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to the next stage.-1-
과연 어느 누가 이런 상황을 예상했을까.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다크호스의 일각이자 세계 최고의 요리 강국 중 하나란 명성을 가진 프랑스팀의 충격적인 1회전 탈락.
만약 이 대회에 배당을 걸 수 있었다면 못해도 일곱 자릿수 이상의 사람이 피눈물을 흘렸을 사태가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작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모두가 똑같았다.
방송국은 적어도 3회전까지는 버틸 줄 알았던 강팀의 탈락 탓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본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날벼락을 맞았다.
그나마 다른 방송사는 그뿐이니 다행이지, 당장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에 다른 방송사와 함께 공동 출자한 프랑스의 방송사는 그야말로 프로그램 존폐의 위기를 맞이한 수준이었다.
선수단의 경우, 프랑스팀이라는 강팀에 대비해 조사에 들인 시간을 한국팀을 제외하곤 깡그리 손해를 본 격이었지만, 이마저도 상대해야 할 강팀이 하나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 외에도 본토에서 자국 팀의 경기를 직관하기 위해 힘든 발걸음을 옮긴 관광객.
지인의 출전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응원단.
수많은 사람들이 이 황당한 사태에 당황하며, 또 경악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보다 작금의 사태를 예상치 못한 이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들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프랑스팀 대기실.
시합 종료 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온 이들 앞에서 헬레나 피에르가 고개를 수그린 채 말했다.
당황, 울분, 체념. 온갖 감정이 뒤죽박죽 섞인 얼굴이었으나, 그 속에서 유독 바깥으로 많이 드러나는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 시합의 전체 오더를 맡은 만큼, 그녀에게는 그만한 책임이 있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그녀 본인이 스스로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생각이 그녀와 같은 건 아니었다.
"너무 미안해할 거 없다."
"루이 셰프……."
"우리 중에서 레귬을 주제로 그만큼 선전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었어. 최선을 다했고, 잘 했다. 이 승부는 그저……."
잠시 말을 끝내기 어렵다는 듯 핏기가 가실 정도로 굳세게 주먹을 움켜쥔 그가 만감이 담긴 목소리를 간신히 토해낸다.
"질만 해서 진 거야. 그뿐이다. 이대로 돌아가도 크게 좋은 소리는 못 듣겠다만, 마음에 담아두지 마."
루이 라벨은 이후에 어떤 일이 그들에게 닥칠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크게 좋은 소리를 못 들어? 아니, 국가 망신이나 시키고 왔다고 쌍욕이나 안 들으면 다행이리라.
그러나 그 악담을 계속 속에 쌓아두어선 안 된다.
제 껍데기가 불편해서 탈피하고 성장하는 가재처럼, 스트레스란 사람에게 성장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스트레스는 긍정적인 스트레스여야 한다.
스트레스에 긍정과 부정이 따로 있겠느냐마는, 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한 분함과, 사람의 마음을 창으로 찌르는 악의는 결코 같지 않다.
'굴욕을 느낄 줄 알되, 그마저도 연료 삼아 불태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루이가 어렸던 시절, 동네 양아치에게 얻어맞고 울며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조부가 해주었던 말.
실천하기는 어려운 충고지만, 해낼 수 있다면 이 패배는 곧 그들이 성장할 계기가 되리라.
"하지만, 셰프……."
"아, 거. 진짜 징징, 징징.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무쇼."
"어이, 로랑!"
루이의 위로에도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던 헬레나를 향한 로랑의 폭언에 루이가 목청을 높인다.
그러나 로랑은 딱히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의자에 앉아 꼬아 앉은 다리로 발을 까딱거릴 뿐이다.
방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루이는 화가 나다 못해 허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속이 없는 놈은 아니었는데.'
루이의 쓰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랑은 앉은 것도 질렸다는 듯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쏘아붙였다.
"누가 보면 인생 쫑난 줄 알겠어. 한 번 졌다고 아주 땅을 파고 들어가시겠네. 할 거면 여기서 해. 돌아가서 욕이나 얻어먹을 바에 차라리 조용히 갈 순 있겠네."
"야, 너."
"됐고. 한 대 피고 올라니까 알아서 하쇼."
끼어드는 루이의 말을 끊은 로랑은 시합 시작 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대기실을 나섰다. 그런 로랑의 태도에 루이는 그야말로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런 놈이 다 있지?'
이 팀의 모두가 욕을 한 바가지씩은 뒤집어쓰겠다마는, 개인전에 나간 로랑은 다른 팀원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한 욕을 먹을 게 분명했다.
그걸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을 터인데 저렇게 태연자약하다니, 저걸 멘탈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루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로랑이 대충 내팽개치고 떠난 의자를 정리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 응?"
그러던 그때, 루이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
테이블에서 대충 밀려난 의자 아래, 마치 프레스로 구긴 것처럼 구깃구깃 구겨져 정체를 알 수 없는 주먹만 한 종이상자.
그러나 이윽고, 그 종이상자의 배색을 어디선가 보았음을 눈치챈 루이는 상자의 정체가 담뱃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담배의 주인이 누군지는 뻔했다. 애당초 이 팀원 중 담배를 피우는 이는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다만 의아한 것은, 그 담뱃갑의 상태였다.
'…… 내용물도 거의 새 건데.'
담배를 피워도 자국에서 판매하는 한 가지 브랜드의 제품만을 즐겨 피우는 로랑은 얼마 전 한국에 숙박하게 된 뒤로도 값비싼 항공우편까지 이용하며 자국의 담배만을 피웠다.
그러나 비용은 문제없다손 쳐도 우편이 도착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기에 담배를 아껴 피운다는 사실을 루이는 알고 있다.
그런 로랑이 거의 신품이나 다름없는 한 갑을 이렇게 버린다?
'…… 녀석.'
겉보기보다 승부욕이 없는 타입은 아니었던 건가.
담배를 핑계로 자리를 박찬 로랑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루이는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무뚝뚝한 배려인지, 아니면 성깔이 더러운 건지.
여전히 알기 힘든 구석이 있는 젊은이였다.
***
"젠장."
행사장 바깥. 시합 직전 들렀던 건물 뒤편의 관계자용 흡연구역 근처,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선 로랑이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분했다. 태어나서 이토록 분했던 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린 시절, 두 형이 장난을 치다 아버지가 아끼던 티 세트를 죄다 깨트리고 제가 한 짓이라 누명을 씌웠을 때도 이토록 분하진 않았으리라.
'내가, 그런 꼬마 상대로.'
개인전에 이어 팀전까지 연달아 패배할 줄은, 참으로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어째서 진 걸까? 일신의 능력이 모자라서? 팀원의 능력이 모자라서?
아니, 그 또한 이유겠지만, 오직 그것만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로랑은 자기 스스로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추었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팀 또한 마찬가지다.
헬레나 피에르는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지만 레귬만큼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 그렇기에 아무런 이견 없이 오더의 자리를 맡겼다.
루이 라벨은 꼰대스런 기질이 있으나 팀을 다루는 솜씨만큼은 분명히 그보다 낫다.
다른 팀원도, 저들만이 가진 강점이 있다. 물론 그 누구도 자신만은 못하다는 자신감은 별개였지만.
팀원 개개인의 능력은 결코 한국팀에 비해 결코 꿇리지 않는다. 그러면 어째서 그들은 패배했는가.
로랑은 그 답을 약간이나마 깨달은 것 같았다.
'생각을 멈춰 서다.'
한 가지 메뉴를 만들 때도 계속해서 관점을 바꿔나가며 사방에서 창끝을 들이민 한국팀에 비해 그들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최고에서 생각을 멈춘 것이다.
시합 중에도 더욱 높은 곳을 향하던 이들과 이쯤이면 됐겠지란 생각으로 멈춘 이들.
어느 쪽이 승기를 잡을지는 명확하지 않던가.
'토끼와 거북이인가.'
아니, 이곳에 거북이는 없었다.
그저 나태한 토끼와 근면한 토끼가 있었을 뿐이다.
패배의 원인을 알기에 더더욱 분하다.
다음에는 조금 더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들 주어진 기회는 이미 끝나고 말았으니까.
자신이 세계 최고라 증명할 기회는 사라졌다. 다음 기회가 언제일지는 미지수다. 기회가 반드시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다만 깊은 아쉬움을 담아, 로랑은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쥘 뿐이다.
"여기 있었냐."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로랑의 뒤에서 들려온다.
잠깐 놀란 로랑이었으나, 이내 낯익은 음색과 언어에 금세 정체를 눈치채곤 눈을 가늘게 떴다.
"…… 뭐야. 여긴 어떻게 찾았어요?"
"여기 참가자 중에 조리복 껴입고 담배 무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루이 라벨. 여길 어떻게 찾아왔냐는 말에 농담 섞인 빈축을 돌려준 그가 말을 잇는다.
"담배 피우러 간다고 해놓고 담배는 또 버리고 갔더라. 간수 잘 해. 누가 건들면 죽이려 들더만."
"예? 아."
루이가 건넨 찌그러진 담뱃갑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든 로랑은 내용물 중에 멀쩡한 게 없음을 깨닫곤 찌푸린 인상으로 그것을 집어 던졌다.
3점슛처럼 깔끔하게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담뱃갑. 루이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법인데."
"됐고. 이거 주러 오셨수? 그럼 받았으니 이만 가쇼."
"저건 덤이고, 여기 온 건 다른 일 때문이야."
"다른 일?"
"팀원 멘탈 관리. 팀장 노릇이지."
"지랄은."
로랑은 짧은 욕설로 말을 받아쳤다.
"팀장 노릇은 뭘 이제 와서. 필요 없수다."
"진짜로? 위에 애들은 내 품에 안겨서 다 같이 감동의 눈물을 쏟고 왔는데."
"그럼 끼리끼리 울다 오던가, 왜 찾아와서 난리야."
"너도 팀원이니까 그렇지."
"생각 없어요. 그리고 무슨 팀장 타령이야. 다 끝난 마당에."
다 끝났다. 그 말이 유독 말을 꺼낸 로랑 자신의 가슴에 박혔다.
그렇다. 끝난 것이다. 이대로 고향에 돌아가도, 아마 이전의 유명세를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
'…… 아니, 적어도 그놈들이 여기서 우승이라도 하면 얼마 안 걸리려나.'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떨쳐내며 살짝 고개를 젓는 로랑을 보며, 루이가 말한다.
"끝났다…… 끝났다라. 그래, 끝난 것 같구나."
"같다? 아니지. 같은 게 아니라 끝난 거지."
"그래. 그래 보인다. 너는 끝났어."
"…… 뭐요?"
처음이었다. 루이가 이토록 노골적인 시비를 건 것은.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은 로랑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던 루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린 아직 안 끝났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그럼 뭐. 패자부활전? 패배자들의 우두머리라도 되고 싶으신가? 그럼 알아서 잘 해보쇼. 난 생각 없어."
금세 루이의 말뜻을 알아차린 로랑은 차디찬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패자부활전. 8강까지 진행된 시합에서 탈락한 팀이 모여 벌이는 번외 경기.
스테이지 위로 올라갈 일도 없고, 남는 건 기껏해야 진 놈들 중에선 그나마 낫다는 평가뿐이다.
'운이 좋다면 4강에서 빠진 팀하고 교체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행운이 있을 리가 있나.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희박하다.
터무니없는 꿈을 꾸고 있다며, 로랑은 루이를 비웃었다.
하지만, 루이가 말한다.
"그래서. 여기서 그만두겠다고?"
"……."
"개인전도, 단체전도 꼴사납게 져놓고, 마지막 남은 길 같은 건 패배감에 젖어서 못 본 체 하겠다?"
"이봐요."
"아니. 아니지, 꼬마야. 그건 프랑스 사나이가 할 짓이 아니야."
루이가 말한다.
"정말 될지도 모르고, 괜히 힘만 빼는 걸지도 몰라. 분명 안 될 확률이 훨씬 높을 거다. 하지만 말이다."
여태껏 본 적 없는 그의 강직한 기세에, 루이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사나이라면 그걸 알아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어깨에 뭐가 올라가 있을 때는 특히."
그래서, 너는 사나이냐. 아니면 꼬리 만 쥐새끼냐.
그렇게 묻는 것 같은 그의 얼굴에, 로랑이 돌려줄 답은 처음부터 한 가지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