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32화 (332/403)

332. 코리안 시크릿 웨폰.-2-

찬혁 일행이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로 출발할 무렵, 마찬가지로 그들처럼 같은 시각에 공항을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찬혁 일행이 있던 곳과 같은 공항은 아니었다. 애당초 비행기를 타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진 일련의 무리. 그 사이에는 찬혁의 친구이자 안영길의 손자인 안창민과 그의 아버지인 안상필이 섞여 있었다.

그들이 방금 나온 것은 국제 운송센터.

이를 보면 알다시피, 그들은 현재 안영길의 요청에 따라 그가 주문한 '비밀무기'를 방금 막 부친 참이었다.

"수고했다. 아마 내일쯤이면 도착하겠지."

공항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안상필의 말에 안창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시차까지 생각하면 모레 오후 정도에 도착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면 택배를 수령 하는 측에서도 제법 여유롭게 받으러 올 수 있으리라.

자신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핸들을 돌리는 아버지에게 안창민이 물었다.

"근데 아빠. 비밀병기란 게 대체 뭐예요?"

비밀병기. 그것이야말로 안영길이 안상필을 통해 배송을 부탁한 물건의 이름이었다. 뭐, 그렇다고 택배박스에 'secret weapon' 같은 이름을 써 붙였다간 폭탄테러 혐의로 공항에서 실시간 체포방송을 찍게 될 테니 박스 자체에는 다른 이름을 적어 보냈지만.

친구는 국가대표로 나가서 세계를 상대로 선전하는 와중에 테러용의자로 TV에 실리는 건 사양이었다.

아마 며칠…… 아니, 몇 주 정도는 친구의 유명세를 찍어 누를 수 있겠지만, 한평생을 단 몇 주에 베팅하는 건 효율이 너무 떨어지지 않는가.

웃기지도 않는 잡생각을 걷어낸 안창민은 방금 안상필이 택배를 부칠 때 제출했던 서류의 내용을 되새겼다.

분재 모종, 찻잎, 건어물, 건조식품 따위의 분류로 나뉜 운송장.

그 조합에서 도저히 교집합을 찾을 수 없던 것도 그렇지만, 그게 할아버지가 특별히 준비한 비밀병기라는 소리에는 더더욱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굳이 택배로 부탁하실 정도면 뭔가 대단한 물건 같긴 하지만…….'

그걸 제 아버지가 그토록 꼭꼭 감추려 하시니 손자인 자신조차 내용물을 알 수 없었다.

비밀병기라는 컨셉을 어디까지 지킬 생각인 건지, 준비부터 포장, 배송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을 혼자 처리하시지 않았던가.

"그거 말이냐. 사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걸 그렇게 꼭꼭 숨기고 다니세요?"

"꼭꼭 숨겼다기보다, 처리법을 나밖에 몰라서 그렇지."

처리법?

의미심장한 단어에 안창민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천천히 고속도로로 진입한 안상필이 엑셀을 밟으며 말을 이었다.

"학교에선 안 가르쳐주는 거다. 나도 네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셨지. 그리고 조만간 너도 배우게 될 거고."

무슨 일자상전의 비기를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 이리 호들갑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호기심이 샘솟는 안창민이었다.

"어차피 배울 거면 지금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 흠."

잠깐 고민하는 듯 침음을 낸 안상필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래. 너도 곧 졸업이니, 슬슬 알려줄 때도 됐구나."

"어, 진짜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돼."

이번엔 또 어째서냐는 듯 샐쭉한 표정을 짓는 안창민을 보며 안상필이 이어 말한다.

"배우고 싶다고 당장 가르쳐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작두꾼 선생님하고도 시간을 따로 잡아야 하거든."

"예? 누구요?"

"그리고 뭣보다……."

안창민의 말을 끊은 안상필은 잠시 차창에서 시선을 돌려 먼 하늘을 바라봤다.

이 근처, 이제 막 찬혁 일행이 떠났을 공항이 있는 방향이었다.

"너도 그게 뭔지 직접 볼 수 있을 테니까. 뭘 배우려면 그게 뭔지는 알고 배워야지."

그걸 알려달란 소리였는데.

잠시 툴툴대고픈 심정이 든 안창민이었으나, 이내 소리 없이 입을 다문다.

열린 차창 사이로 새어 나간 입김이 한숨을 대신하는 듯했다.

***

한겨울에도 변함없이 따뜻한 마이애미의 날씨는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탁월하다.

더우면 늘어지고 추우면 짜증나는 그 중간지점을 아주 잘 잡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 덕분에 시합을 앞두고 잔뜩 긴장 태세에 들어갔던 선수들조차 약간은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을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우리 팀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말이지. 적어도 나는 그랬다는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른 아침에 부드러운 침대에서 일어나, 테라스에서 선선한 해풍을 맞으며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진하게 우린 아메리카노 한 잔과 같이 맞이하는 경험을 하면 어느 누구든 마음이 풀어진다.

'이야, 고급 호텔이 좋긴 좋아. 그냥 룸서비스 커피 한 잔도 이만한 퀄리티라니.'

역시 돈이 최고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지만 빵도 빵 따라 다르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나는 이걸 기회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조급하게 연습에 매진하기보다, 적당히 긴장과 안정이 어우러진 느슨한 상태를 유지하며 언제든 전력을 쏟을 수 있게끔, 여행 전날 오늘의 체력을 내일로 미루듯 여유를 갖기로.

뭐, 말을 어렵게 했다 뿐이지 요컨대 그냥 쉬었다는 뜻이다.

플로리다라는 말에 모처럼 챙겨온 수영복을 챙겨서 호텔에 붙은 스파에서 선탠을 하며 잠시 살도 태워보고, 정말 오랜만에 고객 입장으로 호텔 레스토랑도 가보고.

'여기서 나이만 됐으면 바라도 가보는 건데.'

원체 술이 약해서 마신다고 해도 거의 논알콜에 가까운 약한 칵테일 말곤 못 마시겠지만.

그래도 실력 좋은 바텐더가 만든 칵테일은 도수가 낮든 높든 상관없이 맛있는 법이다. 이런 부분은 칼로리랑 다르구만.

주절주절 헛소리를 나불거리며 적당히 호텔을 누빈다.

마음 같아선 이 근방에도 한 번쯤 나가보고 싶지만, 보호자 없이는 외출하지 말라는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어르신들의 당부 탓에 어쩔 수 없이 호텔 안에서만 노는 중이다.

아무리 말이 통해도 어린애 혼자서 외국 땅은 위험하다니.

그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슬럼가 근처에서 년 단위로 생활하던 내 과거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그럭저럭 괜찮은 동네다. 부자동네는 정말 위험한 곳 몇 군데만 조심하면 치안이 괜찮으니까.

뭐…… 그렇다고 다른 어르신들 말을 씹고 무턱대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방과 호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적당히 논 지 수 시간.

호텔 플로어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자니, 창문 너머로 진 붉은 노을이 내 까만 커피를 담갈색으로 만든다. 이러니까 꼭 핫 초코 같네. 맛은 쓰지만.

'벌써 저녁이네.'

어느덧 해가 질 때가 되다니. 아직 시간은 좀 이른 것 같은데 여기도 겨울은 겨울이란 걸까.

앞으로 고작 12시간 뒤면 인도팀과의 시합이 시작된다는 사실이 묘하게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도 된다.

왜, 날 부수지 못하는 고통은 날 더 강하게 할 뿐이라는 말도 있듯이, 뛰어난 실력을 가진 셰프와 온힘을 다해 대결하는 건 그만한 성장의 기회가 된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나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합당한 상대라면 딱히 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물론 최고의 시나리오는 아무리 고전해도 끝에는 이기는 것이겠지만, 정말 손도 발도 못 내밀 만큼 강한 상대에게 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는 건 그때 한 번뿐.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엔 죽어도 이긴다는 마음으로.

패배를 받아들이되, 패배에 익숙해지진 않게.

겸허함과 승부욕을 동시에 갖는 것. 그게 나 같은 애송이에겐 제일 중요하고, 또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항상 냉정하게 승부를 받아들일 자신은 없으니까.

패배에 대한 공포를 버려야 승기가 있는 사지로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지금 이렇게 대책 없이 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침착함을 가다듬기 위해서다.

"…… 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 눈엔 그냥 생각 없는 놈으로 보이겠지."

실제로 제법 많은 선수가 투숙 중인 이 호텔에서, 여태껏 다른 선수들의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으니까.

다들 방에 틀어박혀 상대에 대해 연구 중이거나, 연습을 하고 있거나 하겠지.

가끔 밥 먹으러 갈 때 몇 명 정도 보긴 했지만, 그마저도 순식간에 먹고 돌아가는 걸 목격한 것이 여러 차례. 참 성실한 사람들이다.

'불성실한 사람처럼 찍히는 건 별론데.'

안 그래도 대회 선수들을 찍겠다고 호텔 문 앞에서 설치는 취재진을 봤었다.

경비한테 막혀서 들어오진 못했지만, 지금도 저 건너편 건물 옥상 같은 곳에서 대포 카메라로 이쪽을 살피는 파파라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망상 그만하라고? 나도 이게 내 망상이었으면 좋겠는데.

회귀 전에 호텔에서 일하던 시절, 유명한 사람이 호텔에 온 날에 내가 방금 말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하다가 경찰에 신고받고 도주 중 추락상을 당한 사람도 있었으니까.

어찌저찌 죽지는 않았다던데, 다리인지 팔인지가 불구가 됐다는 소문이었다.

외국 파파라치의 집념. 우습게 볼 수 없다. 특히 그 양반들이 좋아 죽는 조회수를 보장하는 사람을 향한 집념은.

'뭐, 그러니 나도 얼굴 팔리기 전에 슬슬 들어갈까.'

들어가기 전에 레스토랑에 들러서 저녁이나 해결하고 가자.

그런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테라스 바깥으로 향한 나는,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얼굴과 갑작스레 조우하게 됐다.

"아."

"어."

햇빛을 너무 많이 쐰 탓에 진한 갈색으로 탄 피부에 아로새겨진 굵직한 인상.

학자와 장사의 인상이 겹쳐 보이는 이 초로初老의 남자는 요 근래 가장 자주 본 얼굴 중 하나였다.

"란초 셰프?"

그렇다. 란초 바트 셰프.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몇 명의 사람들.

어디로 가는 것인지, 호텔 정문 쪽으로 향하던 인도팀 일행과 카페테리아 앞에서 딱 마주치고 만 것이다.

"아, 자네 혹시 한국팀의……."

"예. 맞습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란초 셰프."

"이렇게 만날 줄이야. 반갑네, 젊은 주루 마삭juru masak. 영어로 괜찮나?"

"네. 할 줄 압니다."

란초 셰프가 내게 내민 손을 맞잡는다.

'…… 이거…….'

내가 느낀 감상은 두 가지. 두껍고, 강하다.

안 그래도 인도 사람들은 악수할 때 손을 꽉 잡는다더니, 확실히 범상치 않은 악력이었고, 기억에 남는 감촉이었다.

'거의 곰 손바닥 느낌인데.'

예전에 식재료로 곰 손바닥을 다뤄본 경험이 있다. 그때는 털을 제거하고 물에 불려 더러운 각질을 완전히 긁어내어 제법 부드러운 감촉이었지만, 야생동물 특유의 꺼끌꺼끌한 감촉은 여전히 기억난다.

그때의 감촉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느낌.

마치 손 위로 가죽갑옷을 한 겹 덧댄 것 같았다.

"역시, 괜찮은 손이야."

"…… 감사합니다. 힘이 대단하시네요."

"이 나이에 현역에 남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거든."

의미심장하게 웃는 그를 보며 내가 물었다.

"이 시간에 단체로 나가시다니.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봅니다?"

"그렇긴 한데……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정보를 캐려고?"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조금 궁금해서요."

"하하, 농담이네. 우린 잠깐 저녁이나 먹으러 가는 길이었지. 이 호텔 식사는 우리한테 잘 맞질 않아서."

"아아."

하긴. 지금쯤이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긴 했지.

안 그래도 나 또한 방금까지 저녁이나 먹으러 갈 생각이지 않았던가.

뭐, 그럼 밥 먹으러 간다는 사람 길을 계속 막고 있을 필요도 없고. 나는 적당히 옆으로 물러서며 작별인사를 보냈다.

"식사하러 가시는 걸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

"아아. 잠깐만. 잠깐 기다려보게."

"?"

갑자기 내 말을 툭 끊고 들어오는 란초 셰프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그때, 그가 갑자기 날 향해 말한다.

"혹시 같이 식사나 한 끼 하지 않겠나."

"…… 예?"

"인연이 닿은 귀한 손님을 라씨lassi 한 잔 내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면 체면이 안 살아서 말이야."

갑자기? 날?

당장 내일 시합할 상대를?

그 속내를 읽으려 애쓰는 나를 향해, 그는 밝은 치열을 내보이며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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