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가끔은 눌러줄 필요도 있다.-5-
정적.
마치 재생되는 영상의 음량을 0으로 줄여 버린 듯, 심사단과 선수단을 넘어 관중석까지. 행사장 전체가 고요에 잠긴다.
"……저, 잠시.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먹은 게 올라올 것 같은 불편한 침묵을 간신히 깨고 되레 질문을 돌려주는 토드였으나, 콘크리트를 뚫고 간신히 솟은 새싹을 밟아 버리듯, 찬혁은 마지막 남은 일말의 희망마저 무자비하게 깨트릴 뿐이었다.
"머랭을 이용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예. 그러니까 그……."
이거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몰라, 나한테 묻지 마.
심사단 사이에 격렬한 대화가 담긴 눈빛이 오간다. 당황을 숨기지 못한 그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한 사태였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다시피 머랭이란 카스테라나 쉬폰 케이크 따위의 부드러운 빵을 만들 때 사용되는 거품의 이름이다.
토드의 '카스테라나 쉬폰 케이크를 먹는 것 같다'는 평가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정확히 적중한 것이다.
그러나 토드는 자신의 혀를 칭찬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여유가 있다면 조금 자랑스러웠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문제. 문제가 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머랭을 만들 때 필요한 재료는 계란 흰자. 계란 흰자를 거품기로 죽도록 저어 만드는 것이 바로 머랭이다.
그렇다. 계란 흰자. 머랭을 사용했다는 말은 즉, 한국팀이 계란을 사용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비건식이라는 주제를 가진 시합에서 말이다!
아직 후발주자인 프랑스팀은 심사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도저히 수습 불가능한 폭탄발언을 좌중 한 가운데서 터트렸으니, 이를 어찌 처리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 심사단은 데룩데룩 눈알만 굴릴 뿐이다.
"야, 방금 머랭이라고 했지?"
"어. 분명 그랬는데……."
"머랭이면 그거 아니냐. 그 흰자 저어서……."
"그거 맞음."
"이거 채식요리 경기 아니었어?"
"뭐야. 그럼 한국팀이 진 거야?"
웅성웅성. 웅성웅성.
심사단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말을 고를 동안 한껏 어수선해진 관객석에서는 작게 시작한 소란이 점점 살을 붙여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 놔둬선 안 된다.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낀 토드가 마이크를 통해 작은 헛기침을 흘린다.
"으흠."
작은 숨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던 스피커에서 이제야 울려 퍼진 소리에 관객의 시선이 다시금 집중되고, 어수선한 행사장에 다시금 적막이 감돈다.
이제야 조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다는 것을 파악한 토드는 당황을 얼추 떼어낸 진지한 시선을 찬혁에게 향하며 입을 열었다.
"방금 여러분이 한 말씀,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사실,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패배를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결국 머랭은 이미 사용한 뒤였으니까.
주제에 대전제를 어긴 시점에서 실격패는 확정된 사항이다.
'왜 그런 거야?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혹시 동양에서는 비건의 범주에 난류가 포함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시합개시 전에 설명한 룰을 들었을 터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날카롭게 쏘아보는 토드를 마주 바라보며, 찬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예? 당연히 아니죠. 저희가 왜 졌다고 인정해요?"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토드였다. 아니, 정말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뻔뻔하게 나오는 건가.
전자면 셰프 자격도 없는 멍청이인 거고, 후자라면 그야말로 코뿔소보다 얼굴 가죽이 두꺼운 인간이리라.
"아니, 머랭을 쓰셨다고 방금 본인이 말씀하셨을 텐데요. 설마 이번 시합의 주제를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아아, 전 또. 그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저흰 머랭을 쓰긴 했지만, 규칙은 단 하나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머랭을 썼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규칙을 어긴 것인데.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토드에게 찬혁은 웃음을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쓴 머랭은 비건 머랭이거든요."
"비건, 머랭?"
찬혁의 당찬 대답에 토드는 더더욱 당황했다.
'그건 또 무슨…….'
땅 위에서 사는 생선, 바닷속에서 사는 새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단순히 되도 않는 소리로 치부하기엔 찬혁의 저 당당함이 마음에 걸렸다.
한국이라고 계란을 야채로 취급하진 않을 터인데, 저 당당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그 궁금함을 해소하기 위해 황당함을 어떻게든 속으로 집어넣은 토드가 말을 잇는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기꺼이."
***
"우선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머랭을 만들 때 계란 흰자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바보가 아니다. 미쳤다고 비건 음식을 만드는데 계란을 쓸까. 오보 베지테리언 식단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퓨어 비건식을 만들어야 한단 말을 듣고 계란을 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 선언에 심사단은 다시금 의아하단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묻는다.
"머랭을 만들 때 계란을 안 썼다면 대체 어떻게 머랭을 만들었단 건가요? 샴푸로 거품을 내서 쓰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 비밀은, 바로 이 겁니다."
나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차윤구 셰프가 조리대에서 가져다주신 물건을 심사단 앞에 꺼내놓았다.
원통형 철통. 공기방울 하나 새어 나갈 틈 없이 굳게 닫힌 뚜껑.
그 모양에서 도출되는 단 하나의 식재료.
"아니, 잠시만요."
"그건……."
"통조림이잖아요."
그렇다. 내가 꺼낸 재료는 바로 통조림이었다.
"그냥 통조림이 아닙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건 병아리콩이 들어 있는 통조림이죠."
"……통조림의 내용물이 지금 대화와 관계가 있나요?"
"물론, 그렇습니다."
설명에 앞서 하나 집고 넘어가자면, 일단 내 설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한 가지 상식을 잊을 필요가 있다.
머랭은 계란 흰자로만 만들 수 있다는 상식을 말이다.
머랭이란 단순히 말하자면 거품이다. 더 정확히는 쉽게 터지지 않는 아주 자그마한 거품이 무수히 뭉친 덩어리다.
그 말은 즉, 쉽게 터지지 않는 아주 자그마한 거품을 만들 수 있는 액상 식재료라면 이론적으로는 머랭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품의 발생에 도움을 주며 거품막의 결합이 쉬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맡는 성분은 바로 단백질이다.
위의 설명을 합쳐서 설명하면, 단백질이 다량 함유된 액체는 머랭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머랭을 만들 때 대부분의 사람이 사용하는 식재료인 계란 흰자가 정확히 이 설명에 부합한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정말로 세상에는 계란 흰자처럼 머랭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식재료가 더 없는 것일까?
육식을 절대 하지 않는 비건은, 머랭으로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요리를 입에 대지도 못하는 것일까?
정답은 아니오.
채식주의자가 먹을 수 있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식재료 중에서도 그러한 물건은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이 콩 통조림 속 액상이 바로 그런 경우죠."
그렇다. 그게 바로 우리들의 폴더 감자전에 담긴 가장 커다란 비밀 중 하나.
본래는 조금 더 쫄깃하지만 퍽퍽한 질감이 있는 감자전을, 마치 케이크처럼 폭신폭신하고 부드럽게 바꾸어준 마법의 식재료.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병아리콩 통조림의 내용물을 전부 냄비에 쏟아 그대로 한소끔 끓인 뒤, 콩을 걸러내어 남은 물을 다시금 끓여 살짝 졸이고 찬물에 중탕하여 식힌다.
그게 끝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건 머랭 베이스를 기존의 머랭을 만드는 것과 완전히 똑 같은 방법으로 조리하면 그게 바로 비건 머랭이다.
차이가 있다면 계란 대신 콩 통조림의 물이 쓰였다는 것뿐.
그러나 그것만으로 채식주의자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머랭이 완성된다.
내가 쓰고 남은 통조림 물로 간단히 시범을 보이자, 사방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일반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보기엔 제법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리라.
'아마 진짜 채식주의자가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알아봤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고 내 경우에는 다행스럽게도 이 스테이지 위에 진짜 비건인 인물은 없었다. 그저 내 시범을 본 뒤,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 외치는 심사위원이 단 한 사람 있을 뿐이다.
"아쿠아파바Aquafaba! 이제야 생각났어요! 계란 없이 렌틸콩 같은 종류의 콩을 사용해서 만들 수 있는 비건을 위한 머랭!"
…… 아니, 한 사람 더 있는 것 같은데.
'저 쪽도 아주 모르진 않았던 모양이야.'
살짝 눈을 돌려 살핀 프랑스팀. 그 중심에서 매서운 얼굴로 이쪽을 쏘아보는 셰프의 모습이 눈에 띈다.
'헬레나 피에르.'
유명한 셰프다. 일면식도 있다. 뭐, 회귀 전의 이야기긴 하다만.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그야 알만도 하지. 내게 이 아쿠아파바를 가르쳐준 이는 다름 아닌 저 사람이니까.
'뭐, 딱히 그쪽에서 가르쳐준 건 아니지만.'
정확히는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해야겠지.
대체육의 개발로 채식주의가 사상에서 단순한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이나 개인의 취향, 취미 따위가 되었던 시절. 그때에도 여전히 레귬의 권위자로 파리에서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던 셰프.
그녀의 시그니처 중 가장 유명한 메뉴가 바로 비건 케이크였다.
본래 먹으면 분명히 차이가 있는 식물성 크림과 아쿠아파바를 본래 방법대로 만든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맛이 나도록 개량한 것도 저 사람이었고, 그 조리법에 흥미를 가진 내가 그녀의 인터뷰 등을 따로 조사하여 아쿠아파바를 비롯한 여러 레귬 조리법을 익혔더랬다.
'뭐, 사실 본인한테 제대로 배운 게 아니라 부족한 면이 좀 많기야 하다마는.'
예를 들어 이 아쿠아파바도 본래는 진짜 머랭과 달리 콩의 풍미가 강해서 이 향을 어떻게 없애고 다른 풍미를 연출하느냐가 중요한 관건 중 하나였다.
당연히 그 방법은 극비였고, 나는 반쯤 야매로 해결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아무튼, 의도한 바는 아니나 아마 이 자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일종의 시험대가 될지도 모른다.
30년 뒤의 본인을 지금 이길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그야 뭐, 내 레귬 기술은 30년 뒤의 헬레나 피에르와 비교하면 발끝에나마 간신히 닿은 수준이긴 할 테지만.
'발끝조차 넘어서지 못한다면 지금 당장은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
이기느냐 지느냐. 두 가지의 선택지. 과연 그녀의 도착지는 어디일까.
'사실, 난 이미 답을 알 것 같긴 하네.'
지금의 내가 회귀 전의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요리사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천재의 시계는, 언제보다 범인보다 느리게 가는 법이니까.
그녀의 30년은 나의 30년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헬레나 피에르가 그만한 재능을 가진 요리사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뭐니뭐니해도, 난 두 눈으로 직접 미래를 보고 왔거든.
과연 미래를 아는 사람이 예측한 미래는 얼마나 정확하게 들어맞을까?
그 결과는, 아직 조금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라보! 브라보! 훌륭합니다. 감탄을 멈출 수 없는 요리입니다, 한국팀!"
"감사합니다."
지금은 그저 이 갈채를 잠시 즐기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로 돌아갈 때였으니까.
환호와 박수 속에서 우리의 심사는 비로소 끝을 맺는다.
자, 이게 마지막 심사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쪽의 손에 달렸다. 그러니…….
'열심히 해보라고, 선생님.'
내가 딱히 그쪽의 제자는 아니지만. 내 나름의 예의로 봐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