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 코리안 시크릿 웨폰.-4-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란초 셰프 일행과의 저녁식사 후, 호텔로 돌아온 나는 마찬가지로 식사를 마치고 먼저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교장 선생님께 그간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알렸다.
"알겠어요. 명심해 둘게요. 시간이 늦었으니 찬혁 학생도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내일은 일찍 나가야 하잖아요?"
"아, 네. 그렇죠."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뭐라고 해야 할까. 소식을 알린 내가 반대로 놀랄 만큼 담백한 교장 선생님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내 쪽에서 먼저 질문을 건네고 말았다.
"저, 선생님? 그…… 더 궁금하거나 그런 건 따로 없으세요?"
"음? 아까 전부 말해준 거 아니었나요?"
"아뇨. 그게 다긴 한데요……."
"그럼 됐잖아요?"
아니 그게 틀린 말씀은 아닌데 말입니다.
'따로 궁금하신 건 더 없으신 건가?'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담백하지 않은가. 나였다면 이래저래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을 것 같은데. 어쩌다 그 사람하고 만난 거냐던가, 왜 그런 소릴 들었냐라든가.
사실 그렇게 물으셔도 딱히 답할 이야기가 마땅치 않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호기심의 ㅎ자조차 보이지 않는 반응에는 나조차 주눅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침묵에 담긴 의미를 대충 눈치채신 교장 선생님은 가만히 웃으며 내게 말씀하신다.
"하하. 저라고 아주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신경 쓰이는 건 물론 있죠. 예를 들어 보호자 없이는 되도록 외출하지 말라고 분명 당부를 줬을 텐데 왜 찬혁 학생이 거기 있었나 하는 거라든가 말이죠."
뜨끔.
머릿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야, 이런 걸 보고 간이 떨어질 것 같다고 하는 걸까.
"저, 저기 그게…… 보호자란 게 동행하는 성인이라는 의미에서는 인도팀도 나름……."
"그런 뜻이 아니란 건 똑똑한 찬혁 학생이 더 잘 알 거라고 믿어요."
"네……."
"뭐, 이건 농담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세요."
농담…… 맞습니까?
그런 것치곤 목소리 톤이 되게 진지하시던데. 거의 훈화하실 때랑 똑같았다고요.
차마 그런 불평을 할 담력은 없어서 가만히 입을 닫고 있자, 교장 선생님은 여전히 웃음이 떠나지 않은 얼굴로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아무튼 농담을 빼놓고 말하자면 궁금한 게 몇 가지 있기는 하죠. 란초 셰프는 왜 그런 이야기를 찬혁 학생에게 했을까. 아니, 애당초 왜 그 이야기를 꺼낸 걸까. 의중이 무얼까. 과연 진실일까. 아마 찬혁 학생도 마찬가지로 궁금한 게 많을 거예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늙은 제가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생각하지 마세요."
"예?"
잘 못 들었습니다?
황당한 말씀을 하시면서도 여전히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선생님을 보며 고개를 기울인다. 생각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찬혁 학생도 란초 셰프의 말이 진짠지 아닌지 모르지 않나요?"
"그렇죠."
"이번처럼 이래도저래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는, 차라리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게 편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멋대로 생각하다뇨?"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 아니겠어요? 저쪽에서 먼저 손바닥을 내밀었다면 이쪽은 쳐주지 않을 자유도 있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간단했다.
"너무 끌려다녀선 안 된다는 소리인가요?"
"바로 그겁니다."
재밌는 견해였다. 그걸 '자유'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뭐니뭐니 해도, 이곳은 일단 자유와 기회의 나라가 아니던가.
그런 곳에서 논하는 자유란, 그 나름의 유쾌함이 있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 누군가에게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야……."
교장 선생님이 낸 돌발 문제에 대한 대답은, 내 사견으론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겨야죠."
그래. 이기면 된다. 기세로든, 시합이든. 이긴 뒤에는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
그때부턴 그쪽이 이쪽으로 끌려올 테니까.
"정답입니다."
내 답이 마음에 드신 듯, 교장 선생님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
시합 당일.
플로리다의 새파란 하늘은 시합의 시작을 축복하는 듯 청명한 햇빛을 내리쬈다.
사실 이놈의 플로리다는 대서양과 바로 얼굴을 맞댄 탓에 툭하면 장마와 찝찝한 해풍, 바닷바람을 타고 올라온 토네이도 따위로 조용한 날이 없다시피 한 동네지만, 대략 며칠 전부터 앞으로 2주 정도는 기적적으로 아무 이상도 없을 것이란 기상 예보가 있었다.
아, 가끔 풍속이 더럽게 강해지는 날이 종종 있었지만, 그 정도는 늘상 있는 수준이었기에 현지인 중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일본에서의 지진, 한국에서의 북도발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과연 강자의 땅이라는 소릴 듣는 미국다운 이야기였다.
하여튼, 마치 하늘이 내린 것 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는지 제작진은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대회 일정을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도 한국에서보단 할 게 많이 없어서 다행이지.'
개막과 관련된 이벤트는 16강전 개최지였던 한국에서 모조리 처리하고 온 덕을 톡톡히 보았다.
플로리다는 몸매와 지갑에 자신이 있다면 사시사철 언제든 수영복을 입고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온난한 기후가 특징이다.
덕분에 뉴욕과 LA에 이어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 중 하나이기도 하고 말이다.
거기다 마이애미는 그중에서도 부자의 비율이 높은 동네다 보니, 기본적으로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영업자나 숙박업자, 이곳에 적을 둔 회사원 등이 아니라면 다들 생활에 제법 여유가 있는 편이다.
요컨대 이 지역은 워라밸이 라이프 쪽으로 치우친 사람이 많다는 것.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이렇다는 거지…….'
─와아아아아아아아!!
─삐이이이이익!!
─뻥! 퍼펑!
사람, 사람, 사람.
어딜봐도 인파가 가득하다.
척 봐도 한국의 행사장보다 커다랗고 설비도 비할 데 없는 미국의 스튜디오.
인기 밴드가 공연하는 콘서트장처럼 대결 스테이지를 중심으로 사방에 관객석이 즐비하고, 거기에 더해 관객석에서 빈자리라곤 보이지도 않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
꼭 도시 사람 전체가 우리들의 시합을 관전하러 온 것만 같은 상황에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와, 대단한데. 한국에서도 관객이 제법 많다 싶었는데, 여기랑은 비교도 안 되겠어."
우리 중에서 유독 담이 작은 편인 유동건 사장님은 이미 부담 백배인 표정을 짓고 계신다.
'이해하지…….'
미국은 보통 한 번 저지르면 크게 저지르는 나라다. 음식도 크고, 고기도 크고, 사람도 크고, 땅도 크고. 아무튼 대충 뭐뭐가 크다 앞에 '미국은'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면 대부분은 통용될 정도니까.
거기다 이런 이벤트성 요리 시합은, 한가한 토요일 아침의 여유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엔 더 이상 없는 소재거리였겠지.
'특히 이 스테이지 구성이 참신하게 악의적이야.'
뭐라고 해야 할까. 프로레슬링 경기장을 크게 확대한 것처럼 생겼다고 해야 할까?
보통 요리사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요리를 선보일 때는 정면만 보여줄 때가 많은데, 이 스테이지는 아예 사방에서 우리를 직관하는 관객으로 가득하다.
이런 걸 사면초가라고 하지?
아니. 아마 좀 틀린 용법인 것 같다. 근데 대충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런 눈 돌릴 곳 없이 어딜 보든 부담스러운 스테이지였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내 눈을 잡아끄는 물체가 한 가지 있었다.
"우와……."
아니, 저걸 진짜 또 가지고 나왔네…….
가장 윗부분이 내 가슴께까지 올라오는 돌 굴뚝. 그래, 이쯤 말하면 알겠지. 탄두르다. 인도 재래식 화덕 말이다.
'그나마 이번에는 시합 시작 전에 제대로 갖다놨네.'
어디서 어떻게 가져온 건지는 몰라도 용케 매 시합마다 저런 걸 준비하는구나.
'아니 근데 진짜 어떻게 가져온 거야?'
척 봐도 무게가 백수십kg은 될 것 같은데 한국에서 썼던 걸 여기까지 가져온 걸까? 당일 배송을 때리려면 항공택배비가 농담이 아니라 수백만 정도는 가뿐하게 깨질 텐데?
설마 이 한 번의 경기를 위해 그만한 돈을 투자한 걸까. 혹시 여기서 이기면 이 다음 경기에도 또 가져갈 셈인가? 정말 그렇다면 어지간히 미친 양반들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탄두르를 옮기는 데에 드는 비용이나 노고 같은 걸 감안하더라도 역시 사람들의 눈을 잡아끄는 상징성만큼은 분명 대단했다. 그럴 수밖에. 저게 바로 인도요리의 랜드마크 같은 거니까.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안 그래도 이목을 끄는 1.5m짜리 화덕에 더해 웅장한 걸 좋아하는 미국 사람들의 습성이 겹치자 관객의 주목은 단숨에 인도팀을 향해 쏠렸다.
'오히려 다행인가.'
안 그래도 시선에 짓눌려 압사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그로를 저쪽에서 전부 끌어가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어차피 당장의 주목도 정도야 조금만 지나면 의미가 없어질 터. 과도한 긴장을 막을 수 있다면 잠깐 주목을 빼앗기는 것 정도야 크게 거리낄 일도 아니다.
아무튼 이야기를 돌려서.
그 주목의 주체인 인도팀은 생각보다는 태연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팀의 중심에 서서 이쪽을 보던 란초 셰프와 눈이 마주쳤지만, 우리 둘 다 별다른 액션 없이 가만히 시선을 돌린다.
'이야기할 시간 같은 건 나중에 잔뜩 있겠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서로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원형의 행사장 중심. 백스테이지에서 행사장의 중심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건너온 심판이 스테이지 위에 서서 각 팀의 팀장을 호명한다.
"란초 바트 셰프! 앞으로!"
"영길 안 셰프! 앞으로!"
코인토스 시간이 돌아왔다.
여기서 동전이 향한 방향을 맞춘 사람이 대표를, 맞추지 못한 사람이 주제를 선택할 권리를 가진다.
'우리가 대표 선택권을 가지면 란초 셰프를 지목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거야 교장 선생님을 지목하겠다는 말에 좀 꼴 받아서 대충 질러본 거였고, 란초 셰프가 정말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제 선택권을 줄 수도 없는 것이, 안면몰수하고 커리를 주제로 골라 버리면 우리는 손가락이나 빨면서 패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베스트는 인도팀이 대표 선택권을 갖고, 우리가 주제 선택권을 가진 뒤 향신료를 쓰기 어려운 주제를 고르는 것.
이쪽도 작정하고 뻔뻔하게 나가면 우리가 반드시 이길 주제를 선택 못 할 것도 없다. 세계적으로 쪽팔려서 문제지.
그러고 지면 타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도 몰매를 맞을 것이다.
─팅!
빙글, 빙글, 빙글.
심판의 손에서 튀어 오른 동전이 눈이 어지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천지를 뒤집는다.
위냐, 아래냐.
심판의 손등 위로 동전이 안착하고, 직후 란초 셰프와 교장 선생님이 각각 외친다.
"뒤."
"앞."
결과는…….
"뒷면입니다. 인도팀은 대표를 지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좋아. 일단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다. 저쪽이 실제로 누굴 지목하든, 우리는 우리가 유리한 주제로 싸울 수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지목한 상대의 유불리는 둘째 치더라도, 과연 누굴 고를 것이냐.
저에게 쏠린 이목 앞에서, 란초 셰프는 망설임 없이 검지를 들어 자신의 정면을 가리켰다.
"당신. 한 번 실력 좀 봅시다."
"…… 호."
그가 고른 상대는, 안영길 대가.
어제 저녁에 말한 그대로, 그리고 16강전 때처럼.
그가 지목한 것은 이번에도 팀장급 인사였다.
"좋습니다. 그럼 저도 바로 주제를 정하죠."
쉴 틈 없이 이어진 교장 선생님의 언사에 재빠르게 카메라와 마이크가 돌아간다.
그걸 기다린 것일까. 잠깐 말과 말 사이를 띄고 이어진 교장 선생님의 말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주제는 탕stew. 탕 요리로 합시다."
탕 요리?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어째서?'
탕 요리는, 인도팀이 가장 자신하는 종목 중 하나였기에.
이전에 들은 작전 계획과는 딴판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나는 잠시 눈앞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