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개막전.-3-
프랑스. 프랑스라.
저 국기를 내가 잘못 볼 리가 없다.
한국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 체류한 나라이자, 회귀 전 내 마지막 직장이 있던 나라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금은 나와 프랑스의 관계 같은 것보다, 프랑스란 나라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중요하다.
프랑스. 프랑스가 과연 어떤 나라인가.
유럽국가?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관광지가 있는 곳?
그 모두가 맞는 말이지만, 요리인에게 '프랑스'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프랑스 요리. 즉 프렌치다.
프랑스 요리는 로마부터 시작하여 이탈리아, 게르만, 심지어는 터키와 러시아 요리문화까지. 이 모든 역사가 귀족주의와 어우러져 탄생한, 그들 말을 빌리자면 혁명적인 문화였다.
한 번 고급 요리라는 틀이 정립된 뒤로 유럽 식문화를 이탈리아와 함께 선도한 쌍두마차.
우리나라에서 서양 요리라는 말을 할 때 프렌치가 결코 빠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렌치 자체가 서양의 가장 큰 일각인 유럽의 요리를 집대성한 것이기에.
그들 나라의 요리가 세계 최고라고 믿는 프랑스 국민이기에 그 나라에는 그만큼 요리에 진심인 사람이 많다.
나는 딱히 프랑스 요리가 반드시 최고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프렌치의 위상과 쌓은 역사는 분명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라는 건 확실하다.
'뭐 그야 나라의 요리 수준이 그 나라 셰프의 수준을 결정하는 건 아니긴 하지만…….'
그건 영국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다만 명심할 게 있다면, 요리의 평균치가 높다는 건 그만큼 셰프의 평균치 또한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 안 그럼 벌어먹고 사는 게 힘드니까.
일종의 '살아남은 놈이 강하다' 법칙은 이런 곳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그다지 반가운 소식은 아닌 것이…….
"…… 너, 진짜 똥손이구나."
"너는 도박 같은 건 평생 손도 대지 마라."
"그건 원래 하면 안 되는 거고요."
"아, 그럼 로또는 하지 마."
하필 그런 나라가 우리 상대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걸 뽑은 장본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고.
대체 어디서부터 내 운세가 이렇게 꼬였단 말인가. 참,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상황이지 않을 수 없었다.
***
"한국팀이 상대라."
"1회전부터 골치 아프게 됐네요."
한편, 프랑스팀 대기실.
생각지도 못한 대진표를 뽑아낸 탓에 소란스러운 한국팀처럼 그들 또한 그다지 냉정한 상태는 아니었다.
아무리 자국의 식문화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그들이라지만, 그렇다고 그 후광에 눈이 멀 만큼 오만하진 않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한국팀은 시즌 2 참가국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팀이 분명했다.
당장 전 시즌의 우승을 책임진 팀장과 핵심인력 한 사람이 그대로 팀에 남아 있었고, 거기에 더해 이번 대회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요리사가 소속된 팀이다.
두 차례 연속으로 최연소 팀원을 데리고 대회에 참가한 그들의 저의가 의심될 정도지만, 시즌 1 때에도 만인이 무시했던 소녀가 우승의 단초가 되어 일약 스타가 되었던 전적이 있다.
과연 이번이라고 그게 크게 다를까? 아마 그럴 리는 없겠지.
한국팀은 공교롭게도 어느 팀이든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놓인 것이다.
본래 사람은 위기를 알 때야말로 가장 신중해진다.
평생 동물과 벗 삼아 살아온 조련사도 맹수에게 먹이를 줄 때엔 긴장하듯이.
수백, 수천 마리의 복어를 해체한 기술자도 새 복어를 잡을 때 똑같이 조심하듯이.
그들은 한국팀이 그만한 위험성을 가진 상대임을 똑똑히 명심하고, 주의하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드네.'
물론, 그들 전부가 한마음 한뜻인 건 아니었지만.
"무슨 대단한 놈들이라고 그렇게 소곤대고 자빠졌어?"
"로랑."
"어차피 첫 개인전에서 나가는 건 나야. 당신들이 연달아 지지만 않으면 당연히 이 팀이 이길 거고."
"네 실력은 우리도 알지만, 팀인 이상 너도 우리 계획을 따라야……."
"됐고, 한 대 빨고 올 거니까 그 계획인지 뭔지 알아서 하쇼."
그 말과 함께 값비싼 메이커 라이터를 보란 듯이 손으로 튕기며 대기실 바깥으로 나가는 남자, 로랑을 보며 팀원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20대 후반의 나이. 이 자리에 모인 다른 팀원과 비교하면…… 아니, 이 대회 전체 참가자 평균보다 확연히 어리다.
아마 찬혁이 참가하지 않았다면 대회 최연소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돌아왔을 터였다. 어느 의미 찬혁과 비슷한 위치라고 볼 수 있겠지. 성격만큼은 정반대였지만.
"진짜 왜 하필 저놈이 예선전을 뚫고 올라와서."
"그만큼 능력이 됐다는 뜻이지."
로랑 마틴.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맛을 찾는다면 이곳을 향하라는 평가를 듣는 세 가지 장소가 있다.
서민 요리의 리옹, 고급 요리의 부르고뉴, 그리고 총본산 파리.
로랑 마틴은 그중에서도 파리의 번화가에 자리한 초대형 레스토랑의 후계자다.
현재 마틴 가문 삼형제 중 막내의 위치에 있음에도 두 형을 제치고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 자체로 이미 실력에 대한 의심을 끊기엔 충분했고, 이는 파리에서 열렸던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파리 예선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를 통해 증명됐다.
협조성이 떨어지는 탓에 팀장은 그에게 돌아가지 못했지만, 협동성을 제하더라도 일신의 기량이 떨어지는 협동성을 가뿐히 채우고도 남는다.
프랑스팀이 개인전을 반쯤 그에게 일임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진가는 팀전이 아닌 개인전에서 나오기에.
"아무리 봐도 제 아버지랑은 거리가 멀다니까."
파리 최고의 거장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그의 아버지를 쏙 빼닮은 요리 실력만 아니었다면 어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축 늘어진 어깨를 깊게 숨을 들이켜 제자리로 돌려놓은 프랑스팀의 팀장, 루이 라벨이 팀원에게 손짓했다.
"저 녀석은 제멋대로 하게 놔두고, 우린 우리대로 준비합시다."
어차피 말을 해서 들어먹을 로랑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나온 포기였다.
***
"하. 요리의 모차르트 좋아하시네."
인적이 드문 행사장 구석에서 독한 담배연기를 뱉은 로랑이 내던진 꽁초를 짓밟으며 표독스레 중얼거렸다.
"고작 나이가 어리다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떠받들어진 탓에 천방지축으로 자란 로랑은 머리가 굵어진 뒤론 제 형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난폭한 성정을 자랑했다.
아마 본인은 자기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라는 걸 영영 깨닫지 못하겠지만 주변에서 로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할 정도였다. 툭 건들면 퍽 때리는 걸로 모자라 난타가 돌아오리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성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요리 솜씨만큼은 대체재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예선전 동안 수많은 안티를 생산했음에도 그것을 압도하는 두터운 팬층이 생긴 것이다.
당초 로랑은 이 대회에 나오면 당연히 대회의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는 건 자신이 될 줄 알았다.
명성, 외모, 실력, 나이.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 이상 눈에 띌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또 한 번 한국에서 말도 안 되게 어린 나이의 참가자가 등장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예선전을 통해 그때보다 더더욱 커다란 화제를 몰고서.
한 곳에서 태풍이 불면 다른 곳의 비구름을 몰아가듯이, 로랑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자국에서는 당연히 찬혁보다 로랑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냈으나, 그마저도 완전히 찬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끊어낸 수준은 아니었다.
"Merde!"
뒷굽으로 꽁초를 짓이긴 로랑이 욕을 내뱉는다. 이 방송은 자신이 그의 조부와 부친이 세운 왕좌를 물려받는 승계식의 퍼레이드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관심을 전부 가져간 찬혁이 아니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빼앗긴 관심을 찾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대중이 보는 자리에서 정면으로 짓밟아주는 것.
그 기회가 이토록 빠르게 찾아왔다. 로랑은 그 사실을 반겼다.
아마 일이 잘 풀린다면 개인전에서 찬혁과 대결할 수도 있을 터. 분명 팀의 전략과는 반대되는 행동이겠지만, 애당초 그런 건 로랑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꽁초가 아예 갈가리 찢기도록 빙글빙글 짓이긴 로랑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행사장을 바라봤다.
"홈에서 아주 개쪽을 만들어주마."
***
"로랑 마틴…… 이 사람이 여길 나올 줄은 몰랐는데."
젊은 날의 로랑 마틴인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다 만났다.
회귀 전, 로랑 마틴은 프랑스 요식업 판에서 여러모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 아니, 부정적인 쪽이 좀 더 많았던 것 같다.
'솔직히 조금은 아니었지.'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인 곳의 오너임과 동시에, 파리에서 가장 싸가지 없는 셰프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고객이든 직원이든 평론가든 일괄되게 싸가지가 없어서 오죽하면 박애주의자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더랬다. 평등하게 사랑하긴 하는데 그 사랑이 개미 눈곱만큼도 안 된다는 의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레스토랑을 찾는 고객의 발걸음은 그 이전 오너 시절에 비해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생긴 거 하나는 모델 뺨치게 잘 생긴 덕분인지, 아니면 그만큼 요리 실력이 출중한 덕분인지.
개인적으로는 전자든 후자든 기분 나쁜 건 똑같긴 하다. 얼굴로도 손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양반이 그것만 믿고 뻗대는데 동업자 입장에선 당연히 짜증나지.
…… 딱히 내가 그 양쪽에 해당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믿어. 이래 뵈도 왕년에는 애인도 있었다고. 다들 요리랑 자기 중에 누가 더 중요하냐며 끝끝내 파국을 맞은 탓에 결혼은 못 했지만.
어쨌든, 요리 실력만 따지면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상대다. 거기다 다른 팀원도 프랑스 살면서 한 번씩은 이름을 들어봤던 실력자들이고.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의심은 들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다.
이쪽은 홈에서의 체면까지 걸렸다. 진 다음에 찾아올 비난을 생각하면, 이기기 위한 고난이 훨씬 싸게 먹힐 테니까.
곧 시합이 시작된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전이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비로소 시작된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 한국 대 프랑스! 프랑스 대 한국! 각국의 선수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시즌 2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전! 첫 시합부터 강력한 우승후보로 점쳐지는 다크호스 프랑스 팀과 전 시즌 우승자인 한국팀이 맞붙게 되어 많은 분들이 당황하셨습니다만, 과연 개막전의 테이프를 자르고 위로 올라갈 팀은 누가 될 것인가?!"
"두 팀, 스테이지 중앙에서 나란히 마주섭니다!"
화려한 조명이 두 팀을 감싼다.
미러볼처럼 작게 펼쳐졌다, 이윽고 한곳으로 뭉치며 사방에서 그들을 에워싸는 조명의 군집.
그림자가 생기지 않을 만큼 밝은 빛무리 안에서 두 팀이 악수를 나눈다.
"……."
"……."
팀원 중 가장 관객석과 가까운 자리에 선 찬혁과 로랑의 시선이 맞부딪친다.
찬혁의 크게 유감 없는 시선에 대비해, 구겨진 인상으로 째려보듯 시선을 보내는 로랑.
악수를 위해 맞잡은 손에 유난히 힘을 싣는 로랑을 따라 찬혁도 마주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잘 해봅시다."
"!"
프랑스어로 약 올리듯 툭 말을 건네니 더더욱 인상을 찡그리는 로랑. 손을 놓은 두 팀이 팀장만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가고, 그들 사이에 선 심사관이 가볍게 동전을 튕긴다.
코인토스.
두 팀장이 앞, 뒤를 손 모양으로 정하고, 심판이 손등에 떨어진 동전을 덮었던 손을 치운다.
동전의 방향은 앞. 프랑스팀이 고른 쪽이었다.
"이번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는 개인전 한 번, 단체전 두 번을 시행하는 3전2선승제 시합입니다. 시즌 1 때와 같죠."
"하지만 변한 게 없는 건 아닙니다. 그 변한 것이 바로, 지금 여러분이 보신 선공 시스템이죠."
"코인토스에서 선공을 가져간 팀은 상대팀에서 개인전에 나올 선수를 지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후공을 가져간 팀은 개인전에서 사용할 요리의 주제를 고를 수 있죠!"
"전략적인 선택을 필요로 하는 부분입니다. 각 팀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수집했느냐가 중요해지겠습니다!"
프랑스팀의 개인전 대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로랑이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스테이지 중심에 나온 그가, 손가락을 들어 찬혁을 가리킨다.
"너, 나와."
시합이 떠나갈듯한 환호성이 울린다.
프랑스팀에서도 독보적인 팬층을 보유한 그가, 이 대회 최고의 화제인물인 찬혁을 당당하게 지목한 것이다.
찬혁 또한 아무 거리낌 없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스테이지 중앙으로 향한다.
"나왔다."
"하."
이번에도 프랑스어로 대꾸하는 찬혁을 보며 로랑이 사납게 웃었다.
요리대회장이 아니라 격투대회장이라도 된 것 마냥, 서로 한 대 치기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내뿜는 두 사람을 심판이 가로막으며 찬혁에게 묻는다.
"후공은 주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류찬혁 선수. 주제를 선택해주시죠."
"얼마든지 자신 있는 걸로 덤벼라. 아예 네 나라 요리를 주제로 고르던가. 그러면 차라리 승산이 있겠는데."
도발하듯 웃는 로랑을 보며, 찬혁이 마찬가지로 웃음으로 되받아쳤다.
"주제…… 좋네. 주제. 마침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뭐?"
이윽고 찬혁의 입이 열리자, 잠시 찡그려졌던 로랑의 눈이 희번덕 치솟는다.
"닭 요리. 닭 요리로 한 판 붙어봅시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려는 듯 구는 로랑에게, 찬혁이 돌려준 것은 나라의 자존심을 건드는 것이었으니까.
어두운 금발 아래, 잘생긴 얼굴이 무색하도록 잔뜩 핏대가 솟은 로랑을 보며 찬혁이 웃었다.
"설마 쫄리진 않지?"
예의에는 예의를, 무례에는 무례를.
찬혁이 만리타향에서 살며 배운 법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