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09화 (309/403)

309. 개막전.-2-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은 기본적으로 범국가적 이벤트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결국 그냥 방송일 뿐이지만.'

딱히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국제적으로 이벤트를 주관하는 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각국 방송사의 협의로 세계적으로 생방송을 때리는 요리대회일 뿐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규정이 유연한 편이었다.

예를 들면, 대회 중에 개최 국가를 마구잡이로 옮겨 다니는 것조차 말이다.

애당초 개최 국가라는 게 없으니까 더더욱 가능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은 크게 나누어 총 다섯 번의 경기를 갖는다.

32개의 팀으로 시작하여 16강, 8강, 4강, 3위 결정전, 마지막으로 결승전.

가끔 특례로 모종의 이유에 의해 빠진 팀을 패자부활전을 통해 뽑힌 팀이 대신하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시즌 1의 한국팀의 패자부활전을 통해 우승까지 쟁취한 기록은 기적에 가깝다. 이번엔 지면 두 번째 기회는 없다고 봐야겠지.

아무튼, 그렇게 다섯 번의 경기를 치를 동안 대회는 한 곳에서 치러지지 않는다.

방송사에 돈이 썩어 넘치는 건지, 아니면 그렇게 해야 돈이 더 잘 벌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치안, 시설, 교통, 숙박, 편의 등등. 여러 깐깐한 조건을 통과한 나라 중 내정을 통해 정해진 나라에 지어진 스튜디오에서 대회가 열린다.

솔직히 뭐하러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녀야 하나 싶지만, 방송국에서는 그게 관객 안치를 위해 훨씬 나으리라 판단한 듯싶다.

'근데 나라를 자꾸 돌아다니면 그만큼 관객이 안 따라오는 거 아닌가.'

만약 대회를 위해 스튜디오를 지은 나라의 팀이 제 나라로 돌아가기도 전에 패배하기라도 했다간…… 우와, 상상도 하기 싫은데.

2002 월드컵을 열었는데 한국대표팀이 예선에서 패배했었어 봐, 그럼 진짜 그만한 악몽도 없다. 물론 우리 지구-1에선 4강이었지만.

아무튼, 대체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나라에서 몇 차전이 열리느냐에 대한 사항은 여전히 극비 사항이다. 오죽하면 참가자마저 모를 정도다.

"하지만……."

1차전.

1차전만큼은 다르다. 그건 이미 모든 참가자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을 테지.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제작진은 경사스런 시즌 2 첫 번째 시합이 열릴 나라를 선택할 때, 한 가지 사견을 곁들였다.

뭐, 대단한 사견은 아니다. 그냥 있을 법한 사견이지.

그래서 그 사견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 거 참, 처음부터 부담스럽네."

시즌 1 우승국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는 명제 아래, 첫 번째 개최국이 정해진 것이다.

그래. 맞다.

첫 번째 시합인 16강전이 펼쳐질 나라.

그 나라의 이름은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

이제 막 가을에 들어선 날씨지만, 여전히 여름의 열기가 남은 거리는 옷을 두껍게 입기는 애매했다.

말단부터 주홍, 노랑, 갈색으로 물드는 가로수의 색채는 꼭 뿌리염색 시기를 놓친 젊은이들의 머리칼처럼 형형색색 다양한 빛을 자랑했고, 덤으로 도로에 내려앉은 황사와 꽃가루 탓에 조금 텁텁한 공기가 폐부를 채운다.

그럼에도 가을의 계절풍이 먼지를 몰아낸 하늘은 더없이 높다. 말이 살찌는 계절이다.

머리를 찍어 누르던 습도와 기온이 천천히 가라앉고 가슴이 점차 상쾌해지는 입추의 날씨.

그렇게 돌아오기 시작한 활기를 반영한 것인지 지금 내가 있는 행사장은 유난히 잔뜩 몰린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끄럽다.

'딱히 날씨 때문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평소 홍대 같은 번화가에 가도 볼 수 없을 법한 사람의 무리.

이 정도면 크리스마스 이브의 홍대와 비슷하지 않은가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저번 푸드 엑스포 때 상하이가 생각날 정도다.

거기에 더해 그 사이사이에서 자주 보이는 외국인의 얼굴.

명동이나 이태원처럼 외국인의 비중이 높은 지역보다도 지금 이 자리가 더 외국인이 많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이 아니겠지.

"진짜 많기도 하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건물 2층에서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는 내가 다 답답할 지경이다.

시야가 꽉 막힌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이미 창문으로는 사람밖에 안 보이긴 한다만.

좁은 채광창도 아니고 이렇게 커다란 창문이 사람으로 꽉꽉 차다니, 대체 저 중심에 서 있으면 얼마나 빡셀지 상상도 안 간다.

뭐, 사람이 이토록 많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오늘은 다름 아닌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이 개최되는 날이니까.

'그나저나…….'

저렇게 많은 사람이 우리를 보러 온다는 거구나.

그런 사실을 깨달으니 새삼스럽게 부담감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야 뭐, 저기 있는 모든 사람이 우리만 보러 오는 건 아니라 치더라도 여기까지 찾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팀보단 한국팀에 더 관심이 많지 않겠는가.

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경기를 벌여야 하다니…….

'16강에서 지기라도 했다간…….'

우와, 진짜 평생 얼굴 못 들고 다닐지도 몰라.

홈 매치라도 좋기만 한 건 아니라는 사실에 전율하고 있을 무렵, 마침 팀장 회의를 하러 떠나셨던 교장 선생님이 대기실로 들어오셨다.

"아,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회의 잘 끝나셨어요?"

"그래요. 이후 일정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자, 이거 받으세요."

교장 선생님이 나눠준 프린트는 일종의 일정표였다.

어차피 아직 대진표도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대략적인 일정표였지만, 그래도 행사 진행 방향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오프닝 촬영 순서는 개최사와 선수 및 심사단 소개를 하게 될 거예요. 그다음엔……."

"대진표 뽑기겠네요."

"예. 현장에서 직접 뽑아서 실시간으로 대진표를 작성한다고 합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어쩐지 여태까지 대진표 발표가 안 나오더라니. 하긴, 뭐든 방송으로 내보낼 소재가 필요할 테니.

"어차피 섞는 건 기계가 해주니까, 대진표가 어떻게 나오느냐는 운에 걸린 거네요."

그럼 딱히 대진표를 뽑는 건 신경 안 써도 될 테지. 그렇게 생각하며 일정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고개를 드니, 교장 선생님이 묘한 얼굴로 말씀하신다.

"그래도 첫 행사인 만큼 팀을 대표하는 얼굴이 필요하긴 해요. 그래서 말인데……."

교장 선생님의 시선이 날 향했다.

"찬혁 학생. 혹시 대진표 뽑기에 나갈 생각 없나요?"

"예?"

잠깐, 뭐라고요?

"팀장은 교장 선생님이시잖아요. 아니, 물론 저야 괜찮긴 한데요."

"팀장이 꼭 팀 대표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괜찮다고요? 그럼 됐네요."

"예, 어라. 예?"

이게 이렇게 정해져도 되는 거야?

나도 모르게 지어진 황당한 표정으로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자니, 교장 선생님이 웃으며 답한다.

"아마 이 행사장에 찾아온 많은 관객이 찬혁 학생을 직접 보는 걸 기대하고 있을 거예요. 이럴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혹시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그…… 안 될 이윤 없죠. 예."

"그럼 됐네요. 다른 분들도 괜찮으시죠?"

교장 선생님의 질문에 다들 아무 반론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이러면 진짜 내가 나가야 돼?

당혹스런 날 놔두고 그거면 됐다는 듯 수긍하는 팀원의 모습에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 안 그래도 주아 녀석이 관종짓 좀 작작하라 그랬는데 이러면 또 나가리 아닌가?

정말 이게 맞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교장 선생님이 말을 한마디 덧붙이신다.

"아, 근데 찬혁 학생 혹시 뽑기 운은 좀 좋은 편인가요?"

"아."

"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동건 사장님과 차윤구 셰프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요.

아니 진짜 왜. 내 뽑기 운이 뭐가 어때서.

그 얼굴을 보니 괜히 오기가 발동한다.

그래, 보여주겠어. 나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다. 팀이 32개나 되는데 그중에서 설마 꽝을 뽑을까.

아무래도 예선전 때 내가 뽑기 걸리는 걸 보고 그러나 본데, 이 기회에 내가 운이 좋은 편인 사람이란 사실을 똑똑히 알려주겠다.

***

망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다.

옳은 건 내가 아니라 유동건 사장님과 차윤구 셰프 쪽이었다.

역시 내가 뽑기 같은 걸 하면 안 됐던 거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개막식. 오프닝 촬영.

천수백에 달하는 관중 앞에서 각 팀과 선수 소개, 그리고 심사단 소개가 끝난 뒤 대진표 추첨이 시작됐다.

동그란 구 형태의 기계 속에서 난잡하게 휘날리는 플라스틱 공. 꼭 언젠가 봤던 로또 추첨 기계 같은 모양이지만 저기서 공을 집어 뽑는 건 팀 대표로 나선 참가자들의 몫이었다.

하나둘 순서대로 채워지기 시작한 대진표의 빈칸.

한국의 차례는 중간쯤이었고, 곧 대진표의 빈칸이 얼추 사라진 시점에서 한국팀을 호명하는 MC의 말에 내가 나섰다.

살면서 그렇게 환호성과 박수를 받아본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성대한 환영 속에서 나는 동그란 아크릴 구 속에 손을 집어넣고 공을 빼냈다.

그 직후, 내가 뽑아낸 공에 적힌 번호를 본 난 잠시 실성과 패닉의 경계에 발을 담근 것 같은 기분이 됐다.

내가 뽑은 공에 적힌 번호는 1번.

절로 과거가 떠오르게 하는, 기분 나쁜 번호였다.

'1번이라고?'

우습지도 않은 일이었다. 1번이라니.

개막식 직후 시작될 첫 시합을 벌여야 한다는 뜻 아닌가.

머리가 터질 듯 아파온다. 개막식에 이은 개막전. 당연히 엄청난 시선이 주목될 자리를 뽑았다는 생각에 나는 미처 다른 팀이 몇 번 공을 뽑았는지조차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 제대로 생각했으면…… 아니, 그랬으면 진짜 발광했을지도 몰라.'

첫 번째 시합에 나서는 거? 그래 좋다. 그 정도야 뭐. 이미 관심을 받는 데에 제법 내성이 생긴 나는 충분히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2번 공을 뽑은 팀의 이름을 확인하기 전까진.

"한국팀! 1번! 1번을 뽑았습니다!"

"한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 그 개막전의 일각은 다름 아닌 한국팀입니다!"

"그렇다면 한국팀의 상대는 자연적으로 2번을 뽑은 팀이 될 텐데요! 2번을 뽑은 팀이 어디였죠?"

"잠시만요…… 어? 잠깐만요. 2번을 뽑은 팀이 정말로 여기라고요?"

마이크로 흘러나오는 당황스런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MC의 목소리에 나는 저도 모르게 내 뒤의 전광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 비추던 화면이 대진표가 그려진 화면으로 전환되고, 가장 좌측 상단. 1조로 분류된 곳의 빈칸에 태극기가 선명히 표시된다.

그리고 그 아래 2번 자리에는…….

"…… 아니, 잠깐만."

청, 백, 적.

세 가지 색상의 줄이 나란히 늘어선 단순한 모양의 국기.

우연찮게도 내가 살면서 본 국기 중 태극기 다음으로 많이 봤던 국기가, 2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제1시합! 한국의 상대는 프랑스입니다!"

"한국vs프랑스! 프랑스vs한국!"

"시드권을 가진 두 국가가 1차전에서 맞붙습니다!"

…… 아니, 진짜. 장난치지 마.

떡 벌어진 내 입에서, 웅얼거림인지 절규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이 튀어나와 내 발 저변에 낮게 깔린다.

"…… 망했네, 이거."

이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러했다.

어이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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