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 to the next stage.-6-
최종시합 시작 직전.
영국팀의 셰프들은 스테이지 바로 뒤편 임시 휴게실에 모여 열띤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물론 대화의 주제는 곧 있을 시합에 대한 것.
그러나 그들은 시합에 대한 대책을 내놓기보다는, 어딘가 불편한 사람들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윌리엄 셰프. 다음 시합, 괜찮을까요?"
"…… 글쎄요. 확실하진 않지만, 우리가 불리하단 건 분명하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시합의 주제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게는 분명 불리한 점이 많았으니까.
왜냐하면 대부분의 유럽 국가의 주식은 빵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빵이 아니라, 반죽 발효 과정을 거치는 빵.
빵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드는 요리다. 발효가 필요한 부푼 빵이라면 반죽부터 완성까지 못해도 두 시간은 필요하다.
문제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주식으로 소모하는 빵이 바로 이러한 빵이라는 것이다.
메뉴의 가짓수가 무제한인 상황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면 여러 가지 빵을 구워 간단한 사이드디쉬와 함께 제공하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일 터.
'하지만…….'
제한시간 30분. 그 조건이 영국팀의 발목을 잡는다.
물론 제작진도 무턱대고 불리하기만 한 승부를 해내라고 윽박을 지를 사람들은 아니다.
이미 정확한 공정을 거쳐 해동을 끝낸 최고급 냉동생지를 종류별로 지급할 준비를 끝냈고, 거기에 더해 시합시작 전 조리기구를 준비할 시간도 따로 빼준다.
말 그대로 '미리 준비된' 상태에서 시작되는 시합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대결은 여전히 영국팀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당장 그들의 상대인 인도 또한 주식이 빵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난과 로티 등의 빵은 발효 과정이 비교적 굉장히 짧고, 오븐에서 굽는 시간 또한 1분 내외로 끝나는 아주 간단한 형식의 빵이다.
그 말은 즉, 0부터 10까지 모든 걸 자기 원하는 대로 컨트롤 가능한 인도팀에 비해 영국팀은 자유의지가 제한되어 있다는 뜻.
그것이 그리 치명적인 패배의 요인이 되진 않겠지만, 서로 비등한 실력을 가진 이들의 시합에선 약간의 차이가 승패를 가르는 법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다른 나라의 주식을 메뉴로 삼는 게 낫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겠으나, 타국의 주식을 무기 삼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다.
주식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먹는 요리의 종류.
아무리 요리공부를 많이 한들 50살 서양인이 먹어본 쌀밥의 양은 기껏해야 열 살 한국 꼬마아이가 먹은 것보다도 적다.
세월을 따라 쌓인 요리의 스펙트럼 수준이 다르다.
그렇기에, 영국팀은 함부로 다른 나라의 주식에 손을 대기 꺼리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메뉴를 준비한다고 해봐야 미국이나 이탈리아, 프랑스 정도…….'
그나마 비슷한 문화적 가치관을 공유하지만, 그것도 기껏해야 유럽이란 울타리 안에서 하는 이야기다.
그의 조국인 영국마저 한 나라가 네 개로 나뉘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마당에 바다 건너 타국은 어련할까.
"힘들겠어……."
윌리엄이 작게 한탄을 뱉는다. 사실, 그의 조국은 좋게 말해도 다양한 방법으로 주식을 즐기는 나라는 아니었다.
반쯤 국교나 다름없는 성공회의 교리가 미식 대신 검소한 식생을 미덕으로 여기는 탓인지, 아니면 그냥 어릴 적부터 길러진 식습관 탓인지.
굳이 정확한 이유를 이 자리에서 밝힐 필요는 없겠으나, 여러모로 가슴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몰래 흘린 한숨을 귀가 째질 듯 높이 울려 퍼진 부저 소리가 지운다.
시합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
'이 주제는 영국이 좀 힘들겠어.'
아니. 정확히는 인도가 유리한 건가.
스테이지 중앙에서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양측으로 갈라지는 셰프들을 보며 턱을 괸 채 생각한다.
이유는 물론 있다. 인도는 주식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나라다.
애당초 인구가 물경 십수억에 달하는 나라다. 그만큼 땅도 넓고, 땅이 넓으면 같은 나라여도 문화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물론 기본적인 사상 정도는 공유하겠지만 기후나 풍토에 따라 어떤 곡식을 어떻게 조리해서 주식으로 삼았느냐. 다양성이란 측면에선 영국과 크게 수준이 갈린다.
'뭐, 영국팀도 아무 생각이 없진 않겠다마는.'
사실 메뉴 가짓수도, 어느 국가의 주식을 모토로 삼을지도 제한하지 않는 상황이니 식생이 비슷한 여타 유럽 국가의 주식을 가져와 스펙트럼을 늘리는 것도 방법이겠지.
네이티브를 주력으로 삼는 팀을 그런 방법으로 이기긴 어렵겠지만.
이것도 결국 예시 중 하나일 뿐이지, 정작 어떤 방법으로 나올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운이 나빴어."
두 번째 시합 주제였던 해산물 같은 경우도 사실 영국팀에게는 불리한 주제였다. 섬나라치고 생선 소모량이 그렇게 적은 나라가 얼마 없거든.
그걸 잘 이겨냈으니 다음은 좀 괜찮은 게 나오지 않으려나 싶었으나, 결과는 결국 이렇다.
'살 떨리네…….'
나만 아니면 된다고 떠벌리긴 했지만, 만약 뽑기로 이렇게 불리한 상황이 여러 번 나온 게 우리 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 한구석이 아리다.
어쨌든, 시합은 예정대로 시작했다.
잠깐 조리도구와 환경을 조성할 시간을 가진 뒤, 심판의 신호에 따라 각 팀의 셰프들이 스테이지 위를 내달린다.
초반 움직임을 읽으면 이후 나올 메뉴는 얼추 예상할 수 있을 터.
숨 가삐 내달리는 셰프들의 뒤를 따라 내 눈도 데굴데굴 구른다.
'어디 보자. 영국팀은 역시 빵이구나.'
그야 당연한 건가.
영국팀이 가장 처음 잡은 재료는 해동이 끝난 냉동 생지다. 기본적인 식빵용 생지, 머핀용 생지, 파이용 생지. 크루와상 생지 등등. 그 외에도 다양한 생지가 알맞게 소분 되어 오븐 속으로 들어간다.
최소한의 2차 발효를 생각하면 발효기에서 10분. 굽는 데 15분. 나머지 5분 안에 깔끔하게 끝내겠다는 계산일까.
'다른 재료는 베이크드 빈즈에 계란, 베이컨…… 스탠다드한 조식부터 시작해서 햄, 치즈, 채소로 샌드위치, 한쪽은 소스를 준비하고 있네. 잉글리시 머핀 같은 종류나 베이글도 시험할 생각인가?'
음. 생각보다 훨씬 무난하고 안정적인 시작이다.
빵의 역사는 깊다. 인간의 주식으로 이용된 시간이 아주 길기 때문에 엄청난 연구가 진행되어 발전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여전히 발전하는 중인 요리.
그러니 시간과 재료만 충분하다면, 저처럼 '빵'이라는 소재 하나로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은 시간이 좀 모자라긴 하지만…….'
다행히 제작진 측에서 지원한 재료로 부족한 시간을 어떻게든 충당한 상황.
여기서 어떻게 내용을 풀어나가느냐. 그건 영국팀의 손에 달린 일이다.
그런 한편, 인도팀에서는 이쪽 나름대로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역시 난하고 밥으로 기초를 다질 생각인가."
인도팀의 조리대는 난 반죽과 인도식 볶음밥인 비리야니를 만들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여기까지는 사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애당초 인도팀이 그 두 가지 요리만큼 강력한 무기를 두고 시합에 임할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인도팀의 요리를 본 내가 놀라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다.
난 아마 이 시합이 시작된 뒤, 가장 크게 놀라는 중이었으니까.
"허?"
조리대에서 한 발짝 물러난 곳. 인도팀이 따로 마련한 하나의 테이블. 그리고 그 앞에 선 인도팀 팀장, 란초 셰프.
마치 혼잡한 주방에서 혼자 격리된 것 같은 모양새에 나는 잠시 의문을 품었다.
지푸라기라도 움켜잡아야 할 지금 이 때에 팀에서 가장 강한 전력이 빠지다니?
그러나 그 의문은 이윽고 경탄으로 바뀐다.
란초 셰프가 독차지한 테이블 좌우로 특이한 형상의 받침대가 펼쳐진다.
그걸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마치 테이블 하나에 컵홀더 구멍만 수십 개가 뚫린 받침대가 달라붙은 형상이라고 해야 할까.
나나 관객이 그 테이블의 정체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란초 셰프는 어디선가 튀어나온 엄청난 크기의 캐리어에서 자그마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꺼내든다.
"항아리?"
자그마한 물건의 정체는 바로 항아리였다.
아마 주먹 한 개 정도가 간신히 들어갈 크기의, 자그마한 항아리.
색도 모양도 크기도. 외양이 너무나 닮아 도통 구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모양을 한 수십 개의 자그마한 항아리를 집어든 란초 셰프는, 이윽고 처음 테이블 좌우로 펼친 받침대의 구멍에 그 항아리를 집어넣는다.
"아하."
과연. 저 받침대에 컵홀더처럼 난 구멍은 저런 용도로 쓰이는 것이었구나.
하지만 받침대는 그렇다 치고, 저 수많은 자리를 차지한 항아리들은 대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애당초 무슨 항아리를 저렇게 수없이 들고 다닌단 말인가. 절로 그런 생각이 들 찰나, 순식간에 모든 구멍에 항아리를 끼워 맞춘 란초 셰프는 굳게 닫힌 항아리의 뚜껑을 하나씩 열어젖히기 시작한다.
행사장에 자리한 좌중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다. 물론 카메라도 같이.
이 자리에서는 잘 안 보였으나, 카메라의 렌즈는 항아리 속 내용물의 모습을 정확히 비춘다.
"저건……."
가루?
카메라가 비춘 항아리의 내부. 그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가루가 가득하다.
색은 옅은 초록색.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모양에, 내 뇌리에 무심코 정답이 스친다.
"어, 잠깐만.…… 아니, 진짜로?"
항아리 속 내용물. 그 정체는 아마 향신료다. 아니, 틀림없이 향신료가 맞다.
저 색은 말린 이파리를 빻아 만든 가루형 향신료에서 종종 보이는 색이다. 고성능 카메라에 비친 그 모습을 내가 착각할 리가 없다.
설마, 그렇다는 건…….
"저 항아리에 든 게, 전부 향신료라고?"
언뜻 봐도 손가락, 발가락을 합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항아리의 개수.
만약 저 항아리가 저마다 다른 종류의 향신료라면, 그건 아마 인도…… 아니, 적어도 중부 아시아, 남부 아시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향신료의 총집합이다.
란초 셰프의 손에 항아리 뚜껑이 열리면 열릴수록, 내 생각은 점차 확고한 정답으로 변해간다.
항아리가 열릴 때마다 보이는 색채가 다르다. 질감이 다르다.
어떤 것은 붉고, 어떤 것은 노랗고, 어떤 것은 까맣다.
어떤 것은 가루고, 어떤 것은 커드 같은 덩어리고, 어떤 것은 식물의 줄기처럼 곧다.
나조차 그 전부를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향신료.
마침내 모든 항아리의 뚜껑을 연 란초 셰프는, 이윽고 지금껏 본 광경 이상으로 충격적인 행동을 취한다.
깔끔하게 닦인 테이블 위에서, 온갖 색채의 향신료가 뒤 섞인다.
"맨손? 계량도 없이?"
간단한 전자식 저울조차 없이, 선 그 자리에서 두 손만을 사용해, 가루 한 톨의 감각을 몸으로 느끼며 테이블 위에서 뒤섞는 란초 셰프.
허리춤에 매단 커다란 수건은 이럴 때 쓰기 위해 있는 것일까.
손으로 퍼담은 향신료를 뒤섞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고, 혼합 향신료를 조제하자마자 각자 다른 요리를 만들던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것을 넘기고 수건으로 손을 닦은 뒤,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다만, 이번에는 뒤섞는 향신료의 비율이 다르다.
란초 셰프. 그는 이 자리에서 실시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영국팀에게 반드시 이기기 위한, 그만의 특제 가람 마살라를. 각각의 요리에 알맞게 실시간으로 커스텀해서.
"실화냐……."
만약 저렇게 만든 가람 마살라가 완벽하다면, 감히 말하건대 그는 저 분야에선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지.
그리고 아마…… 이건 내 직감이지만.
'완벽할 거야.'
위기감이 경종을 울린다.
여태껏 수많은 실력자를 두 눈으로 보고 길러진 안목이 내게 외친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이, 우리의 다음 상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