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개막전.-8-
"졌…… 다고……?"
패배. 짧으면서도 비할 데 없이 굵은 두 글자 낱말에 프랑스팀은 문자 그대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팀 팀장 루이 라벨은 조리모 아래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믿기지 않는 심정을 두 눈에 담아 쏘아낸다.
'쉬운 시합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 로랑이라도 패배할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단 걸 분명 알고는 있었어.'
그렇기에 루이는 이 개인전에서 패배할 가능성 또한 적게나마 점쳐두고 있었다. 혹시라도 정말 지게 된다면 최대한 멘탈을 단단히 부여잡고 이어질 팀전에서 이기겠단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합의 내용에 납득 할 수 있을 때에나 할 수 있는 소리였다.
로랑이 브레센 크루통 드 셀을 준비할 때부터…… 아니. 그 이전에 찬혁이 개인전 주제를 닭으로 고를 때부터 루이는 로랑의 승리를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이 모양이다.
프랑스팀의 단일 최고 전력, 로랑 마틴은 패배했다.
다른 것도 아닌 닭이라는 주제로.
다른 요리도 아닌 프렌치를 베이스로 삼은 요리에.
패배의 분함과 설욕을 논하기 전에 굴욕적이라는 감상이 앞선다. 미국에서 선발한 미식축구 대표팀이 외국의 팀과 겨루어 진다 하더라도 이토록 굴욕적이고 절망스럽진 않았으리라.
프랑스인에게 있어 요리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그들의 자부심이 깃든 대상이었으니까.
"이게, 무슨……."
현 상황의 장본인 중 한 사람인 로랑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입만 벙긋거릴 뿐이다.
루이는 그런 로랑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과장을 좀 보태어 국가적 망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이 방송이 나간 뒤 로랑에게 향할 국민의 지탄을 떠올리면 오히려 제정신인 편이 이상하다. 자신이었다면?
절로 손발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대체 본인은 어떤 생각으로 자리를 수습하고 있는 걸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서리가 쳐지고 소름이 돋았다.
안 그래도 성격 탓에 새긴 수많은 안티 팬을 실력 하나로 조용히 만들어온 그가 이런 식으로 개막전부터 패배를 기록한다면, 이후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자명하다.
굶주린 이리떼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깃덩이에 달려들 듯이 앞뒤 가리지 않고 물어뜯겠지. 농담이 아니라 커리어에 엄청난 오점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오점은 남겼고, 이후의 시합이 어떻게 풀리느냐에 따라 단순한 오점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루이 라벨을 포함한 다른 네 명의 팀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 로랑보다는 사정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그 장본인인 로랑은 사실 자국민이나 팬, 안티 팬의 시선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세간의 평가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로랑은 세간의 평가를 굉장히 신경 쓰는 사람이다.
다만 그 이유가 순수하지 못할 뿐이다.
그가 세간의 평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아버지인 드뷔의 마틴의 자리를 물려받기 위한 것.
대외적으로 로랑을 칭송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후계의 자리는 더더욱 안정적으로 그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실제로 그 전략은 지금까지 잘 먹혀왔다.
프로셰프도 인정하는 기술을 가졌다는 증표인 블루리본을 최연소의 나이에 제 가슴에 달고.
귀찮고 번거로운 국내 요리대회에 하루걸러 하루 꼴로 출전하며 메달을 따내고.
삼형제 중 그 누구보다 빨리 메인디쉬 주방에 설 수 있게끔, 다리근육이 파열되도록 일하고.
그 모든 것이 후계자 자리를 갖기 위한 노력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후계자라는 것에 목숨을 걸었는지는 모른다.
돈 때문일지도 모른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은 그 자체의 수익은 그렇게 크지 않지만 뻗어 나간 프랜차이즈로 들어오는 몫이 크니까.
단순히 요리에 재능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잘 하는 것에 저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는 말도 있듯이, 재능이 열정을 가꾼 경우일지도 모르지.
삼형제의 막내라는 위치. 그 무엇도 온전한 자기 것이 없던 삶에서 아버지의 가게를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것도 분명 이유 중 하나이긴 할 것이다.
사실 이제와선 그 어떤 이유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현재 로랑이 인식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후계자 자리를 따내기 위해 개고생을 해왔으며, 그 꿈이 쥔 주먹 안에 들어와 있단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진다면.'
1년, 10년, 어쩌면 평생.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꼬리표가 붙는 것은 물론이요, 이미 손아귀에 들어온 꿈을 허무하게 놓칠지도 모른다.
기껏 잡은 스니치를 놓치는 건 야만적인 영국놈들이 쓴 소설책에서 나오는 멍청한 등장인물이나 저지를 짓이다.
"이겨야 돼…… 이겨야 된다……."
2라운드. 팀전 개시 전까지 짧은 휴식을 선언하는 MC의 말에 맞춰 선수, 관중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하나둘 자리를 빠져나간다.
대기실로 이어지는 어두운 통로.
그 가운데를 앞서 걸으며, 로랑은 제 주머니에 들어있던 담배를 움켜쥐어 으스러트렸다.
***
"고생 많았습니다, 찬혁 학생. 아주 잘 해줬어요."
"진짜 잘 했다. 덕분에 우리가 먼저 1점 먹었어."
"별말씀을요. 홈에서 하는 개막전을 시작부터 질 순 없잖아요."
대기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내 등을 팡팡 두드리며 칭찬을 쏟아붓는 어르신들의 손길을 피하며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든 작업을 욱여넣겠다고 무리를 해서 그런지 손가락부터 팔뚝까지. 전완근 부분이 조금씩 떨리고 아려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무리를 좀 했나.'
하지만 무리를 안 하면 이기지 못할 상대였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그토록 온갖 기교를 부렸음에도 최종 평가는 고작 근소한 차이의 승리밖에 거두지 못했다는 게 그것을 증명한다.
그냥 닭에다 재료 좀 채우고 반죽 한 장 덮어씌워서 구운 게 전부인 단순한 요리에 이토록 고전할 줄이야.
'진짜, 재료가 사기라니까.'
예전에 사사한 성미설 셰프가 그랬지. 요리는 8할이 재료빨이라고.
그 말이 틀린 게 없다는 걸 살다 보니 점점 뼈저리게 느낀다.
'하지만 이걸 이겼다고 끝이 아니야.'
승점 1점을 얻었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물론 매치포인트는 우리에게 있지만, 고작해야 1점 차이인 것이다.
단 한 번의 승패로 언제든 이 우위가 사라질 수도 있단 것을 간과하면 안 되겠지.
'더군다나 저쪽은 아까보다 훨씬 더 진심으로 임할 테고…….'
상대가 가장 자신감을 갖고 있던 분야로 이긴 건 좋다. 올라오던 기세를 한 번 확실하게 죽였고, 당장 한 판만 더 패배하면 진짜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긴장감도 엄청나겠지.
주눅은 결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긴장은 손끝을 떨리게 만든다.
이런 진검승부에서는 그 작은 불편함 하나가 승패를 가른다. 대등한 승부에서는 먼저 말리는 쪽이 질 확률이 높다.
뭐, 상대도 그걸 모르진 않겠지.
상대에게 압박감을 준다는 건 승부에서 이기기 위한 방도 중 하나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상대를 잘 보고 쓸 대상을 가려가며 사용해야 하는 작전이다.
세상에는 꾹 누르면 풍선처럼 빵 터져 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산소봄베에 공기를 넣는 것처럼 아무리 압박을 가해도 결코 망가지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도 아니면 압축된 화약처럼 빵 터져 버리는 사람도 있지.'
십인십색이라고, 사람이 다섯이 있는데 그 성질이 어디 똑같겠냐마는…….
'한 사람이라도 흔들려준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어떤 지략가도 100%의 확신을 갖고 전략을 구상하진 않는다. 하물며 머리 굴릴 일이라곤 별로 한 적도 없는 내가 뭐 얼마나 잘났다고 사람 속을 다 꿰뚫어 보듯 작전을 짤까.
사실 내가 하는 건 이미 작전이라기보다 그냥 나뭇가지를 하나 꼬나 쥐고 수풀 이곳저곳을 쑤셔보는 것에 가깝다.
운 좋게 삼이 걸릴 수도 있지만, 뱀이 나와 손을 물 수도 있고, 벌집을 건드려 된통 쏘일지도 모르지.
지렁이는 밟으면 꿈틀대는 법이고, 쥐는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조차 물어뜯는다.
벌레와 짐승도 그런 독기가 있는데 사람이라고 없을까.
그걸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굳이 헤집지 못해 안달이냐고?
그야 뭐…… 재밌으니까.
…… 같은 이유는 절대 아니다. 믿어. 아니라고.
아주 객관적으로 내 상태를 평가하자면, 나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팔이 떨릴 정도로 무리해가며 만든 요리로 간신히 이긴 상대가,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더더욱 예리하게 벼린 칼과 두터운 갑옷을 입고 리매치를 신청하는 게 아닐까 해서.
손으로 펌프를 누르면 어느 순간 반발력이 내게 돌아오는 것처럼.
아니, 이 경우 반발력을 일으키는 건 오히려 내 쪽일까.
과하게 긴장한 거 아니냐는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지지만, 내 속에 있는 류찬혁이란 놈은 고개를 젓는다.
오히려 녀석은 이걸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더더욱 눈에 핏발을 세운다.
과민반응. 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체내의 면역체계가 자신이 아는 바이러스나 외부의 침입 따위에 더더욱 활발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십수 년에 달하는 생활로 프랑스라는 나라의 진면목을 아는 회귀 전의 류찬혁은 여전히 프랑스를 향해 촉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지금의 나 또한, 그 의견에는 분명 동의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그건 회귀하기 전의 류찬혁이 가진 의견에 불과하다.
이토록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기 전의 내가 멋대로 새긴 공포다.
멋대로 압박감을 느끼고, 멋대로 폭발해 버린 놈이 할 말은 아니지만.
지금의 나에게 더 이상 그런 압박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방금 증명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반대로 내가 그쪽을 밀어붙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할 차례다.
"……후."
정말 감사하게도, 내가 지쳤다는 걸 알고 계시던 어르신들은 내가 쉬는 시간 내내 사색에 빠져 있던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내 옆을 지켜주실 뿐이었다.
이제 와서 눈치챈 바깥의 소란도 아마 기자 같은 사람을 바깥에서 누군가 막아주고 계신 거겠지.
감사하단 말뿐이 전할 길이 없었지만, 그건 말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전달 드리고 싶었다.
"……좋아. 해보자, 찬혁아. 이기는 거야."
자신을 타이르며, 나는 천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다리의 통증은 얼추 사라졌다. 떨리던 팔도 멈췄다. 흐릿하던 초점도 다시 선명하게 보인다.
만전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이쪽의 몸이 만전이 아니라면 저쪽은 마음이 만전의 상태가 아닐 터.
흔들리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때가 됐다. 우리 팀과 내 자신에게 승리를 선물할 때가.
***
개인전 후의 짧은 휴식이 끝나고 찾아온 2라운드.
개인전이던 1라운드와는 다르게 2, 3라운드는 팀전으로 진행되지만, 만약 여기서 한국팀이 다시 한번 승리한다면 시합은 끝난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절벽 끝에 선 프랑스팀.
창칼을 겨누고 그들을 포위한 한국팀.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
그 최초의 승리자와 탈락자를 정하는 시합.
2라운드의 주제를 스테이지 꼭대기에 달린 전광판이 비춘다.
다양한 종류의 육고기, 생선, 가금류, 채소, 빵, 밥, 면. 그 외 기타 등등.
온갖 재료가 엑셀 차트처럼 붙은 전광판에서 빠르게 점멸하기 시작한 빛이, 이윽고 한 줄기 선이 되고, 이후에는 점이 되어 표 위를 종횡무진 이동한다.
이해할 수 없는 패턴으로 각각의 칸 위를 내달리던 빛의 점은, 곧 제 발걸음을 늦추더니 이윽고 한 자리에 멈춘다.
모두의 숨이 멎은 순간.
그 빛이 멈춘 칸이 전광판 전체로 확대되고, 이윽고 선수단과 관객에 눈에 제 모습을 비췄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 제1시합 두 번째 라운드! 그 주제는……!"
좌중의 눈에 들어온 글자는, 총 다섯 글자의 알파벳.
그 모양을 확인한 사람들의 눈이 깜짝 놀라 치켜 올라가고, MC는 지체 없이 쩌렁쩌렁 그 이름을 외친다.
"비건vegan! 한국 대 프랑스, 프랑스 대 한국! 제2라운드의 주제는 채식요리입니다!"
채식요리.
비건이란 생소한 발음이, 한국팀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