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가끔은 눌러줄 필요도 있다.-1-
비건vegan. 사전적 의미로는 채식주의자. 즉, 육류나 생선, 가금류. 그리고 해당 생물을 사육, 도축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부산물을 섭식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단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아마 이 경우에는 후자겠고.'
그야 뭐 심사단을 갑자기 한니발로 만들 게 아니라면 보통 그렇겠지.
아무튼 채식주의자용 메뉴라니, 이번에도 제법 까다로운 게 나왔다.
비건 메뉴를 만들 때엔 생각보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일단 육류 자체는 물론, 그 성분이 약간이라도 포함된 식재료는 사용할 수 없으니까.
무언가를 꼭 넣어서 요리를 만들라는 건 쉬운 일이다. 그게 사용하기 곤란한 식재료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는.
그러나 무언가를 반드시 빼고 요리를 만드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렵다. '무언가'의 가짓수가 늘어나는 만큼 점점 힘들어진다.
하물며 고기와 그 부산물 전체를 '무언가'로 규정한다. 음, 정말. 비건 요리는 생각할 게 너무 많아져서 곤란하다.
아마 다른 셰프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다들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
팍 인상을 쓴 우리들의 안색에도 아랑곳 않고, MC는 점점 흥을 타서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이번 시합! 허용되는 요리는 퓨어 비건 뿐입니다! 우유, 버터, 치즈 등의 유제품을 사용하는 락토 베지테리언. 안 됩니다! 계란 등, 난류 식재료를 사용하는 오보 베지테리언? 마찬가지로 안 됩니다!"
오로지 퓨어 비건! 퓨어 비건 요리만이 허용됩니다! 라며, 스테이지 중앙에서 관객석을 향해 외치는 MC의 흥겨운 얼굴이 괜히 얄밉다.
그 외침에 호응하여 환호성을 내지르는 관객의 모습마저 지금의 우리들의 얼굴에 미소를 되찾아주진 못했다.
"거 참."
빌어먹을 게임이네, 진짜.
***
"흠, 레귬légume이라."
이건 괜찮은 시나리오다. 루이 라벨은 남몰래 미소를 머금었다.
채소요리légume는 프렌치에서도 오랜 탐구와 발전을 거듭한 분야지만, 그 발전의 속도는 더 이상 굶주릴 일이 별로 없이, 음식을 가려 먹을 수 있게 된 근현대에 와서 더더욱 급가속했다.
옛 프렌치의 레귬이 자전거 수준이었다면, 지금의 레귬은 터보 엔진이 달린 바이크.
그리고 마침, 프랑스팀에는 그 바이크의 엔지니어이자 라이더인 셰프가 있다.
"헬레나. 다음 오더는 네가 맡아라."
"예? 제가요?"
"그럼 레귬이란 주제로 너 말고 누가 오더를 맡을까. 잘 할 수 있지?"
"아, 네. 해보겠습니다."
자신감이라곤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태도가 걸림돌이지만, 그녀는 그런 걸림돌마저 무시하게끔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인물이다.
헬레나 피에르. 매해 파리에서 열리는 전국규모 요리대회에서 3년 연속 레귬만을 만들어 석권한 셰프. 비록 로랑 마틴에게 패배한 이후 대회에는 더 이상 참석하지 않는 그녀였으나, 레귬이라면 그녀 이상의 인재는 프랑스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봐, 로랑. 얌전히 따르라고는 안 하겠지만 되도록 너도 헬레나의 오더를……."
"압니다. 하란 대로 하면 될 거 아닙니까."
"…… 그래, 알았다면 됐고."
쏘아붙이는 투는 여전하지만, 그나마 조금은 따를 생각을 보이는 모습에 루이는 '그쯤 하면 됐지.'싶은 마음으로 고개를 돌린다.
'진 게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군.'
예전 같았으면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꺼라' 정도의 대답이 돌아왔겠지. 장족의 발전이었다. 발전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간단하게 레시피 점검이나 하고 시작합시다."
루이의 부름에 프랑스팀이 하나둘 자리로 모인다.
그들의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가득하다. 그 누구도 지고 싶은 사람은 없기에.
***
혹시 아는 사실일지 모르겠지만, 한국에는 비건용 레시피라는 것 자체가 딱히 많지 않다.
이건 꽤 특이한 일이다. 보통 외국 같은 경우 비건용 레시피북 따위가 따로 모아 수십 권이 출간될 만큼 다양한 비건용 레시피가 있는데, 한국 쪽에는 딱히 그런 걸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째서일까?
한국은 서양보다 비건의 수가 적어서?
아니면 비건을 위한 레시피를 만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사실, 딱히 그런 이유는 아니다.
세상에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라는 게 있고, 수요가 있으면 그걸 공급하기 위해 획책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한 거다.
한국에는, 비건을 위한 공급이 너무 충분하기 때문에.
이미 알려진 레시피만 먹고 살아도 평생토록 질리는 일 없이 밥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만큼, 비건을 위한 레시피가 충분하니까.
물론 완벽한 비건식으로 바꾸기 위해선 조금 가다듬는 과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비건식이라는 게 처음 부상하기 시작한 계기가 육고기 위주의 생활식습관을 가진 서양인이 건강을 위해 식사에서 야채의 비율을 늘리는 것이었단 걸 생각하면, 동양에 비건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도 설명이 된다.
애당초 고기보다 산나물과 더 친숙한 삶을 살았던 게 우리네 조상님들 아니겠는가.
뭐, 사실 소나 돼지를 먹는 풍습 같은 걸 다시 보면 고기하고도 많이 친하셨던 것 같긴 한데, 그 정도로 서양과 비교하기에는 조금 힘들긴 하다. 거긴 채소를 악마의 작물이라고 부르던 역사도 있는 곳이다.
아무튼, 그런 역사가 깊은 게 한국이다 보니 전통 요리를 배웠다 하면 어느 정도는 비건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침, 우리 팀에는 그런 전통 요리를 정말 극한까지 배운 분이 두 분이나 계신다.
"일단 기본 베이스는 한식으로 가져가는 게 낫겠죠?"
"저도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일단 레시피 검토 후에 조리법이나 재료도 조금 검토를 해봐야겠지만……."
그리고 그 덕분에, 보시다시피 우리들의 시합 계획도 순풍을 받은 배처럼 쭉쭉 나아가고 있었다.
개인전 때는 닭이라는 프랑스 측에 유리한 주제로 진행된 시합이, 이번에는 우리에게 유리한 주제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개인전만 해도 이쪽에게 불리한 주제로 승리했는데, 그 반대의 경우라고 또 있을까.
게다가 프렌치 또한 채소요리를 못 만드는 게 아니다.
레귬이라는 용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채식요리 또한 수많은 연구를 거듭하는 나라가 프랑스다. 우리에게 수백 년 전통의 채식문화가 있는 것처럼 저쪽은 저쪽대로 진지하게 채식에 대해 연구한 역사가 있다.
시합은 단순한 가위바위보가 아니다. 누구에게 유리한 주제가 나왔다고 반드시 승패가 결정되진 않는다.
그러니 결코 발상을 멈추지 말고, 조금이라도 좋으니 계속해서 발상을 이어나가야 한다.
먼저 생각을 멈추는 쪽이 진다. 로랑 마틴만 보아도 그렇다.
지금의 최고에서 만족하는 걸로는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만족하지 못했으니까.
이번에도 그것만큼은 다르지 않으리라고, 난 생각한다.
곧 시작하는 2라운드. 조명이 가득한 조리대에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하는 것이다.
오늘 저 조리대에 서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
잠깐의 작전회의 시간 뒤 돌아온 두 팀이 서로 마주 본 조리대에 서자, 지체 없이 2라운드가 시작됐다.
개인전의 다섯 배로 늘어난 머릿수.
열 개의 팔다리가 분주히 움직이느라 관중은 어딜 봐야 할지도 모를 만큼 눈앞이 어지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작업의 진행속도가 개인전 때에 비해 확연히 빨라졌다는 것이다.
고작 사람 손이 많아져서 빨라진 수준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마치 미완성이던 공장에 비로소 기계가 전부 갖춰진 것 같은.
사람이 네 명 더해졌는데, 업무가 처리되는 속도는 그 배는 빨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프로 셰프가 여럿 모이면 저렇게 되는구나."
"무슨 일상의 달인 나오는 사람들만 데려다 모아놓은 것 같네."
흔히 일이 빠른 사람들을 보고 손이 보이지 않는 수준이라며 과장 섞어 칭찬하지만, 조리대에 선 셰프들의 속도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아직 그 무엇도 명확한 결과물이 보이지 않는 시점. MC와 해설자가 짧은 대화로 경기를 장식한다.
"한국 대 프랑스. 프랑스 대 한국. 제2라운드 팀전! 드디어 그 막이 열렸습니다. 자, 시작부터 엄청난 속도로 재료를 다듬기 시작한 양국. 미리 준비해 둔 재료가 엄청난 속도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다시 봐도,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솜씨입니다."
"역시 세계적인 셰프들의 솜씨는 다르다는 걸까요?"
"그렇죠. 아마 제 요리실력으론 저기 명함도 못 내밀 거예요."
박종원의 너스레에 설마 그러겠냐고 웃음으로 맞받아친 MC였으나, 박종원은 진심이었다.
지식은 누구에게 꿇리지 않을 만큼 쌓았지만, 지식을 두 손으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선 손색이 있는 게 사실이니까.
작은 웃음을 짓고 대꾸하는 그를 보며 MC가 이어서 질문한다.
"2라운드는 개인전과 다르게 랜덤으로 주제가 정해졌는데요. 박종원 해설자님은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비건. 채식주의자 혹은 그런 채식주의자를 위한 요리. 요컨대 야채로만 요리를 만드는 게 이번 2라운드의 주제입니다만, 일단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굉장히 어려운 주제라는 겁니다."
"이번 주제가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
"음……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어제 드신 음식 중 고기나 생선, 계란, 유제품이 들어간 음식을 전부 빼고 말씀해보시겠어요? 물론 성분이 들어간 것도 전부 빼고요."
"어……."
"보세요. 어렵죠? 아마 밥 말고는 생각나시는 것도 별로 없을 거예요. 하다못해 식당에서 자주 쓰는 다시다에도 고기의 성분은 들어있으니까요."
그 모든 걸 제외하고 음식을 만드는 게 안 힘들 수가 있을까. 짧게 웃은 박종원이 말을 잇는다.
"이번 2라운드가 힘든 점은, 그런 만들기 힘든 요리를 무려 세 종류나 준비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제에 따라 다르지만,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의 팀전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메뉴를 준비해야 한다.
물론 어떻게 메뉴를 준비할지는 자유다.
간단한 코스요리 형식으로 요리를 준비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단품 세 가지를 내놓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럴 경우 대부분의 팀은 메뉴 사이의 연결성을 위해 코스식으로 메뉴를 준비하겠지만, 한국이나 일본처럼 밥과 반찬을 함께 먹는 식사문화가 일반적인 나라에선 단품식 구성을 보여준 나라도 있었다.
'아무래도 프랑스는…… 역시, 코스식 구성을 할 생각인가 본데.'
잠시 눈을 굴려 프랑스팀의 조리대를 살핀 박종원은 그들의 조리대 위에 올라간 재료 하나를 놓치지 않고 확인했다.
'초콜릿이라. 비건용인가?'
초콜릿.
초콜릿은 보통 카카오 추출물에 설탕과 우유 따위를 넣어 만들어지지만, 그 외에도 우유를 넣지 않고 카카오에서 추출한 식물성 버터를 넣어 만드는 초콜릿도 있다.
아마 후식에 사용할 식재료로 쓸 목적으로 보였다.
그 외에 당장 주목할 만한 식재료는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코스식 구성을 하리란 걸 안 것만으로도 나름 수확이 있다고 보아도 좋겠지.
"그럼 우리 한국팀은…… 어?"
직후, 한국팀의 조리대로 시선을 옮긴 박종원은, 이내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재료와 조리기구가 질서정연하게 놓인 조리대 아래, 다른 각도에선 보이지 않을 숨겨진 공간.
그곳에서 묘하게 눈에 익은 물체의 형상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와플…… 머신?'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그의 입안을 메아리처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