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01화 (301/403)

301. 수금 파티-3-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회귀 전에도 이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 보았다.

힙합이나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출연자가 순식간에 업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광고탑이 되어 돈방석에 앉았다는 둥 하는 거 있지 않은가.

어느 나라가 됐든 오디션 프로그램이란 게 존재하는 곳이라면 크든작든 그 비슷한 일은 얼마든 있었고,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 주인공이 될 기회가 생길 줄이야.

'그야 뭐, 아직 돈방석은커녕 지폐 한 장 구경도 못 하긴 했지만…….'

너무 김칫국만 들이켜는 것 같으니 슬슬 자제할까.

기대를 하니까 배신을 당한다는 말도 있고. 아직 제대로 확인도 못 한 이야기에 정신이 팔릴 필요는 없겠지.

현장학습을 명목으로 학교를 조퇴하고 약속장소로 향하는 길목.

조금 들뜬 심정은, 아무래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싶다.

***

점심시간이 끝난 뒤, 한 시를 살짝 넘어 우리는 앞서 상의한 약속장소인 방송국에 도착했다.

'우리'라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일단 난 법적으로 미성년자가 아닌가?

그러니 이만큼 커다란 금액이 오가는 공식적인 계약을 앞두고 혼자 행동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일종의 친권 대리인 역할을 선생님 한 분과 동행했고.

남은 오후수업과 그 외 업무를 방폐하고 오게 만든 점에 대해선 죄송스러울 따름이지만 정작 본인은 학교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겠다며 그리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미리 우편으로 전달받은 임시 출입증을 이용해 현관을 지나친다.

들어가기 전, 꽤 까다로운 검사 절차를 거치긴 했지만, 방송국이란 곳이 원체 외부인을 많이 신경 써야 하는 곳이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협조 감사드립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네. 고생하세요. 아, 혹시 안내 데스크가……."

"앞에 보이는 홀 중앙에 가시면 됩니다. 방문 목적 말씀하시면 자세히 안내해드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내 뒤를 이어 함께 온 선생님까지 검사를 끝내고 안내 데스크로 향하자 안내원이 밝은 미소로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나요?"

"예. 두 시에 미팅이 있어서 왔는데, 혹시 어디로 가면 될까요?"

"미팅이요? 아!"

교복까지 입은 미성년자가 갑자기 미팅 같은 소리를 꺼낸 탓일까, 잠시 의아한 기색을 보인 안내원이었으나, 이내 작은 탄성을 내지르곤 말을 이었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출연 중이신 분 맞으시죠? 류찬혁 학생!"

"아, 네. 맞는데요……."

"그렇죠? 매주 챙겨보고 있어요!"

사람이 유명해진다고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라더니. 별다른 설명 없이 단박에 내 정체를 알아챈 안내원이 손뼉을 치듯 두 손을 모으며 아까보다 더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 감사합니다?"

대답이 애매했다. 출연 '중'이라고 해야 할까. 애당초 이미 출연은 끝낸 상태고 지금 나오는 건 녹화본인데 말이야.

그래도 매주 챙겨보며 응원한다는 팬……?의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수도 없었기에 마찬가지로 웃음을 돌려주며 말을 잇는다.

"2시에 오대수PD님과 미팅이 예정되어 있는데, 어디로 가면 될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예, 잠시만요…… 우측에 엘리베이터로 3층까지 가셔서 내리신 다음 우측으로 쭉 가시면 있는 3A 회의실로 가주시면 되세요. 입구에서 다른 분이 마중 나오신다고 하시니까 지금 올라가시면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안내원 분의 친절한 설명을 따라 이동하니 정말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날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찬혁 참가자. 이쪽입니다!"

"어."

날 기다린다던 사람은 예상외로 내게도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또 뵙네요."

이전 예선전에 참가했을 때, 참가자들을 도맡아 안내한 스태프. 과연, 안내라는 역할에 딱 알맞은 인선이었다.

오랜만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초 목적지였던 회의장에 도착하자 우릴 맞이하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 그중에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질리도록 얼굴을 보고 살았던 반가운 면면이 섞여 있었다.

"어, 왔구나!"

"어서 와라."

"유동건 사장님! 차윤구 셰프!"

겨울방학 동안 본선 대비 연습을 하느라 거의 붙어살다시피 했으나 내 개학과 동시에 요 근래 얼굴 볼 시간도 내지 못하던 두 사람의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반가웠다.

하긴, 예선 우승자를 대상으로 한 기획이라고 했으니 팀 전체가 모이는 게 당연하긴 하지.

두 사람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반갑게 악수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서류부터 물까지 깔끔하게 세팅을 마친 제작진이 우리를 부른다.

"오실 분은 다 오신 것 같은데, 슬슬 회의를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슬슬 훈기가 감도는 날씨 탓에 대부분 캐주얼한 양복이거나, 혹은 아예 교복인 나와는 달리 말끔하게 풀세트로 차려입은 양복이 돋보이는 남자가 말을 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푸른무원 홍보과의 최인범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최인범 씨는 말끔한 옷과는 다르게 며칠 먹지도 못한 사람처럼 굉장히 수척한 모습이었다.

"이전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제작진에게 전달받은 영상 자료를 보고 여러분이 만든 메뉴가 마침 자사의 제품과 딱 맞아떨어진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여러분께 제안 드리는 건 해당 제품의 전속 모델로서의 계약과……."

그러나, 그런 수척한 모습마저도 그 형형한 눈빛 앞에서는 크게 부각되는 것조차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두 가지가 섞이니 내 눈에는 마치 이 사람이 며칠을 굶주리고 사냥감을 찾아 나선 사나운 맹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간단명료하게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언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대가로 제공할 수 있는지를 끝으로 그가 설명을 마무리 짓고, 우리는 서로를 곁눈질로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은 간단해.'

우리가 결승 때 제출한 메뉴인 마라또후미엔. 번역하여 마라두부면이 마침 푸른무원에서 판매하는 두부면이라는 제품과 굉장히 유사한 면이 있던 것이다.

아니, 건두부를 면 모양으로 잘라 면의 대용품으로 쓴다는 점에선 유사함을 넘어 일종의 안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흡사했다.

제품 사이의 이미지가 이렇게나 똑같다면 굳이 별다른 세공이 없더라도 제품과 방송을 살짝 엮어서 홍보하기만 하면 충분한 연결성이 생길 것이다.

'푸른무원다운 제품이긴 하네.'

한국의 웰빙 식문화를 최선두에서 주도한다는 기업의 슬로건에 딱 맞는다고 할까.

푸른무원 두부라면 한국사람 중 안 먹어본 사람이 더 드문 제품이다 보니, 그와 같은 선상에서 제작되고 있을 두부면 제품에 대한 신뢰도도 확실했다.

'이건 안 받는 게 멍청한 짓이네.'

음. 살짝 눈치를 살피니 유동건 사장님과 차윤구 셰프도 비슷한 생각인 듯 보인다.

'게다가…….'

뭣보다 무시할 수 없는 건, 당연히 모델료!

계약기간은 대략 본선 방송 직전인 6월까지. 그 6개월 동안 우리를 해당 제품의 전속모델로 사용하는 값으로, 그들은 대기업답게 떡하니 쉬이 볼 수 없는 거금을 내밀었다.

6개월에 인당 3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 셋을 합치면 근 1억에 달한다.

거기에 더해 중간에 걸친 밀키트 개발에 참여했을 시에 보장되는 인센티브도 결코 적지 다. 아마 이게 잘 풀린다면 계약금보다도 더욱 목돈이 되겠지.

"지금 여러분이 구가하는 인기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금액입니다만, 해당 제품이 자사의 서브스트림 제품군에 속하다 보니 이 부분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합니다만, 해당 사항에 대한 계약 수정안 또한 준비했습니다."

심지어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듯 추가적인 제안까지 들이밀었다.

"보통 업계에서 6개월의 계약기간은 굉장히 짧은 편입니다만, 이건 결코 독소조항이 아닙니다. 계약서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계약 종료 후. 계약기간 중 시간경과에 따른 판매량 변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선 결과에 따라 재계약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굳은 목소리로, 마치 단말마를 내지르듯, 최인범 씨는 말을 끝맺었다.

"일이 잘 풀린다면 현재 계약금의 3배…… 아니, 4배에서 5배도 얼마든 가능할 겁니다. 그러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제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고개를 숙이는 그.

유동건 사장님이나 차윤구 셰프야 그렇다 치지만,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나에게까지 고개를 숙이는 정체 모를 절박함.

내가 사무원의 업무에 대해 아는 게 딱히 많진 않지만, 그만큼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었단 걸까.

"……."

"내가 봤을 땐, 괜찮아."

내가 먼저 꼼꼼히 훑어본 계약서를 뒤이어 읽은 선생님이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한 말이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의 계약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뒤이어 나와 눈을 마주친 유동건 사장님이나 차윤구 셰프도 고개를 끄덕인다. 본인들도 문제 될 게 없다는 뜻이다.

'아마 조금 더 뒤지면 더 좋은 조건이 들어올지도 몰라.'

지금 이 사람은 아직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예선전의 결말까지, 모든 것을 알고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우리의 우승이 발표된 뒤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몸값만큼은 지금보다 확실히 오르겠지.

하지만…….

'아마 이만큼 딱 맞는 광고도 찾기 힘들 거야.'

광고 컨셉도 이미 착실하게 짜여 있으니 제작도 빠를 거고, 정말 미친 듯이 서두른다면 최종화 방영일이 오기 전에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 음."

득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될 이야기는 없다. 게다가…….

'이만큼 필사적인 걸 보면, 저쪽에서 손놓고 구경만 할 리도 없을 거고.'

동료를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주방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사업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함께 일을 주도할 사업파트너가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인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에, 지금 우리에게 고개를 숙인 이 사람은 적어도 자신을 위해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나와 유동건 사장님, 차윤구 셰프는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는 할게요. 두 분은요?"

"나도 하마. 오랫동안 가게를 쉬려면 어느 정도 버틸 돈이 필요하거든. 마침 잘 됐지."

"저도 이의 없습니다."

우리의 대답에 간신히 고개를 번쩍 든 최인범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로 계약부터 진행한 다음 촬영 일정부터 잡아보죠."

"…… 야, 막내야. 위에 가서 서 감독 좀 데려와라."

"옙!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3층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안내해주었던 스태프가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마자, 최인범 씨는 3라운드를 풀 쓰로틀로 내달린 복서처럼 진이 다 빠진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굳이 설명할 것도 없이, 서로가 Win-Win한 계약 타결이었다.

'그라저나…….'

3천. 3천이라.

…… 대체 이 돈으로 뭘 하지.

몸이 어려진 탓에 씀씀이까지 어려진 짠돌이 중년남성의 기쁨 섞인 넋두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