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31화 (331/403)

331. 코리안 시크릿 웨폰.-1-

─Jingle bells, jingle bells. Jingle all the way~

홀로 길을 걷고 있으니, 열린 매장 문 저편에서 정겨운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린다. 이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예전 생각이 난다.

오래전. 회귀한 당시보다 훨씬 예전 이야기다.

당시의 나는 한국에서 자라 외국이라곤 여행조차 가본 적 없는, 자체적인 쇄국정책을 펼치던 학생이었고, 간신히 졸업한 대학의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막노동, 상하차, 신문배달, 주방 따까리 등등. 안 해본 일이 없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취준생이었다.

군대에서의 자그만 인연 덕에 부산에서 일자리를 구해 워킹 홀리데이를 통한 유학을 꿈꾸던, 갓 애송이 티를 벗은 청년이 그 시절의 류찬혁이다.

뭐, 이 시절의 이야기는 한 번 풀면 끝도 없으니까 대충 넘어가고.

왜 계절 이야기에서 갑자기 내 예전 이야기로 넘어갔느냐 하면, 그 시절의 내가 좀처럼 실감하지 못하던 것이 바로 계절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과학 교과서만 펼치면 가장 자주 나오는 레퍼토리 중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지구는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 기온이 항시 같은 수준으로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한다. 그리고 한반도의 경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지역 중 하나이다.' 어쩌구 하는 그거 말이다.

보통 대부분의 어른은 나이를 먹고 상식이 쌓이며 다른 나라 중에선 계절이 바뀌어도 기후가 크게 바뀌지 않는 나라도 있다는 걸 지식으로는 알게 된다.

하지만 봄엔 꽃가루, 여름에는 황사와 장마, 그리고 열돔, 가을에는 낙엽이 지고 겨울엔 철원에서 동상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에게 계절에 따라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는 법이다.

그런 감성을 지닌 채 처음으로 외국에서 년 단위로 장기체류를 하게 된 나는, 처음으로 계절이란 단어와 사계절이란 단어가 따로 분리된 이유를 깨닫게 됐다.

"그걸 안 때가 여기 온 다음이었지."

그래. 이 캐럴. 12월 말을 맞이하여 크리스마스를 앞둔 한국에서도 얼마든 들을 수 있는 노래지만…….

"그걸 이런 날씨에 들으니……."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

지금 당장에라도 적당히 서핑보드를 하나 챙겨서 해변으로 나가 비치베드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싶은 화창한 날씨.

바람의 소금기를 가득 머금은 해풍이 적당히 따스한 일광에 달아오른 몸을 기분 좋게 식혀주는 이곳.

"진짜,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괴리감 참 장난 아니야.

성탄절을 앞두고 들뜬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무수한 인파 앞에서, 나는 새삼스레 찾아온 괴리감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이애미는 지금 완연한 겨울이 한창이다.

***

"다녀왔습니다."

나들이를 명목으로 잠시 호텔 근처 시내에 나갔다 온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이는 바깥보다 안에 있는 게 편하다며 홀로 호텔에 남아 계시던 유동건 사장님이었다.

호텔방에 비치된 TV의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다 급기야 웹플릭스까지 뒤적이던 유동건 사장님은 내가 들어오기 무섭게 TV를 꺼 버리곤 현관까지 나와 나를 마중해주신다.

"어, 그래. 어서 와라. 별일 없었지?"

"예, 뭐. 한국이랑 별로 다를 거 없던데요."

"그래? 요즘 젊은 애들이 다르긴 다르네. 나 처음 외국 여행 갔을 때엔 보는 것마다 신기하던데."

"하하…… 뭐, 그런 애도 있겠죠."

"뭐야. 너는 다 컸다 이거냐?"

"그건 아니고요."

털털하게 웃는 유동건 사장님을 피해 방으로 들어가 옷걸이에 봄철용 얇은 재킷을 건다.

초가을만 돼도 제법 추울 차림인데, 크리스마스를 앞둔 마이애미에선 이 정도 차림으로도 살짝 덥게 느껴진다. 지구라는 건 참 대단하지.

어딘가 애매한 감상을 남기며 다시 TV 탐독에 들어간 유동건 사장님 근처 자리에 앉아 모처럼 가져온 태블릿을 든다.

'이게 분명 희연이 아버님이 선물로 사주신 거였지.'

년 단위가 지났어도 제법 상태가 깨끗하다. 조리도구는 빡세게 굴려도 전자기기는 아기처럼 다루는 내 관리 솜씨가 이럴 때 빛난다.

…… 아니 뭐, 사실은 기숙사 서랍에 박아두고 주에 한두 번 꺼내 쓰는 게 전부라 그런 거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묘하게 주말에 쉬시는 아버지를 떠오르게 하는 자세로 소파에 늘어져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유동건 사장님이 결국 마지막에 멈춰선 채널은 골프 채널이었다.

'4, 50대 어르신들은 뇌가 칼라로 이어져 있기라도 한 건가.'

우리 동네 아저씨도 그렇고, 유동건 사장님도 그렇고. 왜 어른은 저렇게 골프를 좋아할까.

'나는 저 나이 때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는데 말이야.'

할 줄 아는 스포츠 대다수는 교양이나 생활운동 정도로 배운 게 전부지, 진심으로 즐길 만큼 깊게 빠진 스포츠는 없었다. 애당초 먹고사는 것과 요리 공부만 해도 24시간이 모자랐으니까.

'그래도 뭐, 영 못 즐길 건 아니긴 했다만…….'

아마 회귀 전 내 생활에 조금 여유가 있었다면 나도 나름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지금 당장은 별 의미 없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당장 급한 건 내 과거사나 골프 이야기보단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쪽이다.

플로리다 마이애미 소재의 호텔에 체크인하고 벌써 반나절.

당장 첫 순서인 우리의 시합이 내일 모레니 약 이틀…… 아니. 이런저런 준비와 짐 정리 따위를 할 걸 생각하면 여유 시간이라곤 고작 하루밖에 없다.

이 태블릿을 모처럼 꺼낸 이유도 상대인 인도팀의 자료영상을 보고 간단한 복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꽤 오랜 시간 홀대한 것 치곤 제법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태블릿이었다.

그런 태블릿이었지만…….

"…… 묘하게 손에 안 잡히네."

"응? 뭐라고?"

"아뇨. 별거 아니에요."

사실, 간단한 복습을 위해서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제 와선 딱히 별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요 일주일 동안 좀비 세상에 홀로 남은 아저씨가 초록괴물 만화를 돌려 보듯 본 덕분에 이제는 영상이 아예 외워질 지경이었으니까.

이미 인도팀을 대비한 공부는 충분히 했다. 그것도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토대로 판단한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아무튼 지금 가진 걸로 더 이상 무언가를 더 해낼 수는 없겠다 싶을 정도란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게 또 아주 의미 없는 짓은 아닌 것이, 내 나름의 루틴을 지켜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는 목적도 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명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누구는 음악을 들으며 제 자신을 관조하는 법이다.

나 같은 경우엔 그게 공부일 뿐이고. 이렇게 보여도 학교에선 제법 모범생이었다. 중학교 때? 그건 잊고.

유동건 사장님이 언뜻 보기에 여유 만만한 것처럼 TV나 보고 계시는 것도 비슷한 거겠지. 평소 하던 습관을 반복함으로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종의 루틴일 것이다.

"아니! 30센치를 두 번 놓쳐서 버디를 보기로 만들어? 프로 때려 쳐 이놈아!"

…… 아마, 맞을 거야. 맞겠지. 응. 아마도.

그나저나, 이제 와서 궁금한 거지만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신 걸까.

분명 내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방에 계셨을 텐데, 시차 적응을 위해 햇볕을 쐬며 잠을 쫓고 돌아오니 유동건 사장님만 혼자 남아 계셨으니까.

다들 2억만 리 타향에서 호텔에 짐을 내리자마자 들러야 할 중요한 인연이라도 있으셨던 건가.

내가 의아해하며 질문을 드리자, 유동건 사장님은 당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신다.

"글쎄. 안영길 선생님 따라 다 같이 나간 것 같긴 하다만."

"다들 행선지는 따로 말씀 안 하고 나가셨어요?"

"말씀하시긴 했지. 어디였더라…… 아, 맞다. 분명 항공택배 수령지에 다녀온다고 하고 가셨다."

"항공택배 수령지요?"

항공택배 수령지라니, 혹시 여기 올 때 미처 못 챙긴 물건이라도 있으셨던 걸까.

어지간한 물건이면 그냥 현지에서 사서 쓰는 게 훨씬 편할 텐데, 굳이 항공택배를 받아야 할 정도면 현지에선 쉽게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거나, 혹은 굉장히 중요한 물건일 것이다.

근데 그런 걸 깜빡하고 한국에 두고 오셨다고?

'그런 실수를 하실 분들은 아닌데.'

내 동생 녀석이나 효민 선배처럼 덜렁거리는 사람이면 모를까, 철두철미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분들 아닌가.

잠시 의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지만, 이내 괜찮겠지 싶어 적당히 관심을 끊었다.

뭐, 사정이 있으신 거겠지. 아니면 사람이 살다가 실수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는 거고.

"좋다! 뻗는다, 뻗는다! 나이스 샷! 그렇게 할 수 있으면서 왜 진즉 그렇게 안 했어?!"

"……."

딱히 TV화면 너머 한국인 프로선수를 우디르처럼 태세전환하여 응원 중인 유동건 사장님의 모습에 질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래서야 집중은 잘 안 되겠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도 오늘 하루는 머리에게 휴식 시간을 준다 생각하고 적당히 끝내기로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유동건 사장님 주변에 있던 빈자리에 착석. 한창 흥겨움을 온몸으로 뿜뿜 뿜어내시는 사장님을 따라 나도 골프에 시선을 향한다.

티잉 그라운드부터 핀까지 대충 500야드가 살짝 안 되는 거리. 5파 홀에서 드라이브 샷으로 단번에 300야드를 넘긴 한국인 프로 선수가 세컨드 샷을 친다.

호두 정도 크기의 새하얀 골프공이 하늘을 날고 또 날아, 이번에는 그린에 안착…….

"오."

그린 위에 떨어진 골프공이 구른다. 심지어 그린의 라인을 제대로 타고 구른다.

얼마나 강하고 정확하게 굴렀으면 세차게 그린 위를 질주한 공은 핀의 깃대에 정통으로 부딪치더니, 그대로 컵 안으로 쏙.

"알바트로스?"

세상에. 살면서 저걸 진짜 보는 날이 오네.

홀인원보다 어렵다는 알바트로스를 직관한 갤러리가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기립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장면이 리플레이로 돌아간다.

잠시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때, 갑자기 유동건 사장님이 내게 말을 건네신다.

"아, 알바트…… 아니, 그것도 그건데. 찬혁이 너 혹시 골프 좀 아니?"

"예? 아. 네. 조금 정도는……."

"이야! 너만 한 나이에 골프 아는 애는 처음이다! 그럼 찬혁이 너도 방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겠구나?!"

"에, 예에…… 알바트로스죠? 파보다 3타 적게 쳐서 홀컵에 넣으면 나오는."

"그렇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어! 내가 이런 인재를 두고 여태까지 몰랐을 줄이야! 자자, 딱 앉아봐라. 내가 지금부터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주마!"

뭐지, 지금 나 좀 안 좋은 스위치를 밟은 건가.

마치 말이 전혀 안 통하는 외계 행성에 살다가 수십 년 만에 고향 땅 사람을 만난 사람처럼, 유동건 사장님이 두 눈을 번뜩이며 날 향해 의자를 당겨 앉는다.

그 후로 약 세 시간.

적당한 휴식으로 심신을 달래고 싶었던 나는,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다른 세 분이 호텔에 돌아오실 때까지 장장 몇 시간에 걸친 한국 골프의 역사와 앞으로의 발전에 대한 강의를 코로 탄산음료를 들이켜는 것 마냥 꼼짝 않고 들어야 했다.

역시, 사람은 어디 가서 뭘 아는 척하면 안 된다. 특히 그걸 아주 좋아하는 사람 앞이라면 결단코.

그런 깊은 교훈을 얻은 날이었다.

***

다른 세 분의 귀가로 간신히 강제적인 무지성 골프 역사학 강의가 끝난 뒤, 저녁시간이 거의 다 돼서 돌아오신 교장 선생님이 무안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미안합니다. 수령지에서 택배 검사를 받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택배 검사요?"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차윤구 셰프가 직접 들고 오신 화물을 살폈다.

한 번 뜯겨나간 흔적이 가득한 뽁뽁이가 돌돌 말린 종이 상자.

한 사람이 혼자서 거뜬히 들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의 박스 안에 든 게 뭐가 그리 많아서 이토록 늦게 귀가하신 걸까.

그런 의문을 담아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자, 교장 선생님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신다.

"아무래도 미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물건들이었는지, 검사를 아주 꼼꼼하게 하더군요."

미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물건'들'?

대체 한국에서 뭘 항공택배로 보냈기에?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런 내 반응이 즐거우신 듯, 교장 선생님의 미소는 점점 깊어져만 간다.

"저도 팀장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가끔은 팀장 역할을 해내야죠."

하하.

평소 소리 내어 웃는 일이 거의 없는 교장 선생님이 꺼내신 웃음소리에 난 무심코 깜짝 놀라 교장 선생님을 바라본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하잖아요? 꼭꼭 숨긴 비밀무기가."

비밀, 무기……?

그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내 손에 들린 상자는,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게로 내 팔을 짓누르고 있었다.

8강전 첫 시합이 머지않은 마이애미에서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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