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02화 (302/403)

302. 수금 파티.-4-

한 번 길이 밝혀지자 그야말로 비행기라도 탄 것 마냥 단숨에 일이 진행됐다.

계약서 작성부터 제작계획 수립, 촬영일정과 프로모션 계획까지.

회의가 끝나고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문외한인 나는 쉬이 이해하기도 힘들 만큼 어려운 문제가 순식간에 정해지고, 일정을 전달받는 것으로 그날의 업무는 종료.

그리고 바로 그 다다음날, 우리들의 광고영상 촬영일정이 잡혔다.

오대수 감독님 본인이 이례적이라고 평가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나.

나는 그쪽에 대해 잘 아는 게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방송사와 푸른무원 사이의 협의 자체는 이미 오늘 회의 이전부터 진행 중이었다던가.

이렇게 진행속도가 빠른 것도 덕분이라고 하니 나는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이거나 한 번 더 봐둬야지."

뭐, 나도 사회생활 짬이 없는 건 아니니 굳이 이해하라면 못 할 것도 없긴 하다만 프로는 자기 일에 전념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아직 떡잎이 새파란 학생이긴 해도 돈을 받으면 그 순간부터 프로인 거지, 암.

적당히 고개를 저으며 난생 처음 퀵 서비스로 받은 대본을 펼쳤다.

광고를 어떻게 찍을지, 최종적으로 어떤 느낌으로 편집해서 영상을 만들지 간단하게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콘티가 짧은 대사와 함께 첨부된 간단한 물건이다.

"영화 메이킹 필름 같은 거에서 많이 본 건데."

이런 걸 주인공 입장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어차피 대단한 것도 없을 거라며 긴장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머릿속에 이 그림을 박아두고 가야 어떻게 촬영할지 감이 잡히겠지.

뭔가 메이킹 필름 속 등장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

단적으로 말해서, 그런 노력은 정말 제작진이 앞서 말했던 대로 크게 쓸모 있진 않았다.

딱히 다른 이유는 아니고, 영상 촬영 자체가 굉장히 간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받은 시안을 따르면 우리가 촬영하는 광고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나와 유동건 사장님, 차윤구 셰프가 서로 주특기가 다르다는 점을 적극 활용해, 저마다 두부면으로 다른 면 요리를 만드는 장면을 촬영한다.

예를 들어 나는 토마토소스와 크림소스를 사용한 파스타를 만드는 장면을, 차윤구 셰프는 짜장면과 짬뽕을 만드는 장면을 따로 촬영해서 개인별 영상을 만든 뒤, 마지막에 서로가 만든 요리를 한 테이블에 모아서 마무리.

'되게 단순하죠?'라고, 제작진은 말했지만…….

'그래, 단순하긴 하네…….'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가 할 일은 그냥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촬영하면 될 뿐인 이야기였으니까.

어차피 중간중간 들어갈 장면은 CG나 다른 식으로 촬영한 영상을 삽입해서 그럴듯한 모양새로 만든다고 했으니,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냄비나 좀 휘둘러주면서 겉보기에만 화려하게 요리를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근데 있잖아, 혹시 그거 알지 모르겠네.

세상에는 간단한 일을 어렵게 만드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 있다는 거.

인형에 눈알을 붙이는 일이나 편지봉투를 접어 붙이는 부업처럼 말이지.

무슨 일이든 물량으로 때려 부어 버리면 힘들지 않을 일이 없단 사실을, 나는 이번에 새삼 깨닫게 됐다.

"10분 휴식할게요! 출연자 분들 이리 오셔서 메이크업 수정이랑 의상 체크 부탁드립니다!"

"…… 수정? 끝이 아니라……?"

세 시간이다. 벌써 세 시간 째. 비슷한 장면만 녹화하고 있다.

스튜디오는 두 곳. 아니, 정확히는 두 장소를 한 박스에 붙여놓은 곳이라고 할까.

한쪽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양식 주방이고, 한쪽은 가정집의 부엌을 떼어다 놓은 것 같은 곳이다.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갈라진 각각의 주방 벽에는 녹색 천으로 만들어진 크로마키가 도배되어 있다. 컨셉은 '셰프의 주방에서 만들어진 요리가 당신의 부엌으로' 였던가.

양쪽 스튜디오를 번갈아 출입하며 똑같은 자세로 소스를 끓이고, 면을 볶고, 음식을 담는다. 기계라도 된 것처럼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아니, 정확히는 요리 만드는 척인가.'

요 세 시간 동안 만든 게 제대로 된 요리였다면 물경 수백 그릇은 가뿐히 넘겼을 것이다.

'그게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스튜디오에 수도며 가스가 들어올 리가 없다. 당연히 요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요리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이미테이션 소품을 사용한 가짜인 것이다.

예를 들어 두부면은 모양만 잘 흉내내어 만든 고무줄이고, 물이 끓어오르는 냄비는 아래에 드라이아이스 연무기를 설치한 이중냄비.

토마토소스는 색소를 넣은 레진으로 만든 건더기에 녹말과 물, 색소를 섞어 걸쭉한 소스 느낌을 살렸고, 거기에 더해 소다인지 뭔지 모를 약제를 넣으며 끓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크림소스도 토마토소스와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그나마 진짜 식자재를 사용해 촬영한 장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찍은 회수는 몇 번 되지 않는다.

"이야! 진짜로 요리를 하니까 태가 확 사네. 칼 잡는 폼부터가 완전 프로라는 느낌이 오잖아! 이건 그냥 다각도로 서너 번 찍고 넘어가면 충분하겠어!"

"아, 그런가요……."

그걸 칭찬으로 들어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아니 뭐, 칭찬이 맞기야 하겠다마는.

어쨌든, 안 그래도 녹말이 잔뜩 들어간 물은 평범한 소스보다 무게가 훨씬 더 많이 나가다 보니 그걸 휘두르는 팔도 피로해지기 일쑤였다.

불도 안 켰는데 조명의 열기 탓에 땀은 뚝뚝 흐르고, 덕분에 화장이 약간만 망가져도 바로 재 메이크업. 옷이 조금만 더러워지면 바로 환복.

이런 시퀀스를 계속 반복하다 보니 탈진할 것 같단 게 무슨 뜻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고생 많으십니다. 여기 포도당 캔디랑 이온음료에요."

"감사합니다……."

한창 내 메이크업을 고치고 돌아선 스타일리스트와 이야기를 나누던 스태프 한 사람이 내게 건넨 수통을 힘겹게 받아들자,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광고 촬영은 처음이시라 힘드실 거예요. 빛이 되게 중요한 곳이라 조명을 엄청나게 틀거든요. 당이랑 염분, 수분 보충 꾸준히 해두시면 좋아요."

사탕에 음료를 마른 목구멍으로 어떻게든 넘기니 조금은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과연 촬영현장만큼은 나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많이 경험했을 스태프라는 걸까.

"그래도 처음 하시는 것 치곤 되게 잘 하시는 거예요. 다른 분들은 촬영하다 표정이고 몸짓이고 전부 축축 늘어져서 찍으면 찍을수록 영상이 죽는데, 적어도 찬혁 씨는 계속 나아지는 중이라고 감독님도 좋아하시고 계시거든요."

"그런가요?"

나야 계속 같은 것만 반복해서 슬슬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라 그런 것까지 파악할 여유는 없었다. 영상을 보고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능력도 없고.

그냥 촬영하는 내내 휴식시간을 빼면 특별히 중간에 끊거나 하는 일도 없기에 시키는 대로 계속 했을 뿐이다.

"저희 감독님이 뭐라고 해야 하지? 장인정신? 그런 게 있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점점 좋아지는 게 눈에 보여서 진즉 끝내도 될 걸 계속하게 된다고…… 아, 죄송해요. 너무 시끄러웠죠?"

"…… 아뇨.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팀원 세 명이 전부 스튜디오가 갈려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말동무 한 사람 있으면 나쁠 거 없지.

그나저나 장인정신이라…… 그야 나도 명색이 요리사니만큼 자기 일에 열정적인 사람을 존경하긴 하는데 말이야…….

'그걸 하필 이 타이밍에 발휘해주진 않아도 괜찮을 텐데.'

하긴, 상황 따져가며 고집을 세울 거면 애당초 장인정신 같은 말이 안 붙었겠지. 지금은 그냥 저 열정이 부디 좋은 결과로 돌아오기만을 바라자.

"하하, 조금만 더 힘내세요. 감독님도 곧 끝내도 될 것 같다고 하시는 걸 얼핏 들었거든요. 아마 이번 촬영은 곧 끝날 거예요."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 뒤에 이어진 말만 빼면.

"그럼 바로 다음 현장으로 이동하셔서 마무리 촬영만 끝내시면 오늘 일정은 종료됩니다."

나는 잠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내지르고픈 기분이었다.

***

찬혁 일행이 광고를 촬영한 지 2주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요 2주. 최인범은 말 그대로 잠을 쪽잠으로 대신하고 물 대신 카페인을 들이켜며 광고의 완성을 시한에 맞출 수 있게끔 최대한 서둘렀다.

덕분에 제작팀 쪽에선 닦달 한번 더럽게 많이 한다며 최인범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지만, 이를 대가로 시한을 맞출 수 있다면 최인범은 얼마든 그러라고 배짱을 부릴 수 있었다. 물론, 결과물만 똑바로 나온다면.

최인범이 이토록 서두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 곧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최종화가 방영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광고모델로 기용한 출연진을 가장 효율적으로 어필할 수 있을 때는 그들의 이름값이 가장 높아진 지금밖에 없었다.

"이, 이제 슬슬 시작하나."

최종화를 단 몇 분 앞두고 대부분의 SNS 실시간 화제는 거의 '글푸서'라는 단어로 도배되다시피 한 상황.

모두가 예선의 결말을 궁금해하는 이 시점, 그 모든 전말을 아는 최인범은 그쪽보다는 자신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미 확인해 봐서 안다. 그 치밀한 계산과 멋진 요리로 따낸 승리. 화제가 되지 않을 리 없다. 이건 높은 파도다. 올라탈 수만 있다면 하늘마저 손에 닿을지도 모를 파도!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아니. 잘 알기에 더더욱 최인범은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작은 파도는 보드를 띄울 수도 없지만, 너무 큰 파도는 사람을 집어삼키는 법이니까.

과연 그 화제에 집어삼켜지지 않고 보폭을 맞출 수 있을까.

마치 심장 속에서 누군가 신나게 드럼을 두드리는 것처럼 거센 박동이 멈추질 않는다.

앞을 향해 내달리고 싶은, 그리고 뒤를 향해 맹렬히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줄다리기를 하며 진땀 나는 딜레마를 연출하는 가운데, 비로소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마지막 화가 안방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

이번에 촬영한 광고가 처음 걸리는 시점은 최종 합격 선언이 나오기 직전, 방송을 끊고 가는 60초 동안의 광고시간이다.

아마 악랄하다고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겠으나 그건 이미 최인범이 알 바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 위험한 도박수를 둔 장본인이 바로 최인범 본인이기에.

20초씩 끊어 촬영한 찬혁, 유동건, 차윤구의 광고를 순서대로 송출하여 1분의 시간을 전부 사용한다는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계획.

광고라는 것은 어느 시간에 송출하느냐에 따라 그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예를 들어 미국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미식축구 대회, 슈퍼볼의 하프타임에 방영되는 광고는 단 30초에 수십억 원에 달하는 광고료를 요구한다.

물론 이 예선전은 도저히 그런 사이즈는 나오지 않지만, 그럼에도 최종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 시점은 사람들의 이목이 가장 많이 쏠린 타이밍.

그 시간을 쓰려면 그만한 광고료가 필요했고, 그걸 제 모가지를 걸고 강행하여 계약을 성사시킨 게 최인범이다.

이 광고가 망하면, 당연히 그의 직장인생은 끝난다. 아마 같은 업계에 재도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알기에. 그는 거의 곧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생기가 빠져나간 얼굴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렇게 넋을 잃은 듯 앉아 있은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예선전 마지막 화가 끝나고, 그 직후 푸른무원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홈쇼핑 채널에 두부면 제품이 내걸린다.

최인범은 지금 당장 홈쇼핑의 판매 현황을 모니터링해야 한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결말을 제 눈으로 확인해야 한단 사실이 못내 두려워서. 아주 자그마한 불신이 가을 낙엽에 옮겨 붙은 담뱃불처럼 거대한 화마가 되고 산불이 되어 그를 덮치는 것만 같았다.

10분, 20분…….

나가야 한다는 머리의 생각을, 몸이 따르지 못한다.

굳게 닫힌 사무실의 문.

마치 두터운 알껍데기처럼 세상과 최인범의 사이를 가로막은 그 벽을 부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쿵쿵!

그때였다.

그의 닫힌 세계를, 누군가의 거친 노크 소리가 뒤흔든 것은.

"팀장님! 들어갈게요, 팀장님!"

"어, 어."

그를 찾는 부하직원의 커다란 목소리에, 최인범은 저도 모르게 답변을 돌려주었다.

그 작은 목소리를 용케 들은 부하직원은 그야말로 문을 부술 듯 박차고 들어와서, 최인범을 보며 소리를 내질렀다.

"홈쇼핑 채널 1차 주문 분량 완판이에요! 30분도 안 됐는데! 공식 쇼핑몰에서도 주문수량 폭주 중입니다! 나와서 지시를 좀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콰당!

최인범이 벌떡 일어나며,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세차게 넘어간다.

꽉 쥐어진 두 손. 너무 세게 쥐어 핏기가 가신 두 손이 그에게 말하는 듯했다.

여기서 끝날 운명이 아니라고.

"뭐해! 얼른 쇼핑 부서에 연락 돌려서 주문 들어오는 대로 끊지 말고 받으라 해! 공장 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최인범이 굴건한 미소를 지으며 외친다.

실로 1년 만에 지어보는,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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