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 to the next stage.-6-
"겨,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인도 대 영국! 영국 대 인도! 그 첫 번째 시합의 승자는……!"
고요가 내려앉은 행사장. 스테이지 중심에서 MC가 외친다.
"인도! 인도팀 팀장! 란주 바트 셰프의 승리입니다!"
역시나.
역시, 승부의 행방은 내 예상대로 흘러갔다. 란주 셰프. 그의 마지막 한 수가 윌리엄 셰프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된 것이다.
'사실 요리의 격만 따지면 결과는 반대였겠지만…….'
투르네도 로시니라는 메뉴가 가진 파괴력은 분명 보통 상황에선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하다.
고기 자체가 가진 맛에 더해, 쉬이 따라가기 힘든 푸아그라의 크리미한 맛, 트러플의 풍미. 푸아그라 기름으로 구워 크루통처럼 바삭하게 만든 식빵의 고소함과 식감.
이 모든 요소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이를 능가하는 요리가 나오는 건 쉽지 않다.
'나도 쇠고기로 저걸 맞상대하라면 자신이 없으니까.'
사실 쇠고기가 아니라 어떤 주제를 가져와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러나 란초 셰프는 그걸 다른 방향에서 공략했다.
"기버터라…… 확실히, 그런 방법이 있었네."
맛있는 기름. 같은 맛의 충돌.
시합에서 비슷한 맛을 지향하는 요리로 승부를 겨루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요리조차 완벽히 같은 맛이 되는 일은 별로 없고, 때문에 심사하는 이의 미각이 무뎌지는 일도 많지 않다.
짠맛에도 소금과 간장으로 느낄 수 있는 감칠맛의 차이가 있고, 단맛도 얼음설탕과 설탕, 물엿의 차이가 있다. 혀가 무뎌지는 매운맛조차 마와 랄, 그리고 와사비 등의 휘발성 매운맛이 따로 존재한다.
그러나 기름. 기름만큼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튀김 같은 경우, 튀김옷 속 내용물이 달라지더라도 튀김의 맛 자체에는 금방 질리게 된다.
소스나 곁들이는 반찬 따위로 질리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긴 하지만, 튀김옷 속에 스며든 기름이 입 전체에 코팅되면 그다음부터는 얄짤 없다.
설령 전혀 다른 맛의 기름이 들어온다 해도 이미 입 전체를 감싼 코팅을 단번에 벗겨내는 건 불가능하다.
본래 첫입에 피크를 찍고 점차 내려와야 할 맛의 그래프가, 반대로 낮게 시작해서 잠깐 올라가다가 다시 바닥을 치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그냥 튀김이었다면 또 몰랐겠지만…….'
란초 셰프가 사용한 건 인도 본토에서 가져온 최고급 기버터. 푸아그라에도 맞설 수 있는 풍미를 지닌 기름.
힘 싸움으로 단번에 밀어내지 못한 이상, 이 결과는 필연적이었다.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캐비어처럼 감칠맛과 짠맛이 강한 재료를 스테이크와 푸아그라 사이에 한 겹 깔아 강렬한 맛으로 임팩트를 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에는, 입에서 천천히 녹이며 풍미를 즐기는 푸아그라의 맛이 퇴색되었을 터.
'여러모로 가불기에 걸린 거지.'
거기다 임팩트 싸움에 들어가도, 인도의 향신료에 맞먹는 임팩트를 연출하기는 여간 쉬운 게 아니다.
이미 요리가 완성 단계에 접어든 상태에서는 어쩔 방도도 없었을 터.
전략 단계에서 말리고 들어간 게임이 막판에 달한 이상, 아무리 윌리엄 셰프라도 뒤집기는 어렵다.
그렇게, 팀의 자존심을 건 대장전의 영광은 인도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럴 때 두 셰프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핸드폰을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심사단 입에서 인도의 승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튕겨서 못 들어가더라.
그쪽에서도 그만한 재료를 쓰고 패배했다는 게 어지간히 커다란 사건이었나.
언뜻 찾아본 인터넷 커뮤니티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응 느그 윌가놈 졌죠? 수준 나왔죠?
─어떻게 푸아그라에 트러플 갖다 쓰고 개털리냐ㅋㅋㅋㅋ
─처음에 못 이길 것 같으니까 외노자 티낸다고 개소리 뱉던 놈들 다 어디 갔죠?
─아니 요리 수준은 영국이 훨씬 높은 건 팩튼데?
─요리수준 팩튼데 ㅇㅈㄹ
─요리 수준 높아서 지셨구나
─그만큼 수준을 모르신다는 거지~
…… 아주 개판이 따로 없네.
처음부터 승패에 대한 결과 같은 건 상관없이 무지성 어그로만 보고 찾아온 분탕과 거기 반응한 실드가 모여 참으로 난장판이 됐다.
일단 딱히 저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패스.
조용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상황을 지켜본다.
곧 시작할 단체전에 앞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대기실로 돌아가는 각 팀의 셰프들.
인도팀의 분위기는 여전히 사막처럼 삭막하다. 이긴 게 기쁠 만도 한데, 크게 웃는 기색도 없이 다음 시합에 대비한 대책을 마련하기 바쁘다.
영국팀에서도 날카로운 기류가 흐르는 건 마찬가지다. 다음 팀전에서 패배하면 그대로 끝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시작부터 아주 치열한 개인전이었다.
스탠다드한 요리 실력이 뛰어난 윌리엄 셰프.
의표에 의표를 찌르는 발상을 선보인 란초 셰프.
두 팀 중 어떤 팀이 위로 올라올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어느 쪽이든 상대하기 힘들 거란 건 똑같구만.'
영국팀도 이대로 당하고만 있진 않겠지.
아까 커뮤니티 불판에서 봤던 글 중 '요리 수준은 영국이 더 높다'는 말은 나도 동의한다.
각각의 요리를 긴 시간차를 두고 먹었다거나, 술이라도 몇 잔 곁들였다면.
아니, 심사를 받는 순번만 반대였어도 결과 또한 마찬가지로 반대가 되었으리라.
란초 셰프의 임기응변과, 처음 시크 케밥이라는 기버터를 활용하기 쉽고 빨리 완성되는 메뉴를 고른 행운.
물론 그조차 기본적인 실력이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애당초 윌리엄 셰프의 솜씨가 별로였다면 그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팀전은 지금보다 더 치열해지겠어.'
서로가 서로를 쉽게 볼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을 테니.
"다음 판은 영국팀이 이겼으면 좋겠는데."
아, 오해하지 마라. 딱히 영국팀을 편드는 게 아니니까.
다만 시합을 오래 끌수록 그 팀의 정보를 더욱 많이 뽑아낼 수 있어서 그럴 뿐이다.
심저에 살짝 음험한 소망을 품고, 숨을 죽인다.
다음 시합이 시작할 때가 머지않았다.
***
"제2시합! 그 승리를 가져가는 건 영국팀입니다! 이로서 영국팀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와아아아아!!
뭐지. 신기가 있나. 돗자리 깔아야 하나 이거.
회귀한 뒤로 가끔 드는 잡생각을 쳐내고 나는 상황을 살폈다.
두 번째 시합의 주제는 해산물.
윌리엄 셰프를 필두로 한 영국팀은 버터 소스 해산물 스파게티와 랍스타로 만든 스프, 그리고 깨를 듬뿍 입혀 구운 참치 스테이크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인도팀도 향신료에 새우를 볶은 프론 타와 마살라Prawn Tawa Masala, 굴 튀김, 랍스터 구이 등의 요리로 선전했지만, 심사단 판정 2:1로 영국팀이 판정승을 기록했다.
결국 마지막 대결을 앞둔 두 팀.
서로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낭떠러지 끝에서 서로를 향해 창을 들이민 형국이다.
과연 한 사람만 오를 수 있는 계단을 차지하는 건 어느 팀이 될 것인가.
마지막 승부. 비로소 두 팀의 운명을 가를 마지막 주제 선택이 시작된다.
수없이 점멸하며 온갖 물음표 모양의 박스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빛.
좌중의 시선이 숨 가쁘게 쏘다니는 빛을 따라 정신없이 이동하고, 점점 그 속도가 느려질수록 긴장감은 반비례하여 치솟는다.
그리고…….
"주제가 결정됩니다! 인도 대 영국! 영국 대 인도! 최후의 시합! 그 주제는!"
MC의 호령에 맞추어, 몇 번의 점멸과 함께 빛은 점차 제자리를 찾아 발걸음을 늦췄다.
마지막으로 빛이 멈춰선 곳에서, 비로소 멈춘 빛은 물음표 아래 가려져 있던 주제를 우리에게 선보였다.
"주식! 마지막 시합의 주제는, 주식입니다!"
주식? 빨갛고 파란 그거?
…… 물론,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주식主食. 말 그대로 주로 먹는 음식.
한국의 밥, 서양의 빵처럼. 국민이 가장 주로 끼니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
"선수 본인의 조국이든, 혹은 외국이든! 아니면 상대팀의 나라든! 어느 나라의 것이든 괜찮습니다! 주식을 만들어주세요!"
어렵다. 지극히 어려운 문제였다.
주식이라고 하면 언제나 먹는 음식이니 만들기도 편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를 들어 이게 쌀이 주식인 나라와 빵이 주식인 나라의 대결이라고 해보자.
우리나라만 해도 밥만 먹고 살진 않는다. 하물며 빵을 먹고 나는 사라는 어떻겠는가.
주식이라는 이름 아래 내놓을 수 있는 요리의 가짓수는 말도 안 되게 많다.
이미 내가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 정리가 안 되는 상황. 그런데 거기에 더해 이건 시합이다.
시합인 이상 상대를 이길 수 있는 메뉴를 내놓아야 하고, 이기려면 상대가 내놓을 음식이 무엇인지 예측하고 그에 대항할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상대 또한 마찬가지로 엄청난 가짓수의 요리를 내놓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요리 솜씨 또한 좋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에 비례해 상대의 수단을 예측하는 눈치 싸움 또한 격렬할 터.
그러나 개최측은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 없는지, 이미 불타는 도화선 위로 신나서 기름을 흩뿌렸다.
"거기에 더해, 이번 주제에서만 적용되는 특별한 룰이 있습니다!"
"특별한 룰?"
대체 이번에는 무슨 소리를 하려 저러나 의아한 시선을 향하는 관중과 선수들 앞에서, MC가 말을 잇는다.
"이번 시합에서는 메뉴 가짓수의 제한이 없습니다!"
"…… 뭐, 라고?"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이 시합에서 가장 힘든 점이 만들 수 있는 요리가 너무 많다는 것인데, 아예 세 접시란 제한마저 풀어 버리겠다는 뜻 아닌가.
"선수 여러분께선 주제와 시간제한만 맞으신다면 요리를 몇 접시든 만들든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주식이란 매일매일 먹는 음식!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만드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선 안 되겠죠!"
맞는 말이었다. 일단은. 화가 나긴 하지만.
매일 같이 만드는 데에만 몇 시간씩 걸리는 요리를 먹을 순 없을 테니까.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금방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틀린 소리가 아니다.
…… 잠깐만, 이 빌드업은 설마…….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제한시간은 30분! 30분 이내에 요리를 완성하여 제출하셔야 합니다!"
역시나.
설마설마 했지만 이토록 극단적인 제한시간을 걸어 버릴 줄이야.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한 선수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제한시간. 가짓수 무제한.
이 두 가지 키워드에서 도출되는 해답은 한 가지 뿐이었다.
"치킨 레이스."
혹은 드래그 레이스.
누가 먼저 퍼지느냐. 누구의 발상이 먼저 바닥나느냐.
이 시합. 단순한 실력만으로는 쉬이 이겨낼 수 없는 가혹한 싸움이 된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내 얼굴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었다.
"좋은데."
사람의 본성은 궁지에 몰렸을 때 나온다.
마찬가지로, 요리사의 본 실력 또한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알 수 있다.
실력정찰이란 목적 아래, 이보다 귀중한 기회는 또 없었다.
뭐? 나도 같은 요리사 아니냐고?
불쌍한 마음은 들지 않냐고?
그럴 때를 위해 우리나라의 유명한 천하장사분이 하신 말씀이 한 가지 있지.
뭔지 아는가?
"나만 아니면 됐지."
아 내가 힘든 거 아니잖아.
본래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구경이 불구경, 싸움구경 아니겠나.
마침 여기도 그렇다.
불이 붙은 채 꽁지 빠져라 싸우는 두 팀을 멀찍이서 구경하는 거.
완전 1+1 혜자 상품이 따로 없었다.
그래. 선수라서 입장 티켓 비용을 따로 지불 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특히.
인간 류찬혁의 혐성이 여기서 드러난 것 같단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지만, 뭐…….
"딱히 괜찮지 않을까?"
재밌으니까.
유익한 건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