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주어작청 야어서청.-2-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제야의 종소리가 온 서울과 가정집의 거실에서 공명한 밤이 지난 지도 어언 며칠.
그 사건은 갑자기 일어났다.
***
중국팀의 감독이자 감시자 역할을 맡은 량웨이는 모처럼의 새해를 맞아 당국에서 내려준 휴가를 활용해 친가를 향해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흐흠~."
국가의 명이 있다면 최소한의 양심조차 담배꽁초처럼 길거리에 던져 버릴 수 있는 남자라 하더라도 가족은 있다.
아니. 반대로 가족이 있기에 양심마저 헌신짝 취급할 수 있는 것이다.
저울질을 잘못한 인간이 어떻게 가버리는지, 나름 공무원 딱지를 달고 십여 년의 세월을 살아남은 량웨이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양심을 대가로 지켰기에 더욱 소중한 가족. 그런 가족에게 돌아가는 길이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서 마음에 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인간성이 가진 한계를 알 수 있었지만, 량웨이 자신에게 그런 건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자기보신의 극에 달하면 추하다 했던가.
그 말은 어쩌면 이 남자에게 딱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른다.
"얼른 자리 찾아서 앉아. 이 기간에 좌석 딸린 기차표 얼마나 비싼지 알지?"
"알겠어."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아내를 데리고 기차로 들어서는 량웨이.
지옥 같다는 말로도 모자랄 인파를 뚫고, 이미 예약한 자리에 멋대로 앉은 사람들을 공무원증을 내보이며 쫓아낸 뒤에야 량웨이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거지.'
성공의 맛. 지방에서 올라온 그가 자그마한 명패 하나로 사람들을 손끝으로 부릴 수 있는 권력. 손에 들린 공무원증이야말로 자신의 성공 증표 그 자체다. 량웨이는 그 성공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웃었다.
고작 남들이 구하기 어려운 좌석 하나, 고작 다툼을 쉽게 끝낼 수 있는 권리 하나.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고작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17억의 인구 중 여기에 손끝이라도 댈 가능성이 있는 자는 고작 200만여 명 안팎.
거기에 실제로 자신과 같은 자리에 있는 이는 그 200만 명 중에서도 상위 10% 내외.
양심도, 지인도, 친구도.
핏줄을 제외하면 팔 수 있는 건 모조리 팔아 간신히 도달한 자리. 언젠가 당국이 핏줄마저 요구한다면, 그는 아마 거절할 수 없겠지.
그의 출신 탓에 이 이상 올라가는 건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발버둥을 멈출 수는 없었으니까.
발버둥을 멈추기에 그는 이미 이 별거 아닌 성공의 맛에 너무나 깊게 취해 있었으므로.
기차가 출발한다. 정겨운 경적소리와 기관이 움직이며 나는 기계음을 들으며 량웨이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가를 어떻게 즐겨야 할지 기꺼운 고민에 겨웠다.
기차 명물인 도시락을 먹거나 아내와 이런저런 휴가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둥, 량웨이는 들뜬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내와 대화 중 걸려온 전화에 핸드폰을 든 그는 화면에 뜬 전화번호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어?"
상사에게서 온 전화였다.
다만 평소 그에게 연락하는 바로 위의 상사가 아닌, 쉽게 얼굴을 보기도 힘든 서넛 단계는 위에 있는 상사.
체면치례로 번호 정도만을 간단히 등록해둔 상대에게서, 그것도 휴일에 갑자기 걸려온 전화. 량웨이는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의 경험상, 이렇게 전달체계를 무시하고 오는 연락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아내에게 설명할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에서 사람 목소리가 최대한 차단되는 공간, 즉 화장실을 찾아 전력으로 뛴 량웨이가 수화기를 받기가 무섭게 스피커에서 귀청을 찢어 버릴 것 같은 성량이 튀어나와 그의 고막을 강타했다.
─이 새끼야!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사, 3급 경독 량웨이!"
대답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척수반사처럼 나온 관등성명을 들은 상대. 3급 경감 왕옌은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목소리 듣기도 싫으니까 대답하지 말고 귓구멍 열고 똑바로 들어! 지금 네가 처리한 일 때문에 이쪽까지 불똥이 튀기 직전이니까! 이거, 일주일. 아니, 나흘 이내에 제대로 못 틀어막으면 너나 네 처, 애미애비 가릴 거 없이 이 나라에 발 못 붙인다고 생각해! 알겠어!?
"알겠습니다!"
─삑!
전화가 끊어졌다. 그의 대답이 채 나오기도 전이었는데 말이다. 목소리조차 듣기 싫다는 건 허언이 아니라는 증명이었지만, 그것이 량웨이에게 도움이 되는 사실은 아니었다.
이런 것을 하늘이 노래진다고 하는 것일까. 량웨이는 갑자기 피가 쑥 빠져나간 것처럼 현기증이 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참으려 했지만 끝내 튀어나온 구역질 소리만이 화장실을 맴돈다.
안 좋은 소식일 줄은 알았지만, 대체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새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격양에 찬 연락이 지휘체계도 무시하고 다이렉트로 꽂혔단 말인가?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급박하게 당직을 서고 있을 제 부하에게 연락을 보낸 량웨이는, 이윽고 답변으로 받은 글과 어느 사이트로 이어진 인터넷 주소를 보고는 왕옌의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훨씬 커다란 충격에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세, 세상에 맙소사……."
사건이었다.
그것도 보통 사건이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자신은 물론이요 주변인까지 사정없이 터트릴 수 있는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 버린 정도의 사건이었다.
***
"새해 선물은 마음에 드시나?"
집으로부터 어언 백수십km. 낯이 익긴커녕 일면식 있는 사람 하나 없는 이름 모를 동네의 24시간 PC방의 허름한 의자에 앉은 채 웃는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적어도 여태껏 이런 문제로 마음고생 한 내 노고를 뼛속 깊이 공감하고 있기를 진심으로, 또 진심으로 바란다.
***
나는 다개국어 능력자다.
제법 현지인스럽게 말할 수 있고, 읽고 쓰기도 가능한 한국어, 영어, 불어, 일본어. 거기에 대충 의사소통 정도는 가능한 스페인어와 중국어.
이 정도면 멀티링궐이란 이름표를 붙이고 다녀도 될 테지.
다개국어를 할 수 있다는 건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된다.
다개국어 능력자의 장점이 무어냐. 그건 바로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평범한 사람의 배 이상 많다는 것이다.
취직이나 취미, 여행, 공부에 이르기까지. 하다못해 키배를 떠도 다개국어를 할 수 있으면 좋은 점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하나를 추가하자면, 어느 나라의 커뮤니티에서든 자연스러운 분탕을 칠 수 있다는 특기 아닌 특기를 갖출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
"자, 그럼 이게 얼마나 효과가 나오려나."
내가 한 일은 간단했다. '이미 소문이 나 버리면 근원지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소문을 냈을 뿐.
아마 어머니가 한 말씀은 '어차피 남한테 새어 나갈 비밀이면 언젠가는 밝혀질 테니 너무 걱정 마라'는 뜻이었겠지만, 나는 조금 해석을 다르게 했다.
"소문이 나서 발생지를 찾기 어려우면, 처음부터 여기저기서 소문을 내버리면 되잖아?"
세상에는 유명한 익명사이트가 참 많다.
서양 최대급 사이트인 에딧과 for chan, 한국의 BC, 일본의 3ch 등등.
개인이 의견을 피력하기 쉽고, 그 개인의 의견이 불특정 다수의 유저의 눈에 들어가기도 쉽고, 심지어 첫 전파에 이은 재확산까지 일어나는 커뮤니티의 전파력은 21세기에선 결코 무시할 게 못 된다.
우선 친구들과 새해맞이 여행을 간다는 명목으로 짐을 챙겨 집을 나선 뒤, 오로지 현금만을 써서 전국 각지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새해를 기념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다시 되돌아오는 승객이 천만 단위로 집계되는 상황에 현금을 사용해 여행하는 개인의 기록 따위는 이미 찾을 수도 없게 된다.
그리고 도착한 곳의 아무 pc방에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들어가 대충 아무 자리나 잡고 앉아 VPN을 켜고 해외 커뮤니티에 아래와 같은 글을 각국의 언어로 무차별적으로 뿌린다.
─너네 그거 아냐? 미국에서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할 때 중국이 부정행위 한 정황 포착됨. 공신력 있는 애들이 지들 피해 감수하고 기사 쓰기 싫으니까 몰래 푼 것 같음.
─뭐? 진짜?
─어.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물론 오로지 진실만을 적지는 않는다.
아무런 믿음도 가지 않는 내가 짜깁기한 온갖 루머 속에 단 몇 조각의 진실만을 편의점 끼워 넣기 상품마냥 섞어 글을 쓴다.
그다음은 같은 행위의 반복이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그곳의 pc방에서 마찬가지로 VPN을 켜고 루머를 투척.
어차피 고작 무료로 쓸 수 있는 VPN이 대단한 효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이라도 추적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할 뿐이다.
'뭐, 어차피 발신원이 전부 한국 여기저기라는 걸 알아낸 다음엔 이미…….'
손 쓸 방도도 없을 만큼 소문이 무성하게 불어나 있겠지.
첫 번째 글이 두 번째 글의 출처가 되고, 두 번째 글이 세 번째 글의 출처가 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첫 번째 글의 출처가 마지막 글이 되는 쳇바퀴의 완성.
그 중간중간 어그로에 끌린 다른 유저가 내 글을 복사해서 게시하고, 끝내 마지막에는 글의 출처가 대체 어디였는지 알 수 없는 꼬이고 꼬인 거미줄이 된다.
지역을 이동해 차근차근 밥도 먹고, 쉴 땐 쉬어주며 글을 쓰는 게 오히려 시차에 의한 게시 시간의 어긋남으로 보이는 트릭.
글을 쓰고, VPN으로 다중 IP를 생성해 추천수를 불려 억지로 내가 생성한 논란을 한 번 수면 위로 꺼내주면, 그다음부터는 유저들끼리 쉼 없이 드잡이하며 자연스럽게 수류를 만든다.
'정보화 사회라는 건 대단하지.'
사람 한 명이 마음만 먹으면 억지로 무언가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21세기의 지식인이 가진 힘이다.
'원래 이런 짓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먼저 치사하게 나온 건 그쪽이잖아?
그럼 나도 좀 치사하게 나서 줘야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17억의 땡깡? 그 정도야, 인터넷 커뮤니티에 상주하는 양반들이 힘을 합쳐 나서면 얼마든 분담할 수 있거든.
'물론 나는 거기서 쏙 빠질 거지만.'
머릿수 싸움을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셨지?
그럼 이쪽도 같이 머릿수 싸움을 해드려야지. 어디 그 하나의 중국이라는 놈이 이번에는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이거야.
태어나길 뻘에서 난 놈에게 진흙탕 싸움을 신청하셨겠다?
아쉬워서 어쩌나. 우리 한국인이란 놈들은 그 진흙탕 싸움의 베테랑인데.
"슬슬 돌아갈까."
2박3일에 걸친 호캉스 겸 정보전 대작전.
슬슬 랜선을 뜨끈뜨끈하게 지피기 시작한 불붙은 논쟁을 보며, 나는 짐을 챙겼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사실, 이런 방법으로 중국의 부정행위가 적발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갑자기 중국팀이 미쳐서 '우리가 부정행위를 했소!'하고 나서지 않는 이상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무너질 논란이겠지.
세간의 눈초리가 중국팀에게 향하는 것도 잠깐뿐일 터.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거다.
잠깐이라지만 적어도 이 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잉걸불로 남을 논란.
'누군가 날 바라보고 있다'는 중국팀의 인식.
그 찝찝함이 가슴속에 남아있는 한, 그들은 다시 부정행위를 시도할 마음을 쉽게 먹지 못 할 것이다.
"뭐……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어야 통할 이야기긴 하다만."
설마 감시관 수억 명이 붙은 시험장에서 또 비슷한 짓을 할 만큼 멍청하진 않겠지.
…… 그렇겠지?
그 의문에 답해주는 이는 아쉽게도 내 곁에는 없는 듯했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