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17화 (317/403)

317. 가끔은 눌러줄 필요도 있다.-2-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조리도구가 있다.

칼, 국자, 냄비처럼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원시적인 도구부터 시작해서 개인, 가정용 조리도구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는 온갖 기능의 집합체 멀티 믹서까지.

조리도구는 항상 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진화를 이룩했다.

단순히 자르고 깎아내는 기능을 가진 철판부터 전기의 힘으로 식재료를 갈고, 섞고, 짜고, 굽고, 삶고, 튀기는 도구에 이르기까지.

세월이 흐를수록 개발자들은 여러 기능을 하나의 도구 안에 축약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보다 소비자 친화적으로.

보다 공간을 덜 사용하고, 보다 전기를 덜 사용하고, 보다 소음이 덜나는.

기능은 늘어나는데, 기능이 늘어날수록 빼야 할 것도 그만큼 늘어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지구상 모든 조리도구가 전부 같은 방향으로 진화한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밥을 짓는 밥솥마저 밥솥 하나로 다양한 조리도구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끔 만들어지는 현대 조리도구의 다기능 일원화라는 모토. 그 정반대를 달리는 조리도구 또한 분명히 있다.

방금 박종원이 두 눈에 똑똑히 담았던 와플 머신은, 바로 그런 조리도구 중 하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이에 낀 식재료를 와플모양으로 만들어 굽는 것뿐.

그 외에는 어떤 기능도 없다.

이름 그대로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설계되고 만들어진 기계. 그리고 그 기계는, 참으로 시의적절하지 못하게도 작금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와플 머신은 그 이름 그대로 와플을 만들기 위한 조리도구. 예열하여 버터나 식용유 따위를 바른 격자무늬 철판에 반죽을 붓고 뚜껑을 덮어 모양대로 굽기 힘든 와플을 보다 손쉽게 구울 수 있게끔 도와준다.

위의 설명을 들었으면 알 수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박종원은 현재 이 상황에 와플 머신이란 기계가 끼어들 만한 구석을 단 하나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와플을 만들진 않을 테니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지금 진행되고 있는 1차 시합의 제2라운드 주제인 비건식에서 와플 머신이 할 수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의 레시피를 따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와플 반죽에는 보통 계란과 우유, 버터가 반드시 들어간다.

락토(유제품), 오보(난류)를 용납하지 않는 퓨어 비건 메뉴만 허용되는 이번 주제에서 그런 와플을 만들어봐야 심사도 받지 못하고 패배할 것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을 것임에도 굳이 준비물을 챙기는 그 바쁜 시간동안 와플 머신을 가져왔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 박종원의 직감이 그렇게 말한다.

'혹시?'

앞서, 와플 머신으로 할 수 있는 조리는 오로지 와플을 만드는 것뿐이라고 했으나, 사실 그건 반만 맞는 이야기다.

몇 년 전이던가. 올튜브에서 한창 유행했던 컨텐츠가 있었다.

'와플 머신으로 엄한 거 눌러 먹기 챌린지였나.'

박종원 본인도 올튜브 활동을 열심히 하는 개인방송인인 만큼 그런 유행에 대해선 민감하고, 또 자주 챙겨보는 편이다.

그때 보았던 여러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건, 그저 자신의 기분 탓일까.

"에이, 설마."

입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박종원은 자신의 의심을 진심으로 부정하진 못했다.

그가 아는 류찬혁이라는 요리사는 언제 어느 때나 그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에서 예상치 못한 한 수를 찔러 들어오는, 항상 새로운 발상으로 세간을 놀래키는 사람이었기에.

과연 이번에는 어떻게 우리를 놀래킬 셈일까.

조리대에서 불꽃이 한 번 솟을 때마다 드높은 행사장의 천장이 떠날 듯 환호성을 지르는 저 수많은 관객도 분명 자신과 비슷한 기대를 하고 있겠지.

과연 본인의 눈빛이 놀이공원을 처음 찾은 어린아이 못지않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음을 깨닫고 있을까. 박종원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이는, 아쉽게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그 질문을 던져야 할 이마저 물리적으로 불꽃이 튀는 시합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시합은 점차 중반으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

시합이 본격적으로 점입가경에 이르며, 각 팀의 요리도 점차 뚜렷하게 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요리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었다면 완성단계에 접어든 몇 가지 메뉴 정도는 약간이나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고, 이것이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주방에서 고작 십여 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좌중은 감탄을 연달아 뱉었다.

"와, 아까 시합도 손 개 빨랐는데 지금은 그냥 안 보여. 뭐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주방 알바 몇 년은 굴렀는데 저건 대체 뭐냐……."

"무슨 계주하는 것도 아니고 맡은 일이 자꾸 바뀌는데 왜 흐름이 안 끊기지?"

관객은 마치 셰프들의 요리시합이 아니라 두 곡예단의 서커스 대결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실, 평범한 사람이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기술을 선보인다는 점에선 곡예단과 크게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 동물도 나오고 말이다. 물론 지금은 동물의 차례가 아니었지만.

다만 그들이 곡예단과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그들은 굳이 자신의 기술을 관객에게 뽐내며 호응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저 자신이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해 임할 뿐. 오직 그뿐임에도, 극한까지 군더더기가 빠진 동작은 그 자체로 유려하고 화려하다. 사람의 눈을 빼앗는 힘이 있다.

대진운이 좋지 않았을 뿐, 한국팀과 프랑스팀은 명실상부 현재 대회에서도 순위를 위에서부터 세는 것이 빠를 실력자들의 집단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듯했다.

시작한 뒤로 속도가 붙으면 붙었지, 좀처럼 다시 줄어들 생각이 없는 두 팀의 움직임.

아직은 막상막하로 보이는 두 팀. 과연 먼저 두각을 드러내는 쪽은 어디인가.

어느 쪽이 먼저 가속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서느냐.

모두가 추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드디어 한 발을 크게 앞으로 내디디며 한 팀이 도약한다.

"어?"

"응?"

"엥?"

다만, 그 도약은 다른 이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멋들어진 연출이나 화려한 불꽃과 함께 시작하진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이미 낌새를 눈치채고 있던 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생각지 못한 자세로, 그들은 과감히 고착이란 이름의 유리창을 온몸으로 깨부수며 창틀을 밟고 뛰어올랐다.

"나 저거 본 적 있는데……?"

"잠깐만. 저거 설마……."

"진짜야?"

"이게 왜 진짜임?"

조리 도중, 갑자기 우뚝 손을 멈춘 찬혁이 조리대 아래쪽 찬장에서 꺼내든 납작한 원판 모양의 기구를 본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그 반응을 빈틈없이 캐치한 MC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VJ가 촬영 중이던 카메라를 가리키며 외친다.

"보십시오, 요리가 점차 완성되어가기 시작한 이 국면! 비로소 한국팀이 승부를 겁니다! 그런데 이게 뭔가요! 한국팀 조리대 위에 처음 보는 조리도구가 나왔습니다!"

직후,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MC가 급히 말을 정정한다.

"아닙니다! 처음 보는 조리도구가 아니었네요! 와플 머신! 한국팀이 꺼낸 낯선 조리도구는 저희에게도 아주 친숙한 물건입니다! 와플 머신! 한국팀이 와플 머신을 꺼냅니다!"

와플 머신.

이런 자리에서 나오기엔 심히 품격이 떨어지는 도구의 모습에 관중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든다.

"와플 머신?"

"갑자기 저건 왜 꺼내?"

"와플 만들겠답시고 저러는 거 아니지?"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든, 그들 속에는 그것만으로는 감출 수 없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관중을 향해 찬혁이 승부수를 던진다.

와플 머신의 전원을 켜고 적당히 예열한 뒤, 참기름과 포도씨유를 일정 비율로 섞은 기름을 실리콘 붓과 스프레이를 이용해 철판 전체에 골고루 바른다.

와플 머신 안에 올릴 재료가 달라붙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직후, 찬혁은 성공적으로 코팅이 끝났음을 깨닫고 제 조리대 위에 있던 커다란 볼에 담긴 모종의 반죽을 큼지막하게 한 국자 떠 철판 위에 부었다.

─치이이이익!

성능 좋은 전열기가 빈틈없이 메꿔진 값비싼 와플 머신이 제 역할을 다하는 소리.

그와 동시에 참을 수 없이 퍼져 나오는 고소한 향기에 뭍 관중이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성공적인 냄새에, 성공적인 반응.

가벼운 웃음으로 성과를 자축한 찬혁은 그대로 와플 머신의 자이로 기능을 이용해 몇 바퀴 빙글빙글 돌린 뒤, 속에 든 반죽의 겉면이 익으며 굳은 것을 확인하곤 세로로 세운다.

'이러면 중력에 영향을 적게 받아서 양쪽 다 균일하게 색이 돌지.'

균일하게 색이 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양쪽이 균일하게 익는다는 뜻이다.

방금 찬혁이 넣은 반죽의 주재료는 익힌 정도에 따라 식감이 크게 달라지기에 더더욱 그 균일함이 소중했다.

'그럼 이제…….'

와플 머신이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음을 확인한 찬혁은 이윽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계획한 건 여태까지 잘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의 마지막 단계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더욱 손을 빠르게 놀려야 했다. 왜냐하면…….

'저쪽보다 빠르게 끝내야 돼.'

프랑스팀보다 먼저 메뉴를 완성하여 제출하는 것. 그것이 한국팀의 계획이었기에.

찬혁은 살짝 고개를 돌려 프랑스팀의 조리대를 살폈다.

거리가 살짝 있는 탓에 정확히 무슨 작업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짬에서 나온 바이브와 찬혁의 프렌치에 대한 지식. 그리고 대회 시작 전 강화 합숙을 통해 미리 익혀둔 프랑스팀의 정보를 토대로 대략적인 구상도는 잡는 것이 가능했다.

공사판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반장이 터를 잡은 곳에 깔린 기반과 꽂힌 철근의 모양만 보고 완공 후의 모습을 대략 짐작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였다.

'보자…… 대충 알겠다. 채식 비스킷을 사용한 카나페에 캐비지롤, 거기다 비건 쇼콜라를 이용한 후식.'

후식의 정확한 종류까지는 아직 제대로 짐작할 방법이 없었지만, 찬혁은 이내 관찰을 그만두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마 비건 쇼콜라를 쓴 후식을 준비한다면 베이킹이다. 베이킹은 시간이 걸려. 이건 좋은 소식이야.'

저쪽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조리법을 사용한다면 자신들에게 그만큼 여유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찬혁은 그 시간을 알뜰하게 쓰고자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우리 메뉴도 제법 시간이 걸리니까.'

한국팀의 메뉴는 두부와 버섯을 주력으로 삼은 된장찌개와 흰앙금, 검은앙금으로 각각 다른 색으로 만들어 모양을 낸 양갱.

'그리고 지금 내가 준비 중인 메인.'

세 가지 메뉴 중 하나인 된장찌개마저 오로지 메인을 위한 들러리이기에, 찬혁의 부담감은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이 메뉴가 찬혁이 상상한 대로, 연습한 대로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분명 이 팀전의 승기는 한국팀에게로 기운다.

찬혁은 감히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다.

─삑삑! 삑삑!

타이머가 울린다. 와플 머신의 타이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잽싸게 움직인 찬혁은 세로로 세워두었던 와플 머신을 정방향으로 돌리고, 속에 있는 내용물이 깨지기 쉬운 보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천천히, 조심스레 뚜껑을 들어 올린다.

뚜껑을 들어 올리자마자 온 사방에 넘쳐흐르는 고소한 내음.

감자 특유의 익은 탄수화물 냄새가, 이래도 식욕을 참을 수 있겠냐는 듯 코를 간지럽힌다.

"……됐다."

마치 계란판을 동그랗게 자른 것처럼 삐죽삐죽한 모양새.

어디 하나 흠잡힌 곳 없이, 솜사탕 같은 폭신함을 자랑하는 와플이 예쁘게 익은 갈색 외피 아래 황금색 속살을 자랑하고 있었다.

"후우……."

1단계는 성공했다.

찬혁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진땀을 조리복의 상완 소매로 닦아내며 한숨을 돌린다.

이젠, 단숨에 완성하는 일만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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