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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26화 (326/403)

326. to the next stage.-4-

'이거 제대로 진행 가능한가?'

그런 내 의문이 무색하게도, 란초 셰프는 별다른 반박 없이 주제를 받아들였다.

'윌리엄 셰프를 향한 대항의식인가?'

저쪽에서 지목을 받아들였으니 그쪽의 주제 선정을 거절할 순 없다는 체면치레용 선택일지도.

'뭐, 그거야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어찌 됐든 시합은 시작됐고, 주제는 변함없이 쇠고기다. 그렇다면 내게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관찰.

두 팀 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이가 팀장을 맡고 있단 걸 생각하면, 이건 각 팀의 최고전력 수준을 가늠할 좋은 기회다.

영국은 고급요리의 주재료인 쇠고기로 얼마나 뛰어난 요리를 만드느냐로.

인도는 쇠고기라는 난처한 식재료를 얼마나 잘 소화해내느냐로.

평균적인 실력과 위기대처능력을 각각 검증할 수 있는 기회.

'솔직히 조금 예상 바깥의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걸 그냥 놓칠 순 없지. 곧 있을 시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가 될 테니까.

심판이 시합 개시를 선언하자, 두 셰프는 서로 발 빠르게 움직인다.

그들이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역시 재료. 그중에서도 고기를 가장 먼저 손질한다.

'나였어도 그랬겠지.'

고기는 속까지 간이 배는 데에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리는 식재료다. 다른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고기를 먼저 손질하고 시즈닝, 혹은 마리네이드를 해두어야 조리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측이 준비한 고기를 살핀다. 그 정도만 얼추 봐두어도 그들이 무엇을 요리할지는 대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셰프는…… 필레미뇽? 사토브리앙이 아니라?'

필레미뇽과 사토브리앙은 소 안심의 특정 부위를 칭하는 말이다.

필레미뇽은 안심 중에서도 머리와 가까운 가장 두꺼운 부분.

그리고 사토브리앙은 꼬리 쪽의 얇은 부분을 길게 남겨 자른 것을 말한다.

사실 소에서 나오는 고기 전체의 양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부위지만, 유럽식 스테이크에서 이보다 높은 취급을 받는 부위는 많지 않다.

그리고 보통 그 두 가지 부위 중 조금 더 고급으로 치는 것이 사토브리앙.

어마무시하게 부드러운 육질이 인상적인 부위이기에, 보통 고급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 최고의 메뉴라 하면 사토브리앙 스테이크를 꼽는다.

'그런데 필레미뇽이라…….'

필레미뇽 역시 아주 훌륭한 부위긴 하지만 사토브리앙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

그럼 사토브리앙을 고르지 않은 이유가 뭘까.

손가락 두 마디 반 정도의 길이로 자른 필레미뇽을 요리용 실로 묶는 윌리엄 셰프에게서 눈을 돌려, 이번에는 란초 셰프를 본다.

'어디 보자…….'

란초 셰프는 다행히 힌두교 교리에 맞는 쇠고기를 준비하는 데에 성공한 듯싶었다.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고기에는 손도 못 대고 있었을 테니, 어련히 알아서 구했겠냐마는.

'율법에 따라 도축한 고기는 못 찾았나? 하긴, 한국에서 그런 곳 찾기가 좀 쉬울까.'

이슬람 쪽 할랄에 따라 도축된 고기는 또 몰라도, 힌두교 율법까지 신경 써서 도축한 고기를 파는 정육점은 대한민국 전체를 뒤져도 몇 곳 안 되리라.

'색을 보니 아무래도 수소 같은데.'

윌리엄 셰프가 준비한 쇠고기에 비교하면 묘하게 더 붉은빛이 강하고, 지방이 눈에 잘 안 띄는 걸 보면 수소가 맞으리라.

고기의 질에서는 이미 차이가 벌어진 상황.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할까.

한 부위로 분류할 수 없는 잡다한 부위의 고기를 한데 모아 한꺼번에 손질하는 란초 셰프를 빤히 바라보던 그때, 갑자기 란초 셰프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시작한다.

"어?"

─탕! 타다다다다!

어린애 하나는 너끈히 누울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도마에 손질한 고기를 전부 올려 얼기설기 썰더니, 마치 중국의 중식도 같은 모양새를 한 척 보기에도 무거운 칼을 두 자루나 꺼내선 쌍수로 잡고 도마 위의 고기를 내려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타다다다다다!

난타공연의 클라이맥스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속도. 두 칼의 첨단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고, 저러다 도마가 쪼개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만큼 강하다.

그 행동의 목적은 누가 보아도 뻔히 알 수 있겠지.

"다지고 있잖아?"

다지고 있는 것이다. 고기를. 그것도 굳이 손수 칼을 써가며.

다진 쇠고기로 만든 요리. 많다. 너무 많아서 세기도 힘들만큼 많다.

한국에는 떡갈비나 너비아니, 혹은 만두 따위에도 쓰이고, 중국에서는 간단한 볶음밥이나 그 외 잡다한 요리. 일본에서도 비슷하다.

서양 쪽에선 미트볼이나 미트파이, 라구 소스, 아니면 햄버거 패티 따위도 다진 쇠고기로 만들고, 아무튼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쓰이는 게 다진 쇠고기다.

하지만 인도라면 생각나는 건 딱 하나다.

"케밥을 만들 생각인가."

케밥. 본래 대중 사이에서 케밥이라 하면 인도보다는 터키를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당연하다. 케밥이란 게 원체 터키의 전통요리니까.

하지만 인도에도 케밥 문화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다진 고기로 만드는 케밥이라면…….

"시크 케밥seekh kebab을 만들려는 거구나."

시크 케밥. 확실히, 보통은 양고기로 만들지만 쇠고기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요리지.

시크 케밥은 다진 고기에 인도 특유의 다양한 향신료를 가미하여 고기 반죽으로 만든 뒤, 그걸 꼬치에 핫도그처럼 붙여서 탄두르에 구워 만드는 음식이다.

메인급 요리인가? 하고 물으면 사실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는 음식이긴 하다. 보통 인도식 레스토랑에서는 애피타이저로 잘 나오는 메뉴니까.

'하지만…… 현명한 선택이야.'

고기를 다지면 수소 특유의 질긴 육질이란 약점은 최소화된다.

향신료를 섞으면 강한 육향도 크게 문제가 안 되게 바뀐다.

기름기가 없어 퍽퍽하단 문제점도, 그냥 단순히 다진 우지를 섞어 넣으면 해결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약점이 강점이 됐어.'

조직이 치밀하다는 건 작게 다져도 충분한 식감을 줄 수 있다는 뜻. 특히 저렇게 직접 손으로 다지면 입자가 균일하지 못해서 더더욱 재밌는 식감이 된다.

예를 들어 외국에서 고급 소시지를 만들 때 일부러 고기를 고르지 않게 갈아서 좀 더 탄력 있는 식감을 연출하듯이 말이다.

육향도 역시 마찬가지.

육향이 강한 수소를 사용한 덕분에 향신료에 묻히지 않고 쇠고기의 특징을 맛깔나게 살릴 수 있게 됐다.

'과연, 메뉴 선택 센스가 상당해.'

란초 셰프. 얕볼 수 없는 작자라는 게 이걸로 확실해졌다.

자신의 약점을 이토록 쉽게 강점으로 바꿀 줄이야.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코 당황하지 않는 침착함. 가장 올바른 길을 찾는 판단력. 무엇 하나 빠질 게 없다. 과연 한 팀의 우두머리를 맡을 역량은 된다는 것일까.

내 예상대로, 고기 손질을 끝낸 란초 셰프는 뒤이어 케밥용 고기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진 쇠고기와 우지牛脂, 향신채, 그리고 인도하면 빠질 수 없는 갖가지 향신료.

강황, 칠리, 민트. 그리고 그 조합비가 극비로 전해지는 혼합 향신료인 마살라까지.

아직 불이 닿지도 않았는데 벌써 코끝이 찡해지도록 톡 쏘는 향기가 풍기는 것 같은 착각이 절로 드는 느낌이다.

'역시, 볼 가치가 있었어.'

세계적인 셰프의 요리를 직관한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나, 혹은 특별한 인연이라도 없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주방은 고객에게 가장 개방적인 공간인 동시에, 식당 전체에서 가장 폐쇄적인 공간이기도 하니까.

조미료의 상표부터 식자재의 생산지까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 주방 바깥에선 결코 발설해선 안 되는 극비정보다.

그걸 주방의 헤드가 직접 선보인다는 게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진 일인가. 아마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관객은 모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가람 마살라의 조합 비율 같은 건 여전히 미지수지만…….'

그 외에 자잘한 팁 정도라면 얻었다.

고기와 향신료의 비율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과일 껍질 겉면을 갈아 넣는 제스트는 얼마나 사용하면 되는지.

사소한 점에서 오는 디테일. 그 편린을 살짝 본 것만으로도 나는 이 자리에 있길 잘 했다고 기뻐할 수 있었다.

고기 반죽을 끝낸 란초 셰프는 음식에 곁들일 난 반죽을 준비하며 종종 화덕의 온도를 체크했다. 화덕 가장 아래쪽 레버를 계속 조절하는 걸 보면 에어홀이 따로 달린 모양이다.

'하긴, 그게 없으면 불을 끄지도 못할 테니까.'

내로라하는 셰프 군단이 화덕에 달라붙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아무튼, 이쪽은 슬슬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알 것 같으니 이번엔 윌리엄 셰프를 좀 살펴볼까.

'윌리엄 셰프는…….'

오, 이쪽은 좀 스탠다드한 모양새로 요리가 전개되고 있다.

조리용 실을 묶고 소금을 뿌려둔 안심에서 삼투압 현상으로 빠져나온 수분을 제거한 뒤, 다시 간을 해서 굽는 윌리엄 셰프.

겉면만 간단히 시어링하여 마이야르 반응을 끌어낸 뒤, 그대로 오븐팬 위에 올린다. 오븐에 넣을 생각인 걸까.

'하긴, 너무 두꺼운 고기는 팬만 갖고 익힐 수가 없지.'

오븐에 들어가기 전, 안심에 강판에 한 차례 슥 갈아준 마늘을 거침없이 고기 사방에 문지르는 윌리엄 셰프.

아마 한국인의 눈에는 마땅찮게 보이겠지만, 유럽인 기준에선 저거면 충분히 마늘의 향미가 밴다.

애당초 마늘을 한국처럼 쓰는 나라는 전세계를 다 뒤져도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다.

생마늘을 씹어 먹는 것 자체가 유럽등지에서는 대기근 때나 있는 일이었는데, 한국인은 심심하면 생마늘을 쌈장에 찍어서 고기랑 같이 먹지 않는가.

물론 존맛이긴 하다만 여기선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심이 필요하다.

아무튼, 그렇게 신나게 마늘을 비벼준 안심을 오븐에 넣고, 불을 붙였다 꺼트려 연기만 피어오르는 훈연칩을 오븐에 같이 넣는다. 실내에서도 훈연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보게 해주는 기술 중 하나다.

그 뒤, 윌리엄 셰프는 냉장고에서 다른 식재료를 꺼내왔다. 그런데…….

'뭐지 저거?'

멀리서 봐서 잘 안 보이지만, 꼭 썰지 않고 덩어리로 파는 훈제오리처럼 생겼다. 색이나 크기도 비슷하고, 모양까지 말이다.

"…… 아니, 잠깐만."

그러나 잠시 후, 이내 나는 그 식재료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딱히 내 눈이 좋아서가 아니다. 다만, 프렌치를 심도 있게 배운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그런 식재료였을 뿐이다.

겉은 물론 속까지 조금 옅은 황토색 일색. 고기나 채소라기 보단, 마치 지점토를 꾹꾹 눌러 그런 모양으로 압축해둔 것 같은 질감.

칼을 대자마자 버터처럼 쓱 하고 칼날이 파고드는 부드러움.

"푸아그라Foie gras……."

직역하자면 살찐 간. 혹은 기름진 간.

요리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세계 최고의 진미이자, 또한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식재료 중 하나.

거위에게 강제로 사료를 먹여 의도적으로 지방간이 생기게 만들어 얻는 식재료.

누가 말했던가, 악행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고.

실로 그러하듯이, 푸아그라는 그 악행에마저 눈을 돌리게끔 만드는 마법 같은 맛을 가진 식재료였다.

이 시점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필레미뇽, 푸아그라…… 잠깐만.'

여기까지 나온 식재료만 봐도 윌리엄 셰프의 생각은 대충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한 가지 더.

한 가지 더 내가 생각하는 그 식자재가 나온다면…….

"…… 란초 셰프는 못 이겨."

설마. 벌써 그 요리를 꺼낼 생각인가? 저들한테는 이번이 첫 번째 경기일 텐데?

하지만 그런 내 의심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셰프는 기어코 세 번째 식재료를 꺼내 들었다.

식빵. 구운 지 얼마 안 되었다 증명하듯, 통통하게 부푼 사각형 식빵.

이 시점에서, 승부는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음을 난 직감했다.

"투르네도 로시니Tournedos Rossini?"

프렌치가 가진 쇠고기 요리 최고의 필살기가, 참으로 이르게도 행사장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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