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40화 (340/403)

340. 남동풍.-3-

"!"

액체질소!

뭇 등장과 함께 행사장의 이목을 휩쓸어 버린 기물의 등장. 란초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모처럼 기싸움에서 이기나 싶더니만.'

란초는 현재 자신의 팀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단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수백의 요리사를 진두지휘한 경력이 무려 수십 년. 고작 손 하나로 헤아릴 수 있는 팀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 따위,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금방 어수선한 분위기를 잠재우며 노쇠하지 않은 통솔력을 과시했을 란초였지만, 지금만큼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앞서 언급한 뛰어난 통솔력이 성립되게 만드는 가장 뛰어난 근거는 다름 아닌 란초 본인. 그라는 요리사가 자신들의 뒤를 받쳐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가장 큰 자부심이다.

강력한 초인 한 사람이 이끄는 집단의 구심력은 어지간한 외부의 간섭으로는 결코 쉽게 깨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심점 자체가 흔들리면, 집단 또한 함께 흔들리고 만다.

힘차게 돌아가는 팽이.

설령 잠시 힘을 잃고 기울어지더라도 그 첨단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회전한다. 그러나 한 번 균형을 잃은 팽이는 다시 힘을 불어 넣어주지 않는 이상 점점 기울어질 뿐이다.

절대적 신뢰의 상징이자 구심점이던 란초의 패배에 그들의 팽이는 이미 기울어졌다.

이를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선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주어야 한다. 란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체력이 소진되는 것마저 감소하고 격렬한 퍼포먼스 대결을 펼친 것이다.

적어도 기세에서 이기고 들어가면 이 이상 팽이가 기울어지는 건 막을 수 있을 것이었기에.

실제로 그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란초 본인이 이 한 경기에 모든 것을 불사를 기세로 임하자 그를 따르는 이들도 잠시 동안은 1라운드의 패배를 잊은 듯 전력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간신히 일으킨 파도에 제대로 몸을 싣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몰려온 더더욱 큰 파도가 이쪽을 덮치고 말았다.

"저,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지금 한국팀에서 준비한 재료는 액체질소! 액체질소입니다! 한국팀의 찬혁 류 선수가 액체질소를 사용한 요리를 선보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상대 중에서 가장 성가신 인물이 일으킨 파도가.

어린나이와 아직 보잘것없는 경력. 그러나 그에 반비례하는 일신의 능력.

이런 부류의 적이 가장 곤란하다. 이겨서 얻을 건 없는 주제에 지면 온갖 것을 잃는다.

제 몸집을 줄이고, 상대가 자신을 얕보게끔 가장한다.

그러나 그 유혹에 넘어간 순간 바로 뎅강.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자라처럼 목을 길게 뺀 상대를 내리칠 서슬퍼런 단두대가 상시 대기하는 끔찍한 덫.

기초, 발상, 멘탈. 어느 것 하나 얕잡아 볼 수 없는 상대를 바라보는 란초의 눈이 경계심을 품고 번뜩인다.

그 시선의 저편. 낑낑대며 액체질소를 사용할 준비를 끝낸 찬혁이 조리복 소매로 땀을 훔치며 웃었다.

"이쪽도 슬슬 시작해볼까."

이 시합 최고의 요주의 인물, 류찬혁이 드디어 본색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

'좋아, 한 번 기세는 꺾었다.'

할리우드 액션을 한 보람이 있구만.

'시설장비 담당자가 보면 간이 떨어지겠지만…….'

망가지지만 않으면 됐지, 망가지지만 않으면.

일부러 스테이지가 울릴 정도로 과장되게 내려놓은 액체질소 보관용기를 옆으로 끌며 나는 상대팀의 안색을 살폈다.

"흐음……."

이쪽을 보는 듯 안 보는 듯 눈알을 굴리는 사람 몇 명.

그리고 경계심 가득한 날카로운 눈으로 보는 사람 한 명.

'역시.'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리더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구나. 전의로 충만한 란초 셰프의 반응에 오히려 내 입은 미소를 그렸다. 그래. 당신만은 흔들리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작전이 제대로 안 통할 테니까.'

이 작전은 란초 셰프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을 때에 가장 큰 의미가 있거든.

아무튼, 이야기를 돌려서.

과장을 좀 하긴 했어도 옮기는 데에 제법 힘이 들었을 만큼 묵직한 액체질소.

액체질소 자체의 무게는 물보다 살짝 가벼운 정도지만 보관용기가 워낙 무거워야지.

총 중량이 30키로 가까이 되는 통을 적당히 쓰기 편한 자리에 옮겨놓은 뒤 나도 내가 맡은 역할을 마무리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사실 나나 사회자가 오버를 떨긴 했지만, 액체질소라는 건 생각보다 특이한 재료가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조리도구라고 해야 할까. 저걸 직접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지구상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화학물질 중 두 번째로 차가운 물질.

-196도의 끓는점을 가진 그 액체는 자칫 몸에 닿았다간 사람의 신체가 괴사할 정도의 동상을 유발한다.

말만 들으면 엄청나게 위험한 물질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게 웬일. 액체질소란 놈은 의외로 굉장히 안전한 화학물이기도 하다.

독성 기체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불이 붙어서 폭발하는 것도 아니고, 처리하기 힘들지도 않고, 보관이 엄청나게 까다로운 것도 아니다.

오죽하면 개인판매가 자유로운 화학물일까. 심지어 액체질소는 엄청나게 값이 싸다! 보관용기가 더럽게 비싸서 그렇지.

안정성. 그것이 바로 요리사들이 액체질소에 눈독을 들이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고, 그 결과 액체질소는 지금도 수많은 업장에서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소비되고 있다.

값이 나간다 싶은 파인다이닝 중에서도 최신 조리기법을 꺼리지 않는 주방이라면 대부분 사용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액체질소로 요리를 만드는 걸 자주 볼 수 있단 뜻은 아니지만.'

액체질소 조리는 제법 최신 조리기법인 만큼 기술이 정형화되지 않았다. 요컨대 식당의 비법 같은 거라 이거다. 비법을 죄다 공개하고 다니는 식당이 어디 있을까.

흔히 TV 요리 프로그램에서 '알려줘도 못 하니 공개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도 어느 수준을 넘어가면 단순한 식당의 비법 수준을 넘어서 한 기업의 기밀사항이 된다.

뭣보다 이 액체질소란 놈이 화학물질 중에선 아주 안전한 편에 속하는 물건이라곤 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괜히 퍼트린 조리법을 누가 집에서 따라 하다가 몸이 상하기라도 하면 찝찝하지 않겠는가.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 딱히 액체질소 조리에 통달한 건 아니지만.'

액체질소로 만든 요리 같은 걸 호텔에서 만들 리가 있나. VVIP 고객을 위한 룸서비스 디저트를 만들 때나 가끔 썼지.

여기까지 들으면 눈치챘겠지만…… 그래. 나는 이 액체질소로 아이스크림을 만들 생각이다.

단순히 아이스크림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상당히 고급스런 물건이 될 테지만, 아이스크림이 아이스크림이지 뭐.

액체질소로 아이스크림을 만들겠다는 게 내 작전이었냐고?

으음…… 비슷하긴 한데 조금 틀리다.

액체질소를 쓰는 건 어디까지나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데에 이만한 방법이 없으니까. 겸사겸사 임팩트를 줘서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도 노리긴 했지만.

다른 방법이 있고, 그쪽이 편했더라면 그걸 썼겠지.

액체질소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그건 바로 아이스크림 그 자체다.

***

찬혁이 만들려는 음식은 아이스크림이었지만, 보다 정확한 명칭을 말하자면 소르베Sorbet라는 이름의 디저트였다.

소르베란 셔벗sherbet의 프랑스어로, 본질적으로는 셔벗과 소르베 사이에 차이점은 없다.

다만 지역에 따라 셔벗과 소르베는 유제품을 함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구분하는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찬혁이 만드는 건 앞서 말했다시피 후자.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은 소르베.

찬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르베를 만들 베이스 액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냄비를 세 개씩이나 준비한 찬혁은 각각의 냄비에 물과 설탕, 그리고 소르베를 위한 몇 가지 식재료를 추가로 넣은 뒤 불에 올렸다.

"……."

다만, 그 냄비 중 하나에는 균일한 입자 형성을 돕기 위한 젤라틴을 약간 넣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뒤. 찬혁은 메론과 사과, 레몬을 알맞은 크기로 잘라 한창 끓어오르는 냄비 속으로 집어넣었다.

레몬이 들어간 곳은 설탕이 담기지 않은 냄비. 오로지 신맛 하나만을 강조하기 위한 소르베를 만들기 위한 안배다.

과육은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설탕물 속에서 마치 잼을 만들 듯 약한 불로 졸여진다.

그리고 과육이 적당하게 풀어진 그 순간. 과일의 맛이 가장 온전히 배어나온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찬혁은 핸드블렌더를 이용해 각 냄비의 내용물을 곱게 갈았다.

원형을 유지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걸쭉하게 갈린 이 액체가 바로 찬혁이 만들고자 한 소르베 베이스였다.

소르베 베이스에 식용색소를 살짝 첨가하여 색을 입힌 찬혁이 뒤이어 얼음을 띄운 찬물에 냄비를 중탕하여 베이스의 온도를 식힌다.

그렇게 소르베 베이스가 적당한 온도로 식는 동안에도 찬혁이 할 일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찬혁은 숨 돌릴 새도 없이 다음 준비에 착수했다.

재료 중 하나인 무미無味에 가까운 비스킷. 그것을 푸드 프로세서로 곱게 갈아낸 뒤 앞서 우려낸 인스턴트 에스프레소로 적시고, 마치 반죽하듯 모양을 잡아 오븐에 짧게 굽는다.

그러면 짠.

이렇게 단순한 두 가지 재료가 순식간에 커피의 향과 풍미를 가득 담은 도톰한 원판모양 쿠키로 재탄생한다.

'원래는 조금 더 신경 써서 만들고 싶은데…….'

이것은 찬혁이 티라미수를 만들 때 가끔 쓰던 꼼수 중 하나였다. 티라미수의 가장 하단을 맡는 커피 쿠키 레이어를 아주 짧은 시간 만에 만들어내는 조리법.

그만큼 맛은 살짝 떨어지지만, 만드는 데 드는 노력과 시간, 재료값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가성비의 왕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커피 쿠키를 완성한 뒤, 찬혁은 아까 식혀놓기 시작한 소르베 베이스를 확인했다.

"좋아. 이 정도면 딱 괜찮은 온도다."

그리고 드디어, 관객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액체질소의 차례가 찾아왔다.

세 개나 되는 반죽기를 설치한 찬혁은 각 반죽기의 보울 안에 한 차례 식은 소르베 베이스를 따른다.

─딸깍! 위이이잉!

"파워 좋고!"

우렁찬 모터 소리와 함께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는 반죽기의 거품기 헤드. 끈적한 소르베 베이스를 거침없이 휘젓는 거품기 헤드가 액체 속에 조금씩 공기를 섞어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저 공기를 주입하기만 해선 아이스크림이 될 수 없는 법.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액체질소가 활약할 때!

"와, 저거 봐봐."

"불도 안 닿았는데 끓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두꺼운 단열재로 만들어진 보호용기라는 알을 깨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액체질소. 차가운 철제 냄비 속에서 저 혼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액체질소는 냄비의 테두리를 넘어 찬혁의 발밑에까지 하얀 연무를 드리운다.

씨익.

얼굴에서 두 뼘이 넘게 떨어져 있음에도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 드라이아이스보다 배는 차가운 액체질소의 냉기에 찬혁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진다.

"간다!"

"너, 넣었습니다! 한국팀 류찬혁 선수! 열심히 돌아가는 반죽기 속에 액체질소를 붓습니다!"

액체질소의 사용법은 실로 간단했다.

그저 거품기가 휘젓고 있는 소르베 베이스 위로 그냥 부어 버리는 것!

액체질소는 그렇게 사용하면 충분한 물체였다.

영하 196도에서 끓는다는 건, 상온에서는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기체로 변한다는 뜻.

그 어떤 유독한 물질도, 자신이 있었단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것이 바로 액체질소의 좋은 점이었다.

'아, 그래도 아무 흔적도 안 남는 건 아니지.'

액체가 기화하기 위해 주변에서 열을 뺏어가며 생기는 극한의 냉기와 새하얀 연기.

그 속에서, 처음에는 단순히 끈적한 액체에 불과한 소르베 베이스는 점점 소르베 자체로 변하기 시작한다.

액체질소 통을 갖고 나왔을 때도 충분히 눈길을 끌었던 찬혁이었으나, 스테이지 바깥 관객석에까지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선 이미 그 이상이었다.

마치 요리대회장이 콘서트장이 된 것만 같은 눈의 착각.

이 연출에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관객은 없었다.

"와하하하! 좋다, 꼬마야! 더 해! 확확 뿌려 버려!"

"여기도! 이쪽으로도 연기 좀 보내줘!"

환호의 도가니. 제대로 무엇을 하나 시인하기도 힘든 하얀 안개는 찬혁이 자리한 조리대와 그의 반신半身을 가릴 지경이 돼서도 멈추지 않는다.

'지금이다.'

이때, 연무 사이에서 오롯이 선 찬혁의 모습이 연기에 가려진 그 순간, 찬혁이 갑작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해 둔 몇 개의 철그릇.

그 속에는 적당한 크기로 잘린 과육이 담겨 있었고, 찬혁은 그곳에도 액체질소를 아낌없이 붓기 시작했다.

-196도의 온도에 순식간에 얼어붙는 과육. 세포의 손상을 최소화하여 최대한의 맛을 보존하는 급속냉동법.

새하얗게 서리가 낀 과육을 바라보며, 찬혁이 낮게 웃는다.

"이거지."

여기 담긴 과일이야말로, 찬혁이 감춘 최고의 노림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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