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가끔은 눌러줄 필요도 있다.-3-
'아까부터 대체 무슨 생각이지?'
한국팀이 프랑스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본인들의 전략을 수립해나가는 동안, 마찬가지로 프랑스팀 또한 상대를 관찰하고 있었다.
상대를 살피는 게 찬혁이나 한국팀만 가진 특기는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시즌2 참가팀 중 가장 많은 관심과 그에 비례한 정보가 널리 퍼진 한국팀이야말로 관찰 대상이 되기에 알맞은 팀이었다.
프랑스팀에게도 그건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팀장인 루이 라벨은 다른 팀의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기에 같은 팀원들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있기도 했다.
다만, 그중에서도 예외는 분명 있었다.
헬레나 피에르. 프랑스팀의 셰프들 중에서도 레귬이라는 장르에 특화한 커리어와 실력을 가진 이 여성 셰프는 루이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으로 한국팀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은 인물이었다.
정확히는 한국팀이 아닌 한국이란 나라,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 국가에 대한 지식이 많은 것이었지만.
그녀가 그런 지식을 쌓게 된 계기는 딱히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출전이 정해진 이후 더더욱 정보를 열심히 수집한 건 사실이지만, 애당초 그녀가 처음 동양 문화권에 관심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그녀 본인이 레귬을 전문으로 하는 셰프였기 때문이다.
유럽 등지에서 채식의 역사는 길어야 200년 내외. 그리스 로마 시대의 기록을 살피면 당시 채식이 유행했다는 문헌이 남았으나, 그마저도 중세를 거치며 완전히 단절된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에 비해 동양권은 그 배에 가까운 시간동안 채식 문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역사를 가졌다.
종교적 교리, 국가의 사상, 지리적 식생, 문화적 유행, 인종의 차이.
두 문화권 사이에 그토록 차이가 생긴 이유는 따로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유럽의 채식은 동아시아권에 비해 그 깊이가 얕은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역사의 깊이가 요리의 수준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프랑스인으로서 역사가 요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아는 헬레나는 본인의 숙달을 위해 동양의 채식 역사와 요리의 발달과정, 레시피 따위를 공부하는 데에 제법 오랜 시간을 들였다.
그리고 그 공부는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팀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더해, 덤이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한국의 채식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했고, 현대에 들어 어떻게 정착했는지에 대한 지식마저 가진 헬레나.
그러나 그토록 다양한 지식을 가진 그녀조차, 지금 한국팀의 요리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한다.
'와플 머신이라고?'
당연하다. 헬레나는 와플 머신으로 만드는 한국의 채식 같은 건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기실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이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혹시 한식이 아닌 건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안영길과 이영율이라는 두 전력을 너무 헛되이 쓰는 것이란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확실한 결론도, 대략적인 예측도 내리지 못한 채 헬레나는 시선을 돌렸다.
'알 수 없는 걸 굳이 당장 이해하려 애쓸 필요는 없어.'
그것이 그녀의 해답이었다. 어차피 깊게 파묻은 타임캡슐을 열리게 하는 건 시간이다. 저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한 것도 아니니 어차피 조만간 비밀은 밝혀질 터.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보단, 어떻게 해야 지금 만드는 요리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편이 낫다.
헬레나는 그렇게 다짐을 되새기며 한국팀의 요리에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다만, 이어진 찬혁의 행동에는 아무리 헬레나라 하여도 본인도 모르게 다시금 눈이 돌아가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와플 머신에서 처음 넣었던 반죽을 익혀서 빼낸 찬혁은, 바로 그 뒤를 이어 와플 머신의 틀을 기존의 노멀 모델에서 요철이 없이 평평한 플랫 모델로 바꿔 달고 그대로 밥을 넣어 꾹 닫아 버렸으니까.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파격적인 조리법. 이건 억지로 안 보려고 해도 저도 모르게 눈이 가버리고 만다. 헬레나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돌아가는 자신의 시선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런 좌중의 놀라움을 MC가 대신 나서 외침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아아! 한국팀! 와플 머신의 차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밥이다! 류찬혁 선수, 밥을 와플 머신에 넣고 눌렀습니다! 인터넷 영상으로만 보던 걸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요!"
난해하다. 정말로 난해했다.
어느 분야의 기술자든 일정한 수준을 넘어선 순간 '보는 기술'이 생긴다.
1+1이라는 수식을 보면 2라는 답이 생각나듯이, 구구단을 외우면 자동으로 답이 튀어나가듯이.
'과정'을 보면 '결과'를 안다. 요리사의 세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헬레나 또한 '일정한 수준'을 옛날옛적에 넘어선 요리사. 누군가의 요리를 보면 결과물 또한 자연스럽게 얼추 연상해낼 수 있다. 그게 처음 보는 타국의 요리라 하여도 마찬가지다.
요리란 기술이며, 기술은 곧 쌓인 역사의 재현인 법이니까.
하지만…….
'모르겠어……!'
알 수 없다. 저 류찬혁이라는 소년의 요리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바로 옆에 붙어서 모든 요리 과정을 세심히 지켜봤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렇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제 요리에 집중하다 뜨문뜨문 훔쳐본 정도로는 그 결과물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다.
틀의 구성이 다르다. 사고방식이 다르다, 발상의 구도가 다르다.
아무리 용을 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헬레나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런 때임을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고, 요리는 완성돼야 하는 법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눈앞의 요리를 제대로 완성하는 것부터 시작해라.'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헬레나는 힘겹게 한국팀에게서 눈을 떼어놓는다.
오더는 헬레나 자신이다. 오더가 흔들려선 안 된다.
"캐비지롤에 들어갈 머쉬룸 필링 마무리 시작하고, 브라우니도 휴지 끝났죠? 바로 틀에 모양 잡아서 오븐에 들어갈게요! 앞으로 30분 안에 끝냅니다!"
정신없이 오더를 내리며 팀원을 닦달하는 헬레나.
그러나 그녀의 머리 한구석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한국팀의 요리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
"완성했습니다!"
그런 목소리를 낸 팀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명확했다.
애당초 언어가 다른 두 팀이기에, 말만 듣고도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는 건 간단했으니까.
"선창! 한국팀이 먼저 조리완료를 선언합니다! 시합이 개시되고 이제야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입니다. 엄청난 속도입니다!"
사실 양갱을 만드는 시간만 아니었다면 그보다 20…… 아니, 30분은 일찍 끝냈을 수도 있었겠으나, 찬혁은 굳이 말하지 않고 입을 꾹 닫았다.
요리에서 속도가 빠르다 함은 항상 긍정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세계 최고의 요리는 패스트푸드였으리라.
잠시 헛웃음이 튀어나올 생각으로 머리를 정리한 찬혁은, 완성품이 담긴 접시에 은제 뚜껑을 씌워 트레이에 올렸다.
흑백 양갱을 작은 주사위 모양으로 잘라 모노크롬 큐브 모양으로 조립한 양갱.
뚝배기에서 여전히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마지막으로 여전히 그 정체를 숨긴 메인.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심사단을 비롯한 좌중의 관심은 바로 이 메인을 향하고 있었다.
과연 채식과 와플 머신의 조합으로 어떤 요리가 탄생했을 것인가.
여전히 아무런 상상도 가지 않는 조합에 들끓는 호기심 앞에, 한국팀의 요리가 테이블 위로 올라간다.
"실례하겠습니다."
심사단 앞에 세 개의 접시를 놓으며 찬혁은 천천히 음식을 가린 뚜껑을 벗긴다.
아이러니하게도 첫 번째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후식인 양갱이다. 보기만 해도 상큼한 붉은 시럽이 수놓인 새하얀 접시 위, 오밀조밀하게 조립된 흑백 큐브 모양의 양갱.
양갱이 가진 옛 요리란 이미지를 단번에 벗어던지게끔 만드는 모던한 플레이팅을 본 심사위원이 작게 감탄을 터트릴 무렵, 찬혁은 다음 뚜껑을 열어젖힌다.
"검은콩과 검은깨를 섞은 두부와 3종의 버섯으로 맛을 낸 된장찌개입니다. 메인과 함께 드시면 좋습니다."
된장찌개. 그것도 뚝배기에 담긴 된장찌개.
후식이 될 양갱에 모던한 멋이 있었다면, 이 된장찌개는 말 그대로 보기만 해도 구수함이 느껴질 만큼 옛된 인상을 가득 풍기는 한 접시였다.
된장 특유의 콩 냄새에 섞인 두부와 버섯에서 피어오르는 향, 고추의 캡사이신이 섞인 칼칼한 내음.
뜨겁게 달궈진 뚝배기 표면에서 기화하는 국물의 향기에 심사단이 흠뻑 젖어들 때, 찬혁은 마지막 접시의 뚜껑을…….
"아, 그리고 메인을 보여드리기 전에, 이걸 먼저."
"?"
열지 않았다. 정확히는, 뚜껑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려던 자세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몸을 뒤로 빼고는 트레이에서 무언가를 꺼내 각 심사위원의 식기가 놓이는 자리에 세팅한다.
식기는 이미 다 받은 뒤인데, 아직 무언가 더 받을 것이 남아 있었느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은 그들은 이내 찬혁이 건네준 물건을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거……."
"그거 아닙니까, 왜……."
"예. 수제 버거를 파는 레스토랑에 가면 주는……."
정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종이. 언뜻 보면 냅킨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냅킨으로 쓰기에는 과하게 크다.
마치 무언가를 감싸기 위한 포장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물건.
그렇다. 그것의 정체는 심사단이 추측한 대로 햄버거처럼 손으로 들고 먹는 음식을 깨끗하게 집기 위한 대형 냅킨이었다.
메인을 공개하기 전에 굳이 이런 것을 주었다는 건, 다시 말해 이 요리가 손으로 잡고 먹는 요리라는 뜻.
'한식에서 손으로 집어 먹는 요리라고?'
'흥미로운데.'
젓가락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손으로 무언가를 집어 먹는 행위는 식사예절을 지키지 않는 행동이었다.
빵은 손으로 집어먹어도 큰 결례가 아니다. 오히려 식기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식전 빵을 뜯어 먹는 것이 기본적인 테이블 매너였으니까.
그러나 동양의 주식은 밥. 밥을 손으로 퍼먹는 건 빈자의 행동거지가 아닌가?
그런 문화가 정착한 한국에서 손으로 집어 먹는 음식이라니.
과연 어떤 메뉴가 나올까.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심사단 앞에서, 찬혁은 천천히 메인 메뉴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직후, 심사단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한다.
놀란 듯 놀라지 않은. 신기한 듯 신기하지 않은.
예상과 의외의 사이에 선 얼굴을 한 심사단을 보며, 찬혁이 말을 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게 저희가 준비한 메인입니다."
그 요리는 마치 와플처럼 생겼다. 아니, 사실상 생긴 것만 보면 이미 한국에서도 유명한 뉴욕식 와플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격자무늬가 선명한 구운 반죽이 반으로 접혔고, 그 속에는 크림이나 과일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용물이 들어가 있다.
넓은 잎 채소와, 또 무언가.
맵고 단 향이 물씬 풍기는 붉은색 소스가 와플 모양 요리의 옆면을 타고 흐른다.
이게 와플일 리는 없다. 하지만 생긴 것은 너무나도 와플과 똑같다.
대체 이 요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심사단 앞에서, 찬혁은 친절히 그 요리의 정체를 까발렸다.
"요리의 이름은 폴더 감자전. 드시는 방법은, 아마 생각하고 계신 게 맞으실 겁니다."
묘한 장난기가 서린 웃음.
바로 아까 전에도 본 것 같은 그 표정을 보고, 심사단이 떨떠름하게 군침을 삼킨다.
'일단…….'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맛있을 것 같다.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