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Last summer.-2-
기말고사라는 게 학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극히 일부의 학생에게는 가끔 그렇지만도 않은 작은 사건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언가 기말고사보다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그 극히 일부의 학생이란 카테고리에 내가 소속된 듯하다.
"기말고사야 제대로 치긴 해야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말고사 시즌에 펜과 노트보다 칼과 도마를 훨씬 자주 만지는 고3이 몇 명이나 있겠냐고.
근데 그게 나야. 허 참. 수능 준비에 지식을 파먹는 새에게 뇌를 쪼이는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나는 하루 수업이 끝나면 독서실이 아니라 실습실로 향한다.
다음 하는 일은 간단하다.
서로 다른 비율로 섞은 소금물로 미각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몸을 푼 뒤, 내가 아는 레시피를 이것저것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만들어보며 언제든 특기를 발휘해도 괜찮게끔 기초와 심화를 동시에 쌓는다.
유동건 사장님이나 차윤구 셰프와 함께 훈련을 진행할 때에는 하지 못했던, 일종의 명상 같은 자기관조의 시간이었다.
다만, 나도 슬슬 이런 행위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참이다.
딱히 더 이상 이런 짓도 못 해 먹겠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내 능력적인 한계가 조금씩 다가올 뿐이지.
일종의 역치라고 할까.
게임 캐릭터가 시스템으로 설정된 일종의 이론적 한계치를 가지고 있듯이, 나도 그 한계에 다다랐다는 느낌을 종종 받을 때가 있다.
차라리 게임 캐릭터처럼 레벨업을 하면 단숨에 능력치가 상승한다면 모를까, 나도 사람인 이상 그럴 수는 없다.
평생 스코어 컨트롤로 판정승을 따내며 먹고 산 복서가 갑자기 대오각성하여 어떤 상대든 일격에 KO시킬 수 있는 핵주먹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그러나 반대로, 내가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주어진 한계라는 게 없다는 점이다.
모르는 게 있다면 배우면 되고, 무언가 하나라도 배웠다면 거기서 가지를 뻗쳐 또 다른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사람이란 한평생을 배우며 살아가는 동물이고, 그 한평생이 끊임없이 겹쳐 쌓인 게 바로 지금의 나니까.
실제로, 이미 난 회귀 전의 전성기 때보다 요리사로서 훨씬 진보했다.
그때의 난 그곳이 내 한계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멈추지 않으면 나아갈 수 있다.
그건 굉장히 희망적인 말인 동시에, 끔찍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희망고문이라는 단어가 괜히 생긴 게 아닌 것처럼.
인식의 차이. 내 발이 멈춘 곳을 목적지라고 인식하느냐, 아니면 가는 도중 주저앉은 것이라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의 만족도가 달라진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발을 멈춘 곳이 내가 목표했던 곳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끔, 앞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진 나아가야 한다.
그게 내 각오다. 그저 그뿐인 각오.
각오했다면, 한번 말을 뱉었다면, 그것만큼은 지킨다는 남자의 집념.
그런 류찬혁이란 무지렁이 앞에 또 나아갈 길이 보였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멈출 수는 없지 않겠는가.
"후……."
칼과 팬을 놀리느라 까진 굳은살에 배인 피를 닦아내고, 나는 잠시 실습실 구석의 의자에 걸터앉아 이전에 받았던 통지문을 꺼내 들었다.
"강화 합숙이란 말이지."
무슨 호텔 다닐 시절 했던 신입사원 집중교육주간에 가는 것도 아니고, 이런 걸 살면서 또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직 길이 보이잖아.
그럼, 걸어야지.
***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에 참가하는 국가는 결코 적지 않다.
전 세계 204개의 국가 중 백 곳 이상이 출전하는 푸드 엑스포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것과 비교라도 될 수 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평범한 요리대회의 수준은 넘은 지 오래다.
더군다나 이번 시즌 2는 시즌 1의 영향을 받아 더더욱 참가국이 늘어난 상황.
아무리 그래도 그만큼 많은 인원을 수용하여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는 없기에, 참가를 표명한 국가에는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의 공식 심사단이 파견되어 일종의 심사를 진행한다.
시즌 1에서 4강 이상에 진출하여 시드권을 보유한 8개국과 새로이 심사를 받아 본선 진출권을 갖는 24개국.
거르고 걸러진 32개국의 팀이 본선에서 맞붙게 되는 게 바로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인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한국팀은 저번 시즌 1 때 우승하여 시드권을 보유한 팀입니다. 덕분에 예선전이 끝난 뒤에도 제법 여유가 있었죠."
다른 팀은 예선전이 끝나자마자 본선 심사단에서 자격검증을 한다고 상당히 바빴을 거라며 우리에게 말하는 이 사람은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의 합동 스폰서 방송사에서 나온 방송국의 PD…….
그렇다. 또 오대수PD님이었다.
에. 왜 PD님이 또 여기 계시는 겁니까.
라고 물으니, 우리의 강화 합숙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비하인드 필름으로 우리들의 합숙생활을 촬영하기 위함이라던가.
"아, 그래도 연습에 최대한 피해가 안 가게끔 주의해서 촬영하도록 하겠습니다."
글쎄. 사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것 자체로 조금 신경이 쓰일 것 같기도 한데…….
"대신 이 시설은 저희가 완전히 대여한 곳이니까 강화 합숙 기간 동안 24시간 언제든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아 그럼 인정이지.
오히려 잘 찍게 우리가 뭐라도 좀 도움을 줘야 하는 거 아닐까.
"아무튼, 이렇게 모이셨으니 다시 한번만 자기소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간단한 대면 인터뷰 식으로요."
가슴으로 받치는 형식의 짐벌을 착용한 오대수PD 앞에서 우리는 한 명씩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팀 팀장 역할을 맡은 안영길입니다."
"이전 시즌에서 안영길 선생님과 함께 출전했던 이영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동건이라고 합니다. 그…… 예전에 레스토랑을 퇴사해서 지금은 작게 치킨집 하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차윤구입니다. 중식 전문 셰프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카메라가 차례차례 돌아가며 각자를 비춘 후, 마지막으로 내게 돌아온다.
"이렇게 또 인사드리네요. 성심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류찬혁입니다. 나이가 어리다 보니 선배님들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내 말이 끝나자 오대수 PD님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OK 싸인이 나온 듯싶다.
짐벌 딸린 카메라를 그대로 벗어서 다른 스태프에게 넘겨준 그가 다시금 아까 가져온 자석으로 붙인 프린트가 가득 달린 이동식 화이트보드를 끌어온다.
"아까에 이어서 설명을 드리자면, 저희가 지금 강화 합숙 계획을 짠 것도 해당 사항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대수 PD님의 설명에 의하면 얼마 전 본선 심사단에 의한 자격검정이 끝나고 비로소 본선에 올라올 32개의 팀이 정해졌다고 한다.
본선 날짜도 이제 막 눈앞으로 다가왔고, 상대도 정해졌으니 훈련에도 집중과 선택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 건데, 이쪽이 조금 더 여유가 있다고 쉽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시드권을 가진 나라는 다른 팀에 비해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더 길지만, 그 대신 저희에게도 적잖은 패널티가 있어요."
"패널티요?"
무슨 뜻이냐며 의문을 보내는 우리에게 오대수 PD님이 답한다.
"여러분도 예선전이 웹플릭스를 통해 방송된 건 알고 계시죠?"
"아, 예. 알고 있죠."
"그럼 혹시 이 중에 웹플릭스로 예선전 방송 보신 분 계신가요?"
그 말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고개를 젓는다. 애당초 굳이 웹플릭스로 안 봐도 TV가 있고, 거기다 월요일 아침만 되면 실황 중계를 해주는 친구들이 잔뜩 있어서 볼 필요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전문 방송인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찍혔는지 모니터링을 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뭣보다 부끄럽다. 시간도 부족하고.
오대수 PD님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다.
"아마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저희가 촬영한 예선전 내용은 웹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공개 컨텐츠로 등록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잠시 말을 고른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전 세계 대상으로 공개된 예선전은, 시드권을 가진 국가의 예선전뿐입니다."
"…… 엥?"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잠깐만. 시드권을 가진 나라만 예선전이 공개됐다니?
"아마 웹플릭스 측에서 시드권이 없는 나라의 예선전은 집중도가 떨어질 거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32개국 전체를 전 세계 공개로 돌려서 비용 대비 시청률이 하락할 바에야 버릴 건 버리고 집중하기로 한 거겠죠."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분명 시드권을 가졌다고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정보 불균형이 엄청나겠는데…….'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시드권을 가진 나라는 예선전을 통해 참가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무엇이 특기이고 약점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가 굉장히 투명하게 공개됐다는 것.
반대로 시드권이 없는 나라는 영상자료도 VPN 따위를 돌려서 얻어야 하고, 따로 이쪽에서 번역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확실한 자료를 얻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로스터가 투명하게 공개된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이 맞붙으면 과연 누구의 승률이 더 높을까?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된 만큼 다른 팀의 주목도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시드권을 가졌다는 건 이전에 이미 한 차례 실력을 검증했다는 뜻, 거기다 우리는 전 시즌에서 우승했던 팀이기도 하다.
아마 시드권을 가진 그 어느 팀보다 주목과 견제가 심하리라.
"이 정도면 저희 팀 정보는 이미……."
"예. 아마 벌써 낱낱이 해부당한 지 오래겠죠."
이 모든 설명을 하나로 종합해보면, 대략 이런 뜻이 되겠구나.
"…… 이번 시즌은 상당히 험난해지겠네요."
"아마 저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거의 모든 게 동등한 수준에서 경기를 펼쳤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거의 모든 팀의 견제를 받으며 경기를 펼칠 판이라 이거지.
이걸 운이 나쁘다고 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강팀의 숙명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후자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자기과시 같은데 말이야.'
정말로 강팀이 되는 것과, 강팀이란 인식이 박히는 건 다른 관점의 문제다.
강팀을 상대하는 팀은 필연적으로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대비를 하는 법이니까.
요컨대 우리는 모든 경기를 평소보다 포텐셜이 높은 상대와 다퉈야 한다는 뜻이 되겠지.
그거 참, 힘든 걸 꺼리는 성격은 아니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어째 나는 하는 일마다 쉽게 풀리는 걸 못 본 것 같지?
이 정도면 진짜 회귀하는 대신 액이 끼기라도 한 걸지도 모르겠는데.
힘든 싸움을 예상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우리 앞에서, 오대수 PD님이 입을 연다.
"우선, 합숙을 시작하기 전에 최대한 여러분께 정보를 전달 드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자료를 준비해왔으니 함께 보시죠."
오대수 PD님이 화이트보드를 반대쪽으로 뒤집으며 신호를 보내자, 스태프 몇 사람이 전선과 몇 가지 기계를 끌고 오더니 뚝딱뚝딱 금세 설치를 마친다.
어느새 우리 앞에 설치된 빔 프로젝터가 빛을 뿜어 화이트보드를 비추더니, 잠시 후, 하얀 화이트보드 위에는 커다란 웹플릭스 로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먼저 저희와 같은 시드권을 가진 팀의 정보를 간단하게 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태국, 인도,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중국. 조금 분량이 있겠지만 집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 참, 공부 대신 요리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여길 오니 공부부터 시작하게 될 줄이야.
허탈한 심정을 감추며, 나는 송출되기 시작한 영상에 의식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