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남동풍.-4-
후르츠 파우더라는 물건이 있다. 우리말로 대충 치환하면 과일분말일까.
이름 그대로 과일을 분말 형태로 만든 것으로, 보통 일반 소비자는 흔히 보기 힘든 식재료 중 하나다.
어째서 그러느냐면, 일단 상품 자체가 크게 사업성이 없다.
보통 과일분말은 과일을 건조기로 말려서 분쇄하여 가루로 만들어야 하는데, 일단 이 시점에서 제법 커다란 비용이 들어간다.
제대로 된 설비가 없으면 건조 작업 중 일어날 수 있는 부패를 감당하기도 힘들고, 어떻게 잘 됐다 쳐도 품질검사 기준을 맞춰가며 빡빡하게 팔아야 하니까.
과수원 입장에서야 중간업자한테 서로 비슷한 가격으로 과일을 판다 쳐도, 소비자 입장에선 중간에 무언가 낄 때마다 구매 비용이 늘어나니 소비자 입장에서도 굳이 이걸 사먹을 메리트가 없다.
뭣보다 과일을 사먹을 거면 그냥 싱싱한 걸 먹지 굳이 말려서 가루를 낸 걸 먹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 후르츠 파우더라는 상품 자체는 개발된 뒤로 그다지 커다란 변화 없이, 수십 년 동안 만들던 방식이 그대로 고착된 물건이었지만…….
'요즘은 사정이 좀 다르지.'
액체질소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분야. 흔히 말하는 분자요리의 개발로 후르츠 파우더의 세계는 커다란 변혁을 맞았다.
기존에 사용되던 방식은 과일을 말린 뒤 분쇄하여 가루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방식에는 장단점이 뚜렷하다.
수분이 사라지면서 맛이 응축되고, 보다 강한 과일의 풍미를 다이렉트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일단 한 번 분말로 만들어두면 보관 여하에 따라 제법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단 것이 장점.
단점은 만들 때 꽤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든다는 것.
그런데 액체질소를 사용한 방법은 다르다.
우선 적당히 조각낸 과일을 액체질소로 꽁꽁 얼린 뒤, 그걸 푸드 프로세서나 블렌더 따위를 사용해서 간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분쇄하는 과정에서도 기계의 동작과 마찰에 의한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분쇄 과정 중에 과육이 녹아 분말이 아니라 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액체질소를 계속 부어가며 갈아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프로즌 후르츠 파우더는 상기한 건조법으로 만든 파우더와는 딱 반대되는 장단점을 갖는다.
고작 몇 분이면 만들 수 있고 비용도 그렇게 많이 들지 않지만, 드라이 타입보다는 조금 더 맛이 옅다.
'그래도 드라이 타입하고 비교해서 옅은 거지, 그냥 원상태보다는 훨씬 맛이 진하게 느껴지니까.'
분쇄하여 혀에 닿는 면적이 넓어진 만큼 맛 또한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단점은 최소화하고 장점을 거의 똑같이 보존한 이 방법은 많은 매장에서 드라이 타입의 대체제가 됐다. 물론 뜨거운 음식에도 뿌려서 먹을 수 있고, 상온에 놔둬도 열화가 없는 드라이 타입은 그것대로 자주 쓰였지만 말이다.
이 프로즌 타입이 특히 자주 쓰인 곳은 이런 차가운 디저트였다.
간단한 시판 바닐라 아이스크림에만 뿌려먹어도 전혀 다른 맛을 연출하는 마법의 가루─
…… 아니, 그런 이름을 붙이니까 어째 영 좋지 않은 이미지만 떠오르긴 하는데. 아무튼 내가 만드는 건 그런 물건이었다.
자두는 껍질 채로 분쇄하면 아주 아름다운 자주색을 띈다. 흔히 자두맛 사탕 같은 거에 쓰이는 그 색 맞다.
바나나는 당연히 껍질 없이 분쇄해야 하지만, 신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달달함이 포인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
"…… 이게 잘 통해줘야 하는데 말이야.'
마치 말리기 전의 대추처럼 생긴 과일을 분쇄한 붉은색 가루를 본다.
나도 시간이 부족해서 이 녀석의 효능을 제대로 검증할 틈이 없었지만, 일단 지금은 서두를 수밖에 없다.
아주 작은 입자 단위로 분쇄된 가루는 사람의 체온에도 금세 녹기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으니까.
우선 내 디저트의 기본 모양은 원기둥 모양의 탑이다.
커피 쿠키 레이어 위에 같은 원판 모양으로 틀을 잡은 레몬 소르베를 올리고, 그 위에 후르츠 파우더를 뿌린 뒤 사과 소르베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올린다.
이렇게 반복해서, 총 4층으로 완성된 소르베 타워.
위에서부터 연두색, 흰색, 연노랑색, 커피색의 층이 있고, 각각의 층은 저마다 다른 빛깔을 뽐내는 후르츠 파우더로 구분된다.
가장 위의 메론 소르베는 바나나 파우더와 메론의 깊고 풍부한 단맛.
그 아래 사과 소르베는 자두 파우더와 합쳐져 눈이 번쩍 떠지는 새콤달콤한 맛.
레몬 소르베는 설탕을 넣지 않은 만큼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신맛이 강조됐고.
마지막 커피 쿠키가 씁쓸하고 고소한 짠맛으로 포인트를 주게 된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수준의 디저트 전문 매장에서 파는 시그니처 메뉴가 될 수 있겠지만, 당연히 그 정도로 끝낼 순 없지.
지금 내가 선 곳은 괜찮은 수준의 레스토랑을 가리는 곳이 아닌, 세계최고를 논하는 자리니까.
언뜻 보면 외관과 맛이 일치하는 듯 보이는 내 소르베 드 투르Sorbet de tour.
그러나 그 정체는 먹는 순간 깨닫게 되겠지.
내 요리는, 심사단의 입속에서 변신하는 요리라는 사실을.
***
"조리 완료오오!! 한국팀이 조리 완료를 선언합니다! 시합 개시 후 30분! 8기통 엔진도 깜짝 놀랄 엄청난 속도로 달린 한국팀이 먼저 심사대로 향합니다!"
시합개시 후 30분만에 요리를 완성한 한국팀의 놀라운 속도에 MC와 관중이 경악한다.
아까 개인전만 하더라도 두 사람의 요리가 완성된 건 대략 한 시간 전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 가지의 요리를 그 절반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완성하다니?
요리하는 과정을 전혀 못 보았더라면 차라리 날림으로 요리했다며 야유라도 했겠으나, 한국팀의 귀기어린 요리 과정을 본 이상 그런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나 예전에 들었어. 한국 사람들은 빠른 걸 엄청 좋아한대."
"내가 아는 한국애도 제일 싫어하는 게 엘리베이터 닫는 버튼 안 누르는 거였어."
"그래서 저렇게 빠른 건가?"
인도팀이 요리를 만드는 속도도 분명 상당히 빨랐으나 그조차 한국팀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추측을 더해가며 지금의 상황에 이유를 붙이기 바빴다.
그러나 그들이 이유를 붙이건 말건 한국팀의 요리가 이미 완성된 건 사실이었고, 그 사실에 압박을 받는 이 또한 분명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중 대표적인 이는 인도팀의 요리사들이었지만.
"세상에, 벌써……."
"어떻게 저렇게 빠르지?"
한국팀의 속도에 충격을 받은 팀원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 란초가 그들을 닦달했다.
"저쪽은 신경 쓰지 말고 너희 할 거나 똑바로 해라. 요리 좀 빨리 한다고 대수더냐? 음식은 무조건 빠르다고 최고가 아니야. 그럴 거였으면 우리 요리 중 가장 뛰어난 건 난이었을 거다! 잡담하지 말고 자기 일에 집중해!"
"네, 넵!"
"알겠습니다!"
"하여튼……."
난처한 얼굴로 한국팀에게서 눈을 돌리는 제자들을 보며 란초가 인상을 구긴다.
제 실력의 전부를 온전히 담아내더라도 확실히 이길 보장이 없는 상대인데,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
하지만, 그럼에도 란초 또한 제 시선이 한국팀을 향하는 걸 채 막진 못했다.
사실 그도 한국팀이 이토록 서둘러 요리를 완성한 것에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제법 있었다.
딱히 속도에 놀랐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들도 속도에 치중한 메뉴를 골랐다면 오히려 그들보다 빨리 요리를 완성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다만 그가 걸리는 건, 어째서 저들이 저토록 극단적일만큼 빨리 요리를 완성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요리라는 건 반드시 조리에 소요되는 시간이 있다. 사람이 서두른다고 물이 빨리 끓어주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급하다고 고기가 금방 익지도 않는다.
빨리 완성된 건 빨리 완성될 요리를 했기 때문. 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이렇게 빨리 완성될 요리를 골랐는가. 그냥 빨리 심사를 받기 위해서?
'아니, 그건 아니겠지.'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요리를 빨리 완성한 목적. 어째서일까? 란초의 머리가 재빨리 회전하기 시작한다.
빠르다는 건 상대적인 개념이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행인이 땅을 기는 굼벵이보다는 빠른 것처럼 '빠르다'는 개념 옆에는 그보다 '느린'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경우, '무언가'란…….
'…… 우리로군.'
란초는 대회가 시작되기 전 수집했던 상대팀의 정보에서 이 상황에 알맞은 것을 추려내고, 또 추려냈다. 결과, 그에게 남은 키워드는 한 가지였다.
'류찬혁.'
그는 웹플릭스로 방영된 예선전에서도, 이전 했던 16강전에서도 상대팀의 요리와 엮였을 때 생기는 이득을 중요시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
예상컨대, 그들은 자신의 심사 자체보다는 자신들의 심사를 통해 인도팀에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속셈으로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듯했다.
"오호라."
그걸 알았다면, 굳이 그 계략에 어울려줄 필욘 없겠지. 란초 입장에선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이 심사엔 뚜렷한 시간제한이 없었다.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은 제법 많고. 란초 또한 그에 맞춰 여유를 두고 조리를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팽팽 돌아가던 머리의 RPM을 살짝 낮춘 란초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일렀다.
"얘들아. 조금 속도를 늦춰라."
"예? 하지만 셰프, 저쪽은 벌써 심사를……."
"됐으니까 늦춰! 시간은 우리 편이다."
"…… 예, 셰프."
란초의 지시에 분주히 움직이던 인도팀의 손이 차츰차츰, 그러나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느려진다.
'이 속도로 조정하면…… 대충 30분 뒤에 끝나겠군.'
30분 뒤, 반격의 포문을 연다. 란초는 그렇게 다짐하며 심사대를 바라보았다.
심사대 위에서는 벌써 두 요리의 심사가 끝나고, 마지막 접시가 심사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찬혁이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 만든 요리.
과연 저 요리에 어떤 함정을 숨겨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티를 팍팍 내는 함정에 쉽게 당해줄 호락호락한 놈으로 보였다면 큰 착각이다.
'좀 더 경험을 쌓고 와라.'
란초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
한국팀의 요리는 총 세 가지였다.
관자를 살짝 데쳐 바로 얼음물에 담가 식힌 뒤, 식초와 소금, 설탕, 레몬 제스트 및 몇 가지 향신로로 절인 숙회를 얇게 썰어 중화식 매콤한 소스를 곁들여 먹는 관자 숙회.
오리뼈로 우린 국물을 빠르게 식혀 최대한 기름을 걷어내고, 그것에 곱게 간 들깨를 듬뿍 넣은 국물에 오리고기, 생강, 파, 마늘, 연근 등을 넣어 반죽한 완자를 삶아 넣은 오리완자 들깨탕.
그리고 마지막으로 찬혁이 준비한 소르베 드 투르.
퓨전 애피타이저에, 전통 한식으로 만든 메인에, 디저트는 프렌치.
중구난방한 조합이란 실로 이런 걸 뜻하지 않을까 생각한 찬혁이었지만, 일단 결과만큼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아주 좋아.'
정말로, 찬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두 가지 요리만 심사를 받은 상황이긴 하나 차윤구와 유동건, 안영길과 이영율은 각자 파트를 짜서 서로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솔직히 그 짧은 시간만에 이만한 결과가 나오리라곤 찬혁도 생각하지 못했다. 상정 이상의 활약을 해준 데에 찬혁은 그저 감사를 표할 뿐이었다.
마지막 차례인 디저트의 심사.
찬혁은 아직 뚜껑이 덮인 은쟁반을 심사단 앞에 늘어놓았다.
"디저트, 소르베 드 투르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뚜껑을 열자마자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새하얀 연기.
마치 찬혁이 처음 액체질소를 꺼낼 때와 비슷한 모양새였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이었다.
"오, 이건……."
"드라이아이스로군요."
녹을 때 물이 되지 않는다 하여 건조한 얼음. 드라이아이스.
그것이 마치 자갈밭의 자갈처럼 은쟁반 위를 덮고 있었기에 생긴 연기.
드라이아이스 판 위에 자리한 동접시 위로 여전히 아름다운 모양새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찬혁의 소르베가 있다.
보온과 연출을 동시에 노린 찬혁의 연출에 감탄의 박수를 친 심사단이 시식을 시작한다.
"과연 겉보기만큼 맛도 대단할지…… 그럼, 시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심사단은 가장 먼저 각각의 층을 따로따로 시식했다. 명백히 색이 다른 소르베. 입속에서 골고루 뒤섞였을 때의 맛을 면밀히 분석하려면 우선 각각의 맛을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했기에.
"음! 아주 잘 만든 소르베에요! 우유나 크림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는데 혀에 닿는 텍스쳐가 이토록 부드럽다니! 과즙의 향과 감미료가 서로 잘 어우러진 맛입니다."
"이 가루…… 이건 후르츠 파우더군요! 드라이 타입이 아니라 액체질소로 만든 프로즌 타입…… 드라이가 아닌 덕분에 소르베와 함께 먹어도 이질감이 거의 들지 않아요!"
각각의 맛을 확인한 심사단이 웃음을 머금으며 서둘러 숟가락을 놀린다.
"후르츠 파우더와 소르베의 조합도 대단해요. 강점을 부각하고, 지루함을 날려줍니다. 특히 신기한 건, 이 레몬 소르베에요!"
"오. 저도 마침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분명이 처음 먹을 땐 너무 셔서 저도 모르게 뱉을 뻔했거든요. 근데 다른 것과 함께 천천히 녹이면서 먹고 있자니 점점 맛이 변해요."
"혀를 대기도 힘든 신맛에서 아주 풍미가 깊은 단맛으로…… 이건 대체 어떻게 한 건가요? 오렌지 맛도 같이 느껴지기에 혹시 내부에 다른 층이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고……."
이 시점에서, 찬혁은 웃었다.
여태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던 그의 책략이 지금 이 순간 제대로 먹혔음을 깨달았기에.
"죄송합니다. 그건 비밀이라서요. 디저트는 만족스러우셨나요?"
찬혁의 짓궂은 웃음과 함께 건네진 대답에, 심사단은 한 몸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혀에, 찬혁의 마법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