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47화 (347/403)

347. 주어작청 야어서청.-1-

이상한 분위기다. 차윤구는 생각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부터였던가…….'

이제 곧 돌아올 새해.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에서도 행사장을 준비하는 겸, 선수들의 휴식과 연습을 위해 며칠의 휴일을 선사했다.

다음 촬영은 새해가 밝은 뒤가 되겠지. 일정은 조금 밀렸지만, 여태껏 해외 로케까지 뛰며 고생한 선수단이나 운영진에겐 딱 좋은 휴식시간이었기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이 시간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한국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개막전이야 국내에서 했다지만 그렇다고 지구 반대편까지 다녀오는 일정에 체력이 소진되지 않을 순 없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쩐 일일까. 마지막 시합인 중국 대 대만의 시합이 중국의 완봉승으로 끝나는 모습을 직관한 날부터 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아니. 정확히는 팀의 일각인 소년. 찬혁의 분위기가 묘했다.

호텔 주방이란 곳이 기본적으로 수많은 사람과 사시사철 부대껴 일하는 곳이기에, 거기서 근무하는 사람은 대다수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해진다.

'사실 그보단 상사 눈치 보는 습관을 들여서 그런 거지만…….'

평범한 회사와는 다르게 근무시간 내내 상사와 붙어 일하기 때문에 까딱하면 분 단위로 깨지면서 일할 수도 있는 곳이라 상사 눈치를 살피는 건 항상 필수니까.

아무튼, 같은 호텔에서도 드문 처음부터 대기업 호텔 주방에서 시작해 그대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차윤구는 찬혁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음을 얼추 알 수 있었다.

나쁘거나 좋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평소와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사적인 중대사가 터진 상황에 자기가 맡은 업무가 너무 중요해서 어떻게 출근은 했지만 일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상사를 보던 때를 떠오르게 하는 느낌이었다. 왜 어린아이에게서 상사의 느낌이 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찬혁아. 무슨 일 있어?"

혹시나 싶어 그렇게 질문해도.

"예? 아뇨. 아무 일 없는데요?"

라고 대답하는 것까지 너무 그 시절의 상사와 똑같아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함께했던 몇 차례의 연습 동안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누가 그 말을 믿으랴. 당연히 차윤구 자신 또한 거기에 포함된 사람이었고.

하지만 벌써 코앞으로 다가온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오늘로써 끝내기로 한 올해의 마지막 연습 날에도 좀처럼 속내를 밝히지 않는 찬혁을 보며 차윤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알려주기 힘든 일이라는 거겠지.'

연습 태도가 불성실하기라도 했다면 차라리 누구든 나서서 뭐라 했겠지만, 강화합숙 때부터 그랬다시피 지금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오히려 그때보다 더 열심히 연습에 임하는 찬혁의 태도를 보고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새해네요. 여러분 모두 올 한 해, 정말 고생 많았어요. 낯선 일도, 어려운 일도 많았을 텐데 주눅 들지 않고 잘 해줬습니다. 올해에는 이게 마지막 만남이겠죠. 여러분 모두 남은 일 잘 마무리하고 내년에 더 좋은 모습으로 웃으며 다시 만납시다."

사람 버릇 남 못 준다는 걸까. 마치 학생들을 상대로 훈화를 읊는 것처럼 작별인사를 건네는 안영길의 말에 일동이 웃는다.

'남은 일을 잘 마무리 하라'는 말을 할 때 찬혁에게 눈길을 건넨 것을 보아, 안영길 또한 찬혁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음을 깨달은 차윤구는 내심 납득했다.

그가 찬혁 스스로에게 문제의 해결을 맡겼다는 건 그 이상 끼어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뜻일 테니까. 팀장으로서든, 교장으로서든, 혹은 어른으로서든.

자신보다 한참은 현명한 그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차윤구도 크게 할 말은 없었다. 다만 안영길의 말대로 찬혁이 자신의 문제를 잘 해결하길 바랄 뿐.

"그럼, 이만 해산하도록 할까요."

일동은 안영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년회는, 일부러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 한 해는 보내는 한 해가 아니라, 도약할 때를 기다리며 웅크릴 한 해였기에.

곧 맞이할 날에 때맞춰 뛰어오르기 위해서.

***

힘든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가 힘드냐고?

'그야, 말하지 않는 거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를 아는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알아 버린 불쌍한 미용사의 이야기.

뭐, 내 경우에는 다행히 상대의 위신을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오히려 세울 위신이 없기에 뒤끝이 강렬하리란 상상을 하면 괜히 소름이 돋는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한테는 속을 털어놓을 구덩이 같은 것도 없다.

'중국의 부정행위라…….'

아직 있는 건 심증뿐이지만, 적어도 나는 8할 이상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심증이란 놈이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게 발뺌할 수 있다는 것.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저렇게 올라와봤자 분수를 모르면 언젠가 결국 고꾸라진다. 난 그렇게 사라진 사람을 아주 많이 안다.

당장 저들의 상대가 나인 것도 아니고. 저들의 부정이 당장 나나 우리 팀에게 해를 끼치진 않는다.

다만…….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되면 다른 팀은 뭐가 되는가.

마지막 심사에서 간 조절 실패라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만 아니었어도 거의 비등비등한 실력을 과시하던 대만팀이나, 우리와 다퉈 결국 탈락한 인도팀과 프랑스팀.

자신의 꿈을 걸고 도전하여 실패한 26팀, 130명은 무엇이 되는가.

공식 대회에서 부정행위를 한다는 건 보통 깜냥으로 저지를 수 있는 짓이 아니다.

어쩌다 우연히 한 번 한 게 마침 내 눈에 딱 걸렸다? 그게 오히려 가능성이 적지.

'거 참, 실력 없는 양반들도 아니던데.'

아무리 부정을 통해 주제를 알고, 준비를 해왔어도 요리사 본연의 솜씨라는 게 어디 가진 않는다.

요리란 철저한 주관식.

아주 짧은 주관식 문제에 대해 완벽한 해답을 가져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이미 실력이 있다는 증거다. 설령 문제를 미리 알았다고 해도.

오픈북 테스트를 보는 학생이 모두 다 만점을 받을 순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여러 역사적 사건 탓에 실전됐다 하더라도 동아시아 요리 문화의 커다란 기둥인 중화요리 4천 년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진 않는다는 증거일까.

그러나, 그럼에도 이미 요리를 대하는 요리사의 정신만큼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 같단 사실에 작게 서글퍼진 마음을 감출 순 없었다.

나는 부정이 싫은 거지, 요리와 그 문화가 싫은 게 아니니까.

오랜만에 대낮부터 침대에 누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을 여러 차례의 한숨과 함께 뱉어내고 있자니 괜히 가슴에 무거운 짐을 올려두고 있는 것 같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서 벤치프레스를 하다 역기를 떨군 기분이 이럴까. 아니, 그쪽이면 가슴이 함몰돼서 죽었겠구나.

연달아 막힌 숨구멍을 헤집고 입을 채우는 한숨을 뱉어내던 그때, 닫아놨던 방문이 쿵쿵 울리며 그 너머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오빠! 밥 먹어!"

다른 누구도 아닌 여동생의 목소리였으니까. 솔직히 며칠 전이었으면 낯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집 돌아올 새도 없이 여기저기 쏘다닌 게 하루이틀이어야지.

"어, 갈게!"

…… 배고프네.

사람은 두통이 일던 고민이 많던 배는 고파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일지도. 요리사라는 건. 아까까지 고민하던 거에 비해 너무 원초적인 생각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만 튀어나왔다.

***

"엄마. 혹시 그런 적 있어요? 뭔가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을 알았는데 말할 수 없을 때."

그 말은, 밥을 먹던 중 갑자기 나온 이야기였다.

오랜만에 집에서 편한 분위기로 밥을 먹다 보니 마음이 풀려 버린 것일까.

어째서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

하면 안 됐는데. 여긴 우거진 숲도 아니고, 깊은 구덩이가 파이지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미 입에서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뭐야? 갑자기 무슨 소리래. 웬 비밀? 오빠 뭐 사고 쳤어?"

"내가 너냐."

"나? 내가 뭐 어때서!"

거칠게 항변하는 주아였지만 내가 어머니께 들키지 않도록 한 달 전을 들먹이자 입을 꾹 닫았다.

이 녀석, 저번에 미술학원에서 교육할 때 쓰는 흉상을 깨부수곤 내게 손을 벌리지 뭔가.

세상에 석고상이 그렇게 비싸단 걸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요즘은 3D 프린터로 쉽게 만든다던데, 학원비가 비싼 미술학원은 그런 걸 안 쓰나?

아무튼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괜히 어머니한테 걱정 끼치기 싫어서 내가 알아서 조용히 처리하고 왔는데 이렇게 나오면 섭하지.

덕분에 합죽이가 된 동생에게 물컵을 내밀자 굉장히 싫은 얼굴로 공손히 물을 따라준다. 옳게 된 동생이로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퍽 웃겼는지 작게 웃은 어머니는 이윽고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우리 아들이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하실까?"

"그…… 요즘 너무 어르신들하고만 같이 지내다 보니 쉽게 못 들을 이야기 같은 것도 종종 듣게 되더라고요. 근데 남한테 말하기엔 조금 민감한 주제기도 하고 하다 보니까……."

아, 참고로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교장 선생님은 기능장으로서 가끔 자격증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걸 도우실 때도 있는데, 이걸 어쩌다 옆에서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내가 지금 자격증 시험을 보겠다고 하면 시험 문제 유출로 잡혀가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니까.

'뭐, 알고 보든 모르고 보든 결과야 똑같겠지만.'

아무튼. 내 이야길 들은 어머니는 잠시 고민하시더니 날 보며 답했다.

"그런 건 보통 이야기하지 않는 게 제일이지."

"역시 그렇겠죠?"

상식적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지.

하지만 어머니는 아직 할 말이 남으신 듯 수저를 내려놓으시곤 말을 잇는다.

"그런데 찬혁아. 가끔은 비밀 같은 게 소용이 없을 때도 있단다."

"예?"

"음…… 이건 엄마가 빌딩 청소부로 일할 때 이야긴데 말이지."

어머니의 말씀은 예전 우리들을 키우기 위해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던 시절을 말하고 계셨다.

요즘에야 내가 벌어온 돈이 있고, 지금은 집에만 있기 적적하시다며 가끔 나가 친분이 있는 식당 일을 돕는 수준으로 일하시지만, 그 이전에는 하루 잠도 모자랄 만큼 일하시던 게 어머니였으니까.

"회사에서 가장 비밀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곳이 어딘 줄 아니?"

"어…… 회의실이요?"

"거기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도 가서 얼마든 이야기를 훔쳐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단다. 화장실이랑 흡연구역이야."

"아……."

"그런 곳을 청소하다 보면 되게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는데, 그중에는 남한테 말하기 힘든 이야기도 많아."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거라며, 어머니는 몰래 바람 상대에게 전화를 하던 남자 회사원 이야기나 회사 공금을 멋대로 쓰던 중소기업 사장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었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때야 누구한테 말하면 큰일 나는 이야기뿐이었지. 근데 당시에 숨긴다고 숨긴 일이 허무하게 탄로 난 적이 제법 많아. 왜 그렇게 됐을까?"

잘 모르겠어서 고개를 젓는 내게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누가 소문을 냈거든."

"예?"

"근데 그게 누군지는 몰라."

아마 시작은 청소부와 청소부 사이의 대화인 것 같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게 어느 사원에게로 전해지고, 거기서 또 사원과 사원 사이에 소문이 흐르고. 사원의 가족에게, 서로 연결점이 있던 다른 사원의 가족 사이에.

작게 굴러간 도미노가 결국 커질 대로 커져, 어느새 끔찍한 크기로 불어나 소문의 진원지를 덮친 이야기.

"누군가는 숨기려고 생각해도, 언젠가는 새어 나갈 수밖에 없는 비밀도 있어. 그렇게 되면 비밀로 하고 싶었던 사람만 뒤집어쓰는 거지. 소문이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거든."

아마 자기처럼 소문의 시작점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라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괜히 소문의 주동자로 몰려 덤터기를 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라며 어머니는 웃었다.

묘하게 노하우가 깃든 어머니의 과거사에 굳은 웃음을 짓던 내 머리에 한 가지 발상이 스친다.

'어라? 이거…….'

잘 하면, 이 일화를 그대로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촉이 왔다. 그것도 상당히 날 선 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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