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 남동풍.-2-
냉식Cold meal. 한글로 풀어 적자면 찬 음식을 뜻하는 말.
정말 딴 거 없이 차가운 음식을 뜻하는 말이다. 더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조리 중 열을 가하지 않았거나, 가하더라도 음식이 제공되는 온도가 체온 이하 어쩌구저쩌구 하는 복잡한 설명이 가능하긴 하지만 굳이 지금 찬 음식의 사전적 의미를 논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시험 보는 것도 아니니까.'
찬 음식의 정의에 대한 강의 시간은 다음에 갖도록 하고, 중요한 건 이거다.
이게 어째서 우리에게 남동풍이 되느냐.
과연 찬 음식이라는 주제가 적벽을 불사를 힘이 있느냐.
나는 그 의문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건 어째서인가. 냉식이 그렇게나 인도에는 불리하고 한국에는 유리한 주제이기 때문일까?
아니. 그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한국이나 인도나 메리트를 볼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해야 할까.
'더 정확히는 둘 다한테 불리한 주제지.'
어째서냐고? 그건 다름 아닌 찬 음식이라는 요리의 특수성 때문이다. '종류의 풀이 너무 좁다'는 특수성.
이쯤 되면 의아하게 생각할 법도 한 것이, 세상에는 제법 많은 종류의 찬 음식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익숙한 냉면이나 냉국수 같은 면류, 오이미역국이나 동치미 같은 국류, 육회나 냉채족발 같은 육류, 해산물 숙회, 물회 같은 생선류 등등.
만들 수 있는 찬 음식의 종류를 전부 합치면 그 종류는 물경 수백을 가뿐히 넘어가겠지.
그렇게 다양한 음식을 두고 어떻게 '풀이 좁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느냐. 그건 바로 찬 음식이라는 주제에는 요리사라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메인급의 부재.'
그렇다. 이게 바로 찬 음식의 단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메인급 요리란 보통 아주 무거운 맛을 가진 요리다.
예를 들어 스테이크처럼 앞서 먹은 애피타이저 따위의 요리를 단박에 잊게 만드는 경험을 선사하는 요리.
그런 맛을 연출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누름돌처럼 다른 맛을 짓누를 수 있는 묵직함이 필요한 법.
그러나 찬 음식에는 그 묵직함이라는 요소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당연한 거지.'
어째서 찬 음식 중에선 묵직함을 가진 메뉴가 부족할까? 그건 바로 요리를 개발한 이들 중 굳이 찬 음식에 묵직함이라는 요소를 넣으려 시도한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메인이 필요하면 뜨거운 음식을 만들면 되니까.'
인간의 식사가 어째서 화식火食을 중심으로 발달했는지 아는가?
멀리 갈 필요도 없다. 그 편이 더 맛이 좋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의 식재료가 가진 온갖 맛 중 가장 진하고 길게 남는 맛은 다름 아닌 지방의 맛.
식재료에 담긴 지방의 맛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먼저 열을 가해 지방을 녹여 맛의 수용과 영양의 흡수가 더욱 빨라지게끔 만들어야 한다.
당연한 결과로 찬 음식에는 그런 효능이 없다.
잘 구운 삼겹살과 차게 식은 삼겹살을 생각해보라. 잘 구운 삼겹살은 쫄깃한 육질과 고소한 지방의 맛이 일품이지만, 한 번 구웠다가 차게 식은 삼겹살 따윈 질기고 퍽퍽해서 먹을 게 못 된다.
단순히 굽는 과정을 거치기만 해도 요리의 퀄리티가 이만큼이나 달라지는데, 사람들이 왜 굳이 차가운 메인 요리 따위를 개발하려 노력하겠는가.
'반드시 차가운 요리로 메인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래. 꼭 지금의 나처럼.
"하아…… 그래 뭐, 이 정돈 그러려니 싶지만……."
메인급 요리를 만들기 힘들단 문제 정도야 그리 대단한 축에도 못 들지. 그쯤은 우리 다섯이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면 금방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정말 큰 문제는 그게 아니야."
찬 음식이 가진 또 다른 치명적인 단점. 그걸 어떻게 공략하느냐에 따라, 이 시합의 승패가 정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참 다행이지."
그리고 나는, 그 공략법을 이미 도출한 지 오래였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참 뻔해서 말이야."
***
드디어 울린 개막의 종.
마이크를 통해 스피커로 증폭되어 행사장 전체를 휩쓰는 공의 청량하고도 날카로운 소리에 발맞춰 열 명의 요리사가 동시에 스테이지로 뛰쳐나간다.
망설임 없는 발걸음. 이미 이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모든 과정을 계획했기에 보여줄 수 있는 과감함.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행하는 프로 셰프들의 몸놀림은 프로 운동선수에 비견될 만큼 재빠르다.
생선 한 마리와 새우 한 대야가 5분도 안 되어 해체가 끝나고, 조리대를 가득 채웠던 야채는 손질이 끝난 순서대로 삽시간에 모습을 감춘다.
세계 최고봉의 자리를 다투는 셰프들.
그런 이들이 싸우는 이곳은 말 그대로 초인들의 제전이 벌어지는 곳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오로지 요리 생각만으로 머리가 가득 찬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의기양양하고, 또 누군가는 침착하고, 다른 누군가는 주저하는.
그리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그 남자, 유동건은 시합이 시작하기 직전 있었던 일 탓에 머리 한구석이 복잡했다.
***
"선생님. 셰프님들. 하나만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찬혁의 말이었다.
"이따 있을 시합. 한 접시는 저 혼자 담당하고 싶습니다."
그냥 말도 아니고. 상당히 파격적인 말이었다.
"아니, 있잖아. 갑자기 말하려면 설명을 먼저 좀 해줬으면 하는데."
"죄송해요. 저도 다 설명을 드리고 싶은데 이제 막 머리에서 작전이 세워지기 시작했거든요. 부탁드릴게요. 한 번만 믿어 주세요."
당혹감에 젖은 유동건의 질문에도 찬혁의 대답은 같았다.
"믿는 거야 항상 믿고 있지만 말이다……."
유동건의 말은 진심이었다. 적어도 시즌2에 새로 합류한 삼인방 중 객관적인 실력을 따지면 찬혁의 평균치가 가장 높다는 것을 아니까.
그런 것이야 함께했던 예선전이나 본선 16강전에서도 충분히 실감한 사실이었다.
찬혁이 확신을 갖고 무언가를 하겠다 한다면, 유동건 또한 그 무언가에 같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 좋습니다, 찬혁 학생. 뭔가 생각이 있는 거죠?"
그리고 그것은 한국팀의 다른 인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안영길의 이 대답이다.
찬혁과 직접적인 교류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영율조차, 류찬혁이라는 소년이 결코 빈말을 할 사람이 아니란 걸 한 달간의 교류로 깊이 깨우쳤기에.
그들이 보내는 확고한 신뢰에, 찬혁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작전이 있어요."
"좋아요. 그럼 우리가 뭘 해줘야 하나요?"
"두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 부탁이란…….
***
"하나. 애피타이저와 메인을 부탁드리되, 궁합을 지키는 선에서 최대한 맛있는 요리를 만들 것."
우선, 유동건이 생각하기에 찬혁의 첫 번째 부탁…… 아니, '지시'는 그들이 당연히 해내야 할 지상과제였다.
무어라 이름을 바꿔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요리 시합. 맛없는 음식을 심사에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어째서 애피타이저와 메인이냐는 것.
그 두 가지를 맡겼다는 점에서 유동건 본인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한 가지. 찬혁이 만들고자 하는 메뉴가 디저트라는 것 정도다.
'처음 메뉴를 맡겨달라고 할 때는 메인이라도 달라는 걸 줄 알았는데…….'
디저트는 분명 빠트릴 수 없는 요소긴 하지만, 그토록 결연하게 부탁해야 할 메뉴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렇진 않다는 것이 유동건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 생각해봤자 어쩔 수 없는 일.
찬혁의 요청에 따라 그들은 전채에 둘, 메인에 둘로 나뉘어 요리에 임하고 있었다.
그중 유동건이 맡은 역할은 전채. 같은 신참인 차윤구와 함께였다.
'팀을 갈라서 운용해야 하게 되면 이렇게 나누자!'라는 약속대로 갈라진 팀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유기적으로 제 능력을 발휘한다.
강화합숙 때부터 대비해온 그들의 노력은 이런 사소한 점에서도 그 성과를 선보였다.
'우리가 만들 건 중화 소스를 곁들인 관자 숙회. 그리고 안영길 대가와 영율 형님이 맡은 메뉴는 오리완자 들깨탕.'
예상 조리시간은…….
"30분. 30분 안에 끝내자."
"예."
단 30분. 그 안에 그들은 모든 메뉴를 완성할 생각이었다.
너무 성급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얼핏 든 유동건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찬혁의 두 번째 지시였기에.
"또 하나는, 요리를 최대한 빨리 완성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반드시 인도팀보다 빨리 요리를 제출할 수 있도록요."
어째서 인도팀보다 먼저 요리를 제출해야 하는가. 유동건은 그 자세한 내막까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게 찬혁이 만들 디저트와 큰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아마 우리들의 심사보다 인도팀 쪽에 영향을 주는 일이겠지.'
요리대회. 특히 이렇게 경합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대회에 출전한 경험이 적은 유동건이었으나 예선 최종전 때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만든 요리가 다른 사람의 심사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은 좋은 영향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악형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그걸 반대로 말하자면, 그들이 만든 요리 또한 상대팀의 심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때는 다른 두 팀의 요리를 먼저 먹고 미각이 둔해지는 걸 역으로 이용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이쪽의 요리를 통해 인도팀의 심사에 무언가 영향을 끼칠 셈이다.
유동건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렇다면 이쪽이 해줄 일은 간단하다. 바로 찬혁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는 것.
'반드시 30분 안에 끝낸다.'
오로지 그 생각을 담아, 유동건과 차윤구는 숨 가삐 손을 놀렸다.
시합 시작 후 10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 그들의 요리는 이르게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
그들이 그토록 노력하는 한편, 스테이지 위에서는 그야말로 끊임없는 볼거리가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었다.
인도팀의 란초 셰프는 시합 개시를 알리는 공이 울리기가 무섭게 본인의 시그니쳐, 움직이는 향신료 공장의 가동라인을 전속력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마치 사천성 게임의 고수처럼 항아리의 내용물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서 제 뜻대로 척척 향신료를 조합해내는 란초 셰프.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관객의 함성이 DJ가 턴테이블의 디스크를 돌리듯 요동쳤다.
그에 대항하는 한국팀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번에도 아낌없이 비밀병기 상자를 꺼내든 안영길은 다시 한번 그 속에서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을 몇 가지고 꺼내놓기 시작했다.
사슴뿔 형상을 그대로 간직한 녹각이나, 제 형상을 그대로 간직한 곰 발바닥 등. 상자 속에서 절로 관객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형상의 무언가가 튀어나올 때마다 관객들은 '저것이 오리엔탈 시크릿 스파이스!?' 같은 소릴 하며 뒤집어지기 바빴다.
이쪽에서 놀라게 만들면 반격하듯 반대쪽에서도 놀랄 거리를 꺼내든다.
끊길 줄 모르고 이어지는 응수.
그러나 마침내, 그 응수에 끝을 가져온 이가 등장했다.
─쿵!
스테이지 전체에 진동을 만드는 굉음.
그 소리를 낸 장본인의 손에는, 척 보기에도 상상이상의 무게를 자랑하는 철통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철통의 겉에 큼지막하게 적힌 LN이라는 글자.
수만의 관객 중 그 정체를 단숨에 뚫어본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외친다.
"액체질소Liquid Nitrogen……?"
그 통에 손을 얹은 찬혁이, 땀을 뻘뻘 흘리는 얼굴로 웃었다.
"거, 세상에서 제일 차가운 걸 옮기려고 이렇게 더워지면 쓰나."
시합 시작 후, 최고의 임팩트가 관객을 격하게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