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코리안 시크릿 웨폰.-5-
"탕 요리라니……."
"괜찮은 건가?"
교장선생님께서 탕 요리라는 주제를 꺼내신 순간, 잠시 '혹시 내가 지금 잘 못 들은 건가?'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리를 스쳤다.
이유는 간단하다. 탕 요리라는 주제가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전혀 좋을 게 없는 주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탕 요리. 국물과 건더기로 구성된 국물 요리의 일종.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찌개보다 국물의 비중이 더 높은 국물 요리라고 할 수 있겠다.
영어로 치면 스튜나 스프로 치환할 수 있겠지. 완벽히 대체되는 단어는 아니겠으나 어느 정도 뜻은 통할 것이다. 실제로 심판이 인도팀에게 주제에 대해서 전할 때에는 그렇게 말했고.
'하지만…….'
사실 정말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교장 선생님이 탕 요리를 고르셨다는 것. 그 자체였으니까.
어째서 탕 요리가 문제가 되느냐.
보통 한국 사람은 스튜나 스프라는 말을 들으면 식전에 간단히 먹는 크림스프나 콘 스프 따위를 떠올리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크림스프'라는 종류의 요리일 뿐 다른 스튜 요리완 차이점이 많다.
결국 그 두 가지 대분류를 나누는 건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물과 건더기의 유무.
그 두 가지만 기준점에 맞게 만들면 어떤 요리든 스튜, 혹은 스프가 될 수 있다.
자. 이게 무슨 뜻이냐.
'대놓고 커리를 만들어도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거지.'
이게 아닐 텐데.
작전의 기본은 적의 장점을 뺏고 우리 장점을 살리는 것.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의 장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상대의 장점을 너무 고스란히 살려주게 된다.
차, 포를 떼는 게 아니라 아예 하나씩 더 붙여주고 장기를 둘 판이라 이거다.
"이거 뭔가 일이 심상찮게 흘러가는데."
유동건 사장님의 말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교장 선생님이시니까 분명 뭔가 생각이 있으시긴 할 텐데……."
"그러니까 말이다."
하지만 따로 생각이 있으신 거였다면 애당초 다른 주제를 선택하시지 않으셨을까.
복잡미묘한 의심과 걱정을 품고 상황의 추이를 살펴보던 그때, 옆에서 여태껏 침묵을 지키시던 이영율 셰프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씀하신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찬혁 학생도 안 선생님 실력은 잘 아시잖아요."
"그렇긴 한데요……."
나도 안다. 사람이 50년쯤 살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 어떤 분야라도 독보적 1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다.
아니, 힘들다 뭐다 한 수준이 아니라, 한평생을 단 한 가지 분야에 꼴박한 사람들조차 그중에서 1위를 해본 사람과 해본 적 없는 사람의 비율을 재면 후자가 수십, 수백만 배는 더 많다.
보통 하는 것 정도로는 불가능하고, 축복받은 환경과 재능을 타고난 사람조차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싶어지는 자리.
안영길 선생님은 그런 자리를 십수 년 동안 완고하게 지킨 사상 최고의 디펜딩 챔피언 중 하나. 그 실력의 척도는 나 따위로는 아직 잴 수 없을 만큼 멀다.
그런 주제에 선생님을 걱정할 자격이 있냐 물으면 솔직히 할 말이 없는 게 사실이지만…….
'상대도 인구 십수 억의 나라에서 그 자리를 지켜온 사람이니까.'
교장 선생님과 란초 셰프. 두 사람의 격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난 그리 대단한 사람이 못 된다.
이영율 셰프는 그런 내게 안심하라며 일렀다.
"갑자기 저러셔서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좀 더 안심하고 봐도 괜찮아요. 그도 그럴 게, 선생님은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한 거니까요."
"예?"
최선의 선택? 탕 요리가 말인가?
이해하지 못해 시선을 돌리자 이영율 셰프가 답한다.
"안 선생님 주특기는 탕 요리거든요. 거기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날 향하고 있지 않았다. 스테이지의 조리대 위. 포장만 간신히 뜯긴 새하얀 스티로폼 박스에 못 박힌 듯 고정된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날 뿐이다.
"저걸 쓰려면, 그만한 주제가 없기도 하고요."
저거?
'아, 맞다. 비밀병기.'
교장 선생님도 이영율 셰프도, 너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서 나도 깜박 잊고 있던 수수께끼 상자.
내용물이 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이영율 셰프는 그 내용물을 짐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걸 알아서 저렇게 여유로우신 건가.'
알다가도 모를 상황에 잠시 의문이 샘솟았지만, 이내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영율 셰프는 저 비밀병기인지 뭔지가 있든 없든 교장 선생님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신뢰를 보고 있자니 불안해하던 내 모습을 반성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슬슬 시작하네요. 걱정은 이만 내려놓고, 조용히 지켜봅시다."
"네."
이영율 셰프의 말대로 스테이지의 조명이 저 끝에서부터 점차 소등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빛은 메인 스테이지 바로 위의 스포트라이트뿐.
새하얀 조명 아래서 두 셰프가 마주보고, 심판이 높게 손을 들어 올리며 포효한다.
"시합, 개시!"
***
조리를 시작한 두 사람. 신기하게도,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잡은 재료는 같은 것이었다.
"닭?"
그렇다. 닭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뼈와 근육의 성장이 끝난 노계 하나와 영계 여럿을.
란초 셰프는 그 중간 정도 사이즈의 닭을 몇 마리.
'둘 다 닭이라. 그럴 수 있지.'
닭으로 만든 육수는 맛있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장점을 가졌다. 그걸 전부 열거하는 것도 힘들 만큼 말이다.
그러나 그중 확실한 것을 한 가지 꼽자면, 닭은 가장 빨리 제대로 된 육수를 만들 수 있는 재료 중 하나라는 것이겠지.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은 뼈와 살이 너무 두껍다. 고작해야 서너 시간 정도로는 제대로 된 육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닭은 제대로 된 준비만 갖춰졌다면 고작 30분만 삶아도 완벽한 육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 이런 형식의 대회에서는 무엇보다 큰 장점이라고 해도 되리라.
시간을 선택했다는 것이 폼이 아니라는 듯 두 사람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손질을 끝마친다.
"저건……."
닭을 어떻게 손질했는지 알면 어떤 요리를 만들 생각인지 대충은 예상할 수 있다.
선생님은 닭을 각각 깔끔하게 닦고 누린내가 나는 부위를 깔끔하게 제거한 뒤, 항문을 통해 내장을 전부 빼내고 노계의 관절과 척추 부근에만 깊은 칼집을 냈다.
영계는 속에 불리지도 않은 쌀을 한줌 씩 넣으시더니, 우리가 생라면을 먹을 때 흔히 그러듯 상하좌우 가리지 않고 거칠게 흔든다.
그것만 봐도 어떤 요리를 만들기 위한 준비인지는 한눈에 알 수 있다.
'삼계탕.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
노계는 살까지 통째로 육수 재료로 사용하기 위한 것.
관절과 척추에 칼집을 낸 건 육수의 액기스인 연골과 뼈의 맛을 빠르게 용출시키기 위한 밑 작업이다.
배를 가르지 않고 어렵게 내장을 제거한 건 속에 무언가를 채워 넣기 위해서겠지.
불리지 않은 쌀을 넣어 흔든 건 쌀이 가진 특유의 제습력과 향미를 이용해서 미처 제거하지 못한 내장 조각과 피 따위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 잡내를 제거하는 효과를 이용한 것이리라.
'이걸 모르면 안 되지.'
전부 배운 것이니까. 교장 선생님 당신에게 직접.
저 처리 과정을 보고 삼계탕을 만드는 과정이란 걸 유추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하지만…….
'보통은 영계만 따로 쓰실 텐데.'
오늘은 노계로 따로 육수를 만들 생각이신 걸까.
평소 삼계탕처럼 담백한 요리는 육수 맛이 너무 강하면 오히려 맛을 망친다고 말씀하시던 것과 다른 행동에 잠깐 혼동이 오긴 했지만, 역시 분명하다. 저건 삼계탕을 만들기 위한 밑 작업이었다.
한편, 란초 셰프의 손질 과정은 훨씬 강렬하다.
글자 그대로 닭의 뼈와 살을 죄다 분리해 버린 란초 셰프는 새하얀 뼈와 약간의 살조각만 남은 뼈를 갈고리에 걸어 탄두르에 넣었다.
저게 다 닭의 생전 모습을 살려 발골한 란초 셰프의 솜씨 덕분이다.
박물관에 있는 제 먼 조상처럼 박제되다시피 한 닭의 뼈는 탄두르 속에서 갈색이 될 때까지 구워진다.
'스톡을 만드는 방법이야.'
양식에서 흔히 쓰는 조리법이었다. 마이야르 반응을 통해 뼈에 남은 살조각의 맛을 살림과 동시에 잡내를 제거하고, 더욱 응축된 맛이 담긴 육수를 만들어 내는 조리법.
브라운 스톡을 제작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남은 살코기는 적당한 사이즈로 자른 뒤, 뜨겁게 끓인 기버터에서 순식간에 튀긴다.
─치이이이익!
기름 속에서 수분이 날아가는 정겨운 소리와 함께 냄비 바깥으로 펄펄 끓는 기름이 튄다. 그러나 란초 셰프는 그 기름이 뜨겁지도 않은지, 장갑 한 겹 끼지 않은 맨손으로 저민 닭살을 하나씩 넣고 빼며 닭살을 익히고 있었다.
'속은 전혀 안 익었겠는데.'
하지만 잘 알아둬야 할 건, 저 닭고기의 겉만큼은 확실히 제대로 익었단 것이다.
크러스트가 생길 정도로 확실한 마이야르 반응을 일으킨 살코기.
거기에 더해 기버터의 농밀한 풍미가 듬뿍 밴 닭고기는 저대로 소금만 찍어 먹어도 극상의 맛을 자랑하겠지.
'역시, 저쪽은 자기가 가진 가장 강한 패로 나왔구나.'
저 조리과정을 보고 결과물을 어찌 유추하지 못하리오.
'버터 치킨 커리.'
인도의 대표 요리 중 하나로, 볶은 샬롯과 닭고기에 가람 마살라를 넣고 육수와 생크림을 넣어 끓인 요리.
커리가 탕이냐? 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겠지만, 스튜나 스프의 영역에 들어가긴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국물과 건더기가 제대로 갖춰진 요리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이건 내가 불평을 해봤자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 뭘 어쩌겠는가. 수긍할 건 수긍하고 넘어가야 한다.
거기에 더해 란초 셰프는 육수를 끓이는 솥에 구운 뼈를 포함해 여태껏 준비한 모든 재료를 집어넣은 뒤, 다음 단계를 밟기 시작했다.
란초 셰프가 조리대 바깥으로 꺼낸 트레이를 본 MC와 관객들이 행사장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지른다.
"나왔다! 드디어 나왔다! 우리 프로그램을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면 기억하실 겁니다! 저번 16강전! 프로그램 최고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그 장면! 그 주역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와아아아아!!!
그것은 내 기억에도 길쭉한 가시처럼 박힌 물건이었다.
컵홀더 같은 구멍이 잔뜩 난 트레이와, 거기에 딱 들어맞는 수십 개의 항아리.
인도팀의 승리를 만들어낸 란초 셰프의 역작. 사람들이 이르길 '움직이는 향신료 공장'.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낸 그 기물에 시선을 보내지 말라는 건, 우리에게 있어선 힘든 부탁이었다.
"쯧……."
저걸 개인전부터 내보이다니, 어지간히 이쪽을 경계하고 있단 건가.
전 시즌 우승팀이라는 명패가 이토록 무거운 것임을 다시금 깨달은 나는, 이번엔 교장 선생님께 시선을 돌린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선생님.'
드디어 저쪽이 밑천을 깠는데, 이쪽이라고 가만있을 순 없을 거 아닙니까.
간절한 심정으로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던 그때, 비로소 교장 선생님이 뭔가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하신다.
육수를 뽑는 작업을 끝내신 뒤 조리대 뒤쪽으로 이동한 선생님.
그 손에 들린 스티로폼 박스는, 아까 보았던 선생님의 비밀병기가 담긴 것이었다.
'과연…….'
저 비밀병기가 대체 뭔지는 몰라도, 저 움직이는 향신료 공장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길 간절히 빌며 바라보고 있자니, 드디어 선생님이 박스의 뚜껑을 열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다.
그리고 잠시 후, 박스 속에서 나온 물건을 본 내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나뭇…… 가지?"
비밀병기 상자에서 나온 것.
그것은 어딜 가나 볼 수 있을 것처럼 생긴 평범한 나뭇가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