잖아?'

아니…… 사실 그건 원래 문제 될 게 아니었다. 오히려 여행길이 짧아서 우리 형편에 좋다면 몰라도.

그래. 원론적으로만 따지면 일본에서 시합을 치르는 건 아무 문제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 별거 아닌 일을 문제가 되게 만든 것도 역시 나였다.

'……아니, 진짜 심각한데 이거.'

대회 끝나면 정말 굿이라도 한 번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창문 아래로 보이는 기다란 활주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남몰래 중얼거렸다.

고작 두 시간 남짓한 비행. 시간으로만 치면 서울에서 부산을 내려가는 것보다 빠르게, 우리는 해외에 도착해 있었다.

***

일본은 위도, 경도상으로 우리나라와 아주 비슷한 지리를 가진 나라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기본적으로 일본의 날씨는 한국의 날씨와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단 뜻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나라가 모든 게 똑같을 순 없는 법.

섬이라는 국토적 특성상 반도인 한국과는 기본적인 날씨가 비슷해도 많은 차이가 있다.

나라 전체를 둘러싼 바다 탓에 내륙지방이어도 습도가 상당히 높고, 구름이 자주 끼며 하늘이 맑게 갠 날이 그리 많지 않다. 영국과 비슷한 부분일까.

거기다 기다란 활 모양으로 위아래로 굽은 생김새는 양 극단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북쪽 끝에 위치하여 거의 오호츠크 해와 맞닿은 훗카이도의 경우 기본적으로 겨울에는 정말 더럽게 춥고, 거기다 바닷바람을 타고 온 비구름이 많아 눈까지 자주 온다.

겨울에 일본에 폭설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하는 뉴스가 떴을 때 대충 훗카이도구나 하고 짐작하면 대부분 들어맞는다.

반대로 남쪽인 오사카의 경우엔 여름철이 됐다 하면 대구 안 부러운 무더위를 자랑한다. 심지어 습도는 기본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높고.

물론 한국은 땅도 그리 크지 않은 곳이 연교차까지 장난이 아니라 사시사철 괴롭지만, 일본의 경우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은 특정 계절에 지옥을 본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도쿄 국제공항.

마침 날씨가 가장 추울 때인 1월 초순. 도쿄에 도착한 우리 한국팀의 감상은, 대충 이러했다.

"어, 생각보다 따뜻한데요?"

"그러게. 웃옷 잠깐 벗어도 되겠다."

고작 도쿄 수준의 추위라면 제법 버틸만하다.

적어도 집에서마저 플로리다의 해변이 그리워지던 수도권보단 훨씬 나은 날씨였다.

***

'그나저나 이번 시합은 도쿄에서 열리는 건가.'

기왕이면 오사카에서 열리길 바랐는데 말이지.

뭐, 물론 이런 커다란 행사는 인프라가 가장 잘 발달한 곳에서 하는 게 맞고, 대부분의 국가는 그런 곳이 수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싶지만 오사카 정도면 그 정도 능력은 있는 지자체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지만, 일단 기본적으론 도쿄보단 따뜻하고. 뭣보다 거긴 아는 얼굴도 있으니까.

'생각해보면 서로 얼굴 본 지도 꽤 됐네.'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겨울방학이 시작된 뒤 이리저리 흩어진 우리들은 요즘 통 얼굴 보기가 힘들다.

고등학교 3학년이면 진지하게 미래에 대한 고민이 한창일 시기.

한때 집안 사정에 떠밀리기만 하는 삶을 사는 것 같다고 한탄하던 김철정은 진학 대신 정말 각 잡고 '집안일'이 아닌 '직업'으로서의 제 가게를 배워보겠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종종 하루에 14시간을 일하는 게 정상이냐느니, 진짜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 같아서 탈주하고 싶다느니 투정을 잔뜩 부리던 녀석이지만, 겨울방학 내내 컴퓨터에서 이 녀석이 게임계정으로 로그인했다는 알람 한 번을 못 봤던 걸 생각하면 정말 진심이란 뜻이겠지.

종종 세끼 밥 챙겨 먹기보다 게임 한 챕터를 더 플레이하는 걸 좋아하던 녀석이었는데. 정말 엄청난 각오를 했단 걸 알 수 있었다.

'나현주는 의외였지.'

기세로만 따지면 당장에라도 가업을 이어 칼을 빼들 것이라 생각했던 현주 녀석은 의외로 진학을 선택했다.

의외라고 하니 좀 실례되는 느낌이긴 하지만, 거의 인간 터미네이터처럼 느껴지던 옛 시절을 생각하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으리라.

녀석의 아버지는 딸의 그런 결정이 크게 기꺼웠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도축업자는 아직 중장년층의 사회적 인식이 좋지 못하단 걸 직접 체험하셨기 때문일까.

그러나 나현주는 어디까지나 잠시간의 유예일 뿐이라는 듯, 지금은 축산업과를 지망하여 그쪽으로 진학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 부녀의 물밑 다툼도 상당한 수준이다. 외견이랑 다르게 내적으로는 제법 여린 부분이 있던 녀석이 어느새 이렇게 당차게 됐는지.

그 외에도 백예은이나 안창민, 안효민 선배 등등.

다들 저마다 꿈꾸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중에도 특이한 사람을 뽑으라면 단연 양희연이었다.

아마 현재 내 친구들 중에선 거의 유일하게 해외유학을 결정하여 실행하고 있는 건 그 녀석 말곤 없으니까.

'해외유학인가? 생각하면 좀 애매하긴 한데…….'

다른 곳도 아니고 일본 대학에 진학하는 거였으니, 이걸 제 나라에 돌아갔다고 표현해야 하는지, 아니면 유학이라고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국적은 한국일 테니까 유학이라면 유학이겠지만 말이다.

양희연은 요근래 들어서는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야 뭐, 입시를 준비하겠다며 방학이 시작되기 무섭게 홀연히 일본으로 떠난 뒤로 소식이 통 없었으니까.

아직도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성미설 셰프의 말로는 오사카의 외조부 댁에서 지내며 오사카 시립 대학 입시를 치렀다는데, 결과는 아직 듣지 못했다.

'그나저나 오사카 시립대면 입시 어려운 걸로 유명한 곳인데.'

그런 데에 진학하려 하다니, 녀석도 난 놈은 난 놈이야.

아무튼 그렇게 연락도 없다 보니 내심 오사카로 가면 짬을 내서 만나러 가볼 수는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도쿄로 온 이상 그 생각은 잠시 접어둬야 할 것 같다.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가장 편하고 빠른 신칸센으로도 3시간인데, 얼굴 한번 보자고 왕복 6시간을 쓰기는 좀…….'

그러려면 아예 하루를 빼든가 해야 간신히 볼 수 있을 텐데, 다른 팀 염탐까지 관두고 보러 갈 만큼 급한 사안도 아니니까.

좀 아쉽긴 해도 어차피 졸업식 때 만날 수 있겠지.

적당히 생각을 마무리하며 수하물을 챙겨 일행과 함께 게이트를 나서는 길. 나는 앞서 걷고 계시던 교장 선생님께 질문드렸다.

"선생님. 이번 숙소는 어떤 곳인가요?"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에 참가하는 선수단의 숙소는 기본적으로 지원되는 장소가 있다.

하지만 선수 본인들이 원한다면 제공되는 장소 이외의 숙소를 자체적으로 잡는 것도 자유다. 이럴 경우엔 소정의 지원금이 나온다.

'소정의 지원금이라고 해도 어지간한 비즈니스호텔 숙박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금액이지만.'

교장 선생님은 그 지원금에 본인의 사비를 더하여 어지간한 수준을 뛰어넘는 숙소를 잡곤 하셨다. 취식의 편의가 갖춰지면 경기력 상승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말이다.

솔직히 나는 그 논리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먹고 자는 데 걱정이 없어지니까 사는 게 편해지더라.

미국 때나 한번 경험한 정도지만, 효과를 인지하는 데에는 그 한 번의 경험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다음 숙소가 어디일지도 기대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미국에서도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기로 유명한 플로리다에서 전용 풀장이 있는 호텔에 방을 잡았을 정돈데, 여기선 또 어디로 갈지 기대가 안 될 수가 있겠는가.

…….사실 반쯤은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성 기대였지만, 그래도 반의반 정도는 진심이기도 했다.

내 질문에 교장 선생님은 작게 웃으며 답하셨다.

"기대해도 좋아요. 이번에도 아주 좋은 곳으로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답니다. 마침 연이 닿은 곳이 있었거든요."

"오……."

"그쪽에서 먼저 마중을 나와 있을 거예요. 나가는 길에 찾아보도록 하죠."

"네."

오, 이렇게까지 장담하실 정도라니, 상당히 기대감이 차오른다.

심지어 따로 마중하는 인원까지 보내는 건 상당한 고급 호텔에서나 시행하는 서비스 아닌가.

우리 호텔에서도 제법 끗발 좀 날리는 VIP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서비스였는데.

대체 어떤 곳과 인연이 있어서 그런 곳에 예약을 잡은 건가. 아까까지의 아쉬움은 온데간데없이 두근대는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게이트를 나선다.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온갖 종류의 피켓.

저 중에 과연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피켓에 적힌 문구를 유심히 둘러보던 그때, 우릴 둘러싼 인파의 머리 위로 살짝 고개를 내민 피켓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 저거 같은데요?"

사람에 가려 놓칠 뻔했지만, 살짝 드러난 피켓에 쓰인 글자만큼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켓에 쓰인 글자는 한글이었고, 심지어 '안영길 님'이라는 이름만큼은 똑똑히 볼 수 있었으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본인의 모습은 인파에 아예 가려진 것을 보아 상당히 체구가 작은 사람인 듯싶었다. 용케도 찾아냈다며 헛웃음을 들이켜고, 피켓이 흔들리는 방향을 향해 걷는다.

차단벽으로 막히지 않은 통로를 돌아 피켓이 보였던 방향으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인파가 워낙 많아 이제야 눈에 들어온 우리를 환영하는 피켓을 들고 있던 누군가.

'여자?'

보통 이런 자리에는 남자를 주로 보낼 텐데.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이상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린 뒷모습이 묘하게 내 기시감을 찔렀다.

예상한 대로 자그마한 체구. 3cm 정도의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도 평균보다 살짝 더 작은 키.

'뭐지, 분명 얼마 전에…….'

저런 사람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런 애매모호한 느낌에 발걸음을 멈춘 그때, 날 따라 걷고 계시던 차윤구 셰프가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부른다.

"이봐요, 여깁니다."

"?"

한국말에 반응한 것일까. 어깨를 흠칫 흔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그녀가 이윽고 이쪽을 돌아보고, 잠시 후 눈이 마주친다.

"아."

"어."

그리고 동시에 나오는 탄성.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 안에 있던 기시감이, 이윽고 천천히 반가움으로, 그리고 당황스러움으로 변해가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어, 어……."

다시 한번 말문이 막히는 상황.

그렇게 놀란 나를 향해,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왔나. 퍼뜩 안 내리나. 이거 드느라 팔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안카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지금쯤 오사카의 외가에 있어야 할 그리운 친구, 양희연이었다.

"너 왜 여기 있냐?"

정말.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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