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38화 (338/403)

338. 남동풍.-1-

"고생하셨어요. 여기요."

"뭘요. 고마워요, 찬혁 학생."

첫 번째 개인전을 승리로 장식한 교장 선생님이 내가 건네 드린 물을 받으시곤 작게 웃으셨다.

얼음물에 꿀에 절인 레몬즙을 섞은 레모네이드 엇비슷한 음료를 단숨에 들이켜는 선생님.

겉으로는 멀쩡한 듯 웃으셨지만, 이마에서 흐르는 몇 줄기의 땀방울과 젖은 기미가 확연히 보이는 옷만큼은 감추시지 못하셨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플로리다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한겨울에도 당당하게 에어컨을 트는 동넨데, 수천, 수만 명의 관객으로 가득한 스테이지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불과 홀로 씨름을 하고 계셨으니 말이다.

'오히려 저 연세에 이만한 체력을 유지하고 계신 게 대단한 거지.'

아무리 건강을 잘 지키며 산 사람이라도 예순, 일흔 정도 되면 몸에서 안 아픈 곳 찾기가 더 힘들다.

당장 나만 해도 고작 마흔 좀 넘자마자 무릎과 허리, 손목 쪽에 말썽이 생겼거든.

뭐, 그런 거야 요리사들 직업병이니 별 수 없다곤 하지만.

'내가 아는 요리사 중에 관절 문제가 하나도 없는 사람을 찾는 게 오히려 하늘의 별따기였지.'

괜히 젊은 게 좋다는 소릴 입에 달고 사는 게 아니라니까. 진짜로, 나이를 먹으면 그리워지는 건 젊음이야…….

괜히 늙은이 같은 소리는 이쯤 하고.

아무튼, 목을 축이며 한껏 불에 달군 몸을 천천히 식히신 선생님은 잠시 후 기력을 얼추 되찾으시곤 비로소 입을 여셨다.

"첫 번째 대결은 어떻게든 승리로 가져올 수 있었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

교장 선생님의 입에서 가장 처음 나온 그 말에 나를 비롯한 우리 팀원들은 하나같이 의아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알아요. 물론 제가 감춰뒀던 수를 잘 활용한 덕에 잡은 승기였어요. 하지만 과정에서 운이 제법 따랐다는 건 부정할 수 없죠."

교장 선생님의 설명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탕이라는 주제를 통해 일부러 상대에게 유리한 고지를 넘기는 척, 그러면서도 자신 또한 어드밴티지를 챙기며 의심을 피했다.

그렇게 상대가 선택한 메뉴는 당연히 가장 자신하는 메뉴인 커리. 그때에도 선생님은 일부러 상대가 고르는 재료를 본 뒤에 메뉴를 결정하셨다. 같은 메뉴를 고르는 것으로 향신료를 통한 방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때는 무난한 재료를 골라줘서 다행이었어요. 만약 꼬아서 양고기 같은 걸 골랐으면 아마 지는 건 저였겠죠."

그야 그렇긴 하지. 한식에서 양고기는 잘 취급하지 않는 분야니까.

고려시대 때였다면 모를까, 조선시대에는 먹는 양을 사려면 당시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다.

그에 비해 인도는 가장 대중적인 고기 두 개를 꼽으면 닭과 양이 반드시 들어가는 곳. 양고기가 커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양고기를 주재료로 잡았다면 교장 선생님의 말씀대로 당신의 패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도 란초 셰프가 한약재에 대해 제대로 몰랐다는 점.

이후의 대응이 정석적으로 흘러가며 예측하기가 쉬웠던 점.

비등한 수준의 요리였지만, 전세계 온갖 요리를 먹어본 심사단에게조차 생소한 새로운 맛의 요리이기에 보다 고득점을 받은 점까지.

아주 다양한 부분에서 교장 선생님의 예측이 빛났지만, 운이 좋았다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저쪽도 실력 있는 요리사들이니, 다음 시합에도 같은 수단에 당해주진 않을 겁니다."

한약재를 향신료로 사용하는 조리법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주제와 상황에 따라선 사용하지 못할 때도 많다.

"예를 들어 단순히 굽는 조리법이나, 볶는 조리법에는 쓰지 못해요."

고기 자체를 한약재를 사용해 재우면 어떻게든 사용은 할 수 있겠지만 최소 하루 정도는 숙성할 필요가 있기에 지금 당장은 사용하지 못한다며 교장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셨다.

"가장 적합한 사용법은 역시 오래 끓이는 계열의 음식인데, 이것도 장시간 조리가 필요한 조리법이라 가게를 제가 맡던 시절에나 종종 사용하던 방법이었죠."

쉽게 정리하면 교장 선생님의 비밀병기인 한약재를 사용할 수 있는 조리법은 현 상황에선 상당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거 하나를 쓰기 위해 다른 방법을 포기한다면 내 손으로 발목에 족쇄를 달고 손에는 수갑을 채우는 꼴이지 않겠는가.

자승자박도 정도가 있지, 그쯤 가면 멍청한 거다, 멍청한 거.

"하지만 이 승리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건 아니에요. 일단 소중한 승점 하나. 그리고 상대에게 경계심을 심어줄 수 있었죠. 이걸로 인도팀은 우리 행동 하나하나에 굉장히 촉각을 곤두세우게 됐어요. 이건 우리에게 호재입니다."

호재好材?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방심한다면 모를까, 털을 빳빳이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하고 있다면 어째서 그게 우리에게 호재가 되겠는가?

내 의문에 교장 선생님은 그저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잘 기억해두세요. 죽은 제갈량이 물리칠 수 있는 건 산 사마의 말고도 더 있을 수 있단 걸."

***

짧은 휴식시간 후 돌아온 스테이지.

선수인 우리가 입장하기도 전부터 이미 비운 자리를 채워 앉은 관중들이 우리가 등장하자마자 커다란 환호성을 내지른다.

거 참, 이런 분위기에서 요리를 해본 경험은 회귀 전에도 없었는데.

관객의 벽 사이로 뚫린 중앙의 메인 스테이지로 향하는 길목을 걷자니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온갖 함성이 귀를 때린다.

한 5분 정도만 여기 가만히 서 있으면 고막이 나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반쯤 진지하게 고민했다.

"땡큐! 땡큐!"

"…… 뭐 하세요?"

"아니, 우리 보러 이렇게 모여주신 거 아니냐. 그럼 서비스를 해드려야지."

어차피 한 번 팔린 쪽. 얼굴이라도 자주 비춰야 가게 광고가 된다며 사방팔방을 향해 팔을 흔드는 유동건 사장님은 시합이 시작할 때 보여주던 긴장한 모습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 마냥 힘차다.

이걸 적응력이 좋다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가정을 짊어진 가장의 책임감으로 봐야 하는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하나 말할 수 있는 건 유동건 사장님 역시 대단한 분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태연한 척까지는 어떻게든 하겠지만…….

'저건 이미 즐기는 자 모드네.'

이제는 숫제 손을 뻗은 관객들과 하이파이브까지 나누고 계신 유동건 사장님을 보며 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그때, 옆에서 함께 걷고 계시던 교장 선생님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굳어 있지 말고 찬혁 학생도 유 사장님처럼 해보는 게 어때요? 가끔은 저런 자세도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노력할 것까지야 없지만…… 그래도 저쪽 팀보다는 지금 찬혁 학생이 훨씬 보기 좋아요. 저길 보세요."

"?"

교장 선생님이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우리와 다른 코너에서 스테이지에 오르는 인도팀의 행렬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본 인도팀의 모습. 왜 이제 와서 저걸 보라는 것일까.

그 의문은 시선을 향한 순간 확실하게 풀렸다.

"……."

"어때요. 알 것 같나요?"

"네."

제법 거리가 있지만 이렇게 멀리서 봐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선두에서 걷는 란초 셰프는 한 번의 패배를 겪은 뒤에도 여전히 태연하고 침착한 모습이었으나, 오히려 그 뒤를 따르는 팀원들의 상태가 이상하다.

묘하게 선이 뻣뻣하다고 해야 할까, 거동이 굳은 게 눈에 보였다.

"그거 아나요? 란초 셰프는 시즌 1 때 단 한 번도 개인전에서 진 적이 없단 걸."

"네. 인도팀이 졌던 시합도 개인전에서 다른 선수가 나가서 패배한 경기였죠."

그제야 나는 인도팀의 속내를 이해했다.

저들은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직접 목격한 스승의 패배에.

그 패배를 안겨준 이쪽의 실력에.

'정작 패배한 본인은 저토록 침착한데.'

그러나 그런 그들의 모습을 감히 꼴사납다고 말할 순 없었다. 교장 선생님이 방금 그 시합에서 지셨다면 나도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

하지만 쉬이 공감할 수도 없다. 나의 약한 모습은 상대에겐 파고들기 좋은 빈틈에 불과하다. 함부로 드러내선 안 되는 것이다.

피지컬과 멘탈,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는 대결. 맹목적인 정신론을 긍정할 마음은 없지만, 정신력이 부족하면 몸도 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특히 이런 단체전.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개인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손발이 되어줄 이들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면 무용지물.

"이런 뜻이었군요, 선생님."

죽은 공명이 물리칠 수 있는 건 산 중달만이 아니다.

중달이 아니더라도, 그 위명에 눌린 이라면 누구든 물리칠 수 있다.

"중달이 놀라 도망치지 않더라도, 가마를 멘 가마꾼이 자빠지면 결국 중달도 같이 넘어지는 법이죠."

승리와 패배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지만, 이것 하나는 말할 수 있었다.

우린 지금, 제대로 기세를 타고 있다.

***

단체전을 맞아 다시금 스테이지 위에 선 우리들.

마주한 인도팀의 안색은 아까 입장할 때 보았던 것과 달리 결연한 뜻을 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미 그들 사이로 침투한 미약한 불안감이 여전히 주변을 맴도는 게 느껴졌다.

이 자리에서 미약하게나마 남은 우려마저 완전히 떨쳐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그들의 승패가 걸렸다 보아도 좋겠지.

'하지만 그게 이쪽이 방심해도 좋단 뜻은 아니야.'

제갈량이 사마의를 속일 때에도 그를 본뜬 목상 정도는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목상의 역할을 해낼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우리가 제대로 목상 역할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당시 촉에게 목상이 있었듯이, 지금의 우리 또한 그들에게 없던 것을 갖고 있다.

그게 뭐냐고? 바로 단 하나의 사실이다.

'그들의 공명은 죽었지만, 우리 공명은 건재하다'는 단 한 가지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천군만마를 뒤에 둔 것 같은 안심감을 느낀다.

여기에서 하나만 더.

우리의 생공명이 온전히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남동풍이 불어만 준다면, 나는 이번 시합에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물론 승리를 제외하고서.

팽팽한 신경전이 오가는 스테이지 중앙. 마이크를 손에 쥐고 자리한 MC가 관중을 쭉 둘러보고는 빈손을 높이 들어 올려 삿대질한다.

그 손가락의 끝에는 행사장 천장에 설치된 거대 전광판.

투자자중 한 곳인 국내 대기업이 광고를 위해 설치했다는 플렉시블 스크린으로 만들어진 도넛모양 전광판이 360도를 여섯 개의 화면으로 쪼개어 내비친다.

"자! 룰렛이 돌아갑니다!"

미국 행사장과 한국 행사장의 차이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 인상적인 것을 꼽으라면 바로 저 화면이겠지.

한국에서는 주제를 정할 때 백 개 가까이로 쪼개진 칸이 각각 점멸하며 그중 하나가 골라지는 방식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전혀 다른 연출을 사용하고 있었다.

슬롯머신에서 돌아가는 세 개의 원통 중 하나만 떼어 온 것 같은 기구가 화면 중앙에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마치 돌겜이라 불리는 게임의 상대 선택창 같다고 할까.

적힌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돌아가던 룰렛은 점차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정해진 결과를 화면에 표출한다.

"룰렛 정지! 드디어 정해졌습니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 8강전 첫 경기! 한국 대 인도! 인도 대 한국! 그 팀전의 주제는!"

─펑! 펑펑!

모니터 뒤편에서 폭죽이 발사되는 것과 동시에, 비로소 그 룰렛의 글자가 공개된다.

"냉식Cold meal! 이번 시합의 주제는 바로 냉식입니다!"

"…… 헤에."

불었다. 남동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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