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00화 (300/403)

300. 수금 파티.-2-

광고업계는 총포 소리만 없는 전쟁터다.

최인범. 39세. 푸른무원의 마케팅팀에서 서브스트림 제품의 홍보 마케팅을 담당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그는 직장생활 한 평생을 그런 마음가짐으로 보내왔다.

아마 그건 이 기업에 처음 입사한 시절부터 그를 지도하던 선임의 신조가 그에게 옮은 탓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본인이 여태껏 업계의 최전선에서 달리며 직접 몸으로 느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본격적인 이유, 그러니까. 지금 그가 이토록 자신의 신조를 몸으로 실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위험한데, 점점 앞이 안 보여.'

최인범은 본래 서브스트림 제품군이 아닌 메인스트림 홍보팀 소속이었다.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지금 그가 이런 자리에 앉은 건 약 1년 전 생긴 사고 탓이다.

단순한 일이다. 그가 홍보를 위해 상당한 자금을 운용하던 제품이 홀딱 망하면서, 동시에 홍보팀에도 무시할 수 없는 손실을 끼쳤으니까.

그나마도 공장 측에서 발생한 위생 이슈가 사건이 터지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기에 그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아마 직접적인 원인이 본인에게 있었다면 모가지까지 각오했어야 했을 터.

하지만 불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최인범은 그 뒤로도 하는 일마다 제대로 풀리는 게 없다시피 했다.

아마 그건 아직까지도 그 사건의 기억을 털어놓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최인범 또한 자각은 하고 있었으나, 안다고 안 좋은 기억을 전부 털어낼 수 있다면 그게 어디 사람이겠는가.

'슬슬 진짜 정신 차려야 된다.'

과거에 짓눌리는 거? 좋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그러나 그것도 자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때나 하는 짓이다.

최근 최인범은 회사에서 자신을 향한 시선이 그리 곱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당연한 일이겠지. 맡는 프로젝트마다 들인 돈에 비해 변변치 못한 실적을 가지고 돌아오는 사원을 어떤 회사가 고운 눈으로 보겠는가.

과거의 실적을 담보삼아 회삿돈을 대국적으로 빨아먹는 월급 루팡이 된 지 어언 1년.

그에게 남겨진 기회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렇기에 최인범은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눈에 핏발이 서도록 며칠 밤낮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수많은 시일을 그렇게 보냈음에도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의 명운을 걸 프로젝트를 찾아 헤매기 바쁜 그.

자리에 앉아 마케팅 담당자가 정해지지 않은 제품기획서들을 관찰하는 최인범이었으나, 사실 그는 이렇게 해도 별달리 좋은 프로젝트를 찾을 순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어차피 좋은 계약은 윗선에서 다 빼갔을 테니까…….'

보통 이런 건 먼저 집어가는 사람이 임자인 법인데, 보다 상류에서 좋은 물고기를 죄다 낚아가는 상황에 하류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잡아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갈 송사리 중 최대한 큰놈이나마 건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꼴이 심히 속 쓰릴 뿐이다.

"……후우. 텄다, 텄어."

결국 변변찮은 수확 하나 건지지 못한 채 몸을 돌린 그는 뇌를 덮쳐오는 피로라도 쫓아보고자 취사실로 향했다. 언제 어느 때나 카페인은 회사원의 든든한 동료다.

바깥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 먹을 시간이 아까워 인스턴트 커피나 젓는 제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어 한숨을 짓고, 한 줌 덜어낸 근심의 빈자리를 카페인과 당분으로 채운다.

그때였다.

─지잉, 지잉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에 최인범은 커피를 입에 물고 핸드폰을 꺼낸다.

까만 화면 중앙에 홀로 떠오른 메시지 알림이 하나.

그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자마자, 최인범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중얼거렸다.

"어……?"

─촤악!

바닥에 떨어진 종이컵에서 쏟아지는 커피가 구두를 더럽혔으나, 최인범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 대수?"

한때의 친구이자, 악연으로 끝을 맺은 이름이었으니까.

***

최인범과 오대수는 같은 대학 출신의 동기였다.

대학친구는 학창시절 친구보다 연이 길지 못하다는 말도 있으나, 최인범과 오대수는 마치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 못지않게 절친한 친구였다.

같은 광고홍보학과를 다니며 군대까지 비슷한 시기에 다녀온 그들의 길은 졸업 후에 갈라지게 되었다.

오대수는 방송국으로.

최인범은 회사로.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만나는 횟수는 뜸해졌지만, 그래도 다른 학교 친구들에 비하면 훨씬 잦은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 사이.

그런 그들의 길이 한 곳에서 맞닥뜨린 계기는, 안타깝게도 그리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당시 어떤 사회고발예능 프로그램의 현장PD로 활동한 오대수는 어느 한 식품공장에 대한 취재를 했었고, 공장의 위생 상태나 납품현황, 불량식자재 유통 따위를 제대로 집어내면서 세간을 들끓게 만들었다.

덕분에 해당 공장과 계약하고 있던 기업의 이미지는 수직낙하.

아마 시총을 보더라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힌 방송.

그렇다. 그곳이 바로 최인범이 홍보를 담당하던 푸른무원의 메인스트림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던 것이다.

당시 현장 촬영을 강짜로 진행한 PD가 오대수라는 사실을 안 이후로, 최인범은 그를 멀리했다.

딱히 앙심을 품은 건 아니다. 그는 그냥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니까.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사건이 터진 후 대외적 소통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최인범 자신에게 차라리 더 잘못이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납득은 했을지언정 껄끄러운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오대수 또한 최인범의 소식을 듣고 직접 만나기를 꺼리게 된 지가 어언 1년.

자연스레 서로에게 소원해진 두 사람이, 오늘 한자리에 모였다.

"……안녕."

"……그래, 인범아. 잘 지냈냐."

"뭐, 그럭저럭. 너는?"

"나도 뭐, 그렇지."

안 그래도 칙칙한 아저씨들이 서먹서먹한 태도로 인사를 주고받으니 절로 텁텁하고 음침한 분위기가 흘렀다.

두 사람 사이에 건조한 안부 인사가 오가고, 의례적으로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반쯤 녹아갈 때까지도 별말이 없던 와중,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고 창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던 최인범이 입을 연다.

"그래서, 갑자기 어쩐 일이야. 먼저 연락을 다 하고."

1년 동안 연락도 없던 녀석이.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킨다. 어차피 둘 다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의 질문에 오대수가 잠시 뜸을 들이며 답한다.

"음…… 일단,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 불렀다…… 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일 이야기가 있어서 좀 보자 했다."

"일 이야기?"

갑작스런 본론에 최인범의 고개가 오대수에게로 돌아갔다.

"무슨 일?"

"알지 모르겠는데, 내가 요즘 맡은 프로그램이 하나 있거든. 아니, 요즘이라고 하기도 뭐한가. 어차피 한 달 지나면 끝날 건데."

"한 달? 조기종영이라도 하냐?"

"아니, 반대야. 꽤 잘 나가거든. 원래는 이미 끝났어야 됐는데, 추가 편성 받았다."

"……그러냐. 난 또 제작비 충당하게 광고라도 꽂아달라는 줄 알았네."

최인범이 저도 모르게 비꼬듯 툭 말을 던졌다. 자기는 당장 한 달 뒤에 회사에 자리가 남아 있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저쪽은 방송국에서 웃전으로 모실 만큼 잘 나간다니 배알이 꼴린 탓이다.

오대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별달리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래서, 프로그램 이름은 뭔데?"

"아마 알걸.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이라고."

"뭐? 글푸서? 진짜로? 그걸 네가 한다고?"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이라면 요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요리대결 프로그램. 그런 대형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게 오대수일 줄은 몰랐던 최인범이 눈을 크게 뜬다.

"뭐, 그래 봤자 예선전까지만 담당하는 거긴 하지만."

"임마 그게 어디야! 그 정도면 커리어에 대문짝만하게 써 붙일 수도 있겠구만! 축하한다!…… 아."

"그래, 고맙다."

순간 저도 모르게 옛 시절의 말투가 튀어나왔음을 깨닫고 입을 다문 최인범이었으나, 이미 늦었다는 듯 작게 웃으며 답하는 오대수를 보곤 한숨과 함께 말을 잇는다.

"그런 대단하신 분이 나 같은 놈을 무슨 일이 있다고 찾아. 알지 모르겠는데, 나 완전 끝물이라고. 좌천은커녕 해고 직전이야."

"광고 좀 꽂아달라고 왔지."

"뭐?"

최인범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다.

합당한 반응이었다. 조금 성공한 것도 아니고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프로그램이라면 가만히 있기만 해도 광고 제안이 말 그대로 쏟아진다.

담당PD가 이렇게 발품을 팔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야, 설마 너. 이걸로 뭐 화해를 하고 싶다 이런 뜻이냐?"

"……."

"……사람 얕게 보는 거 아니냐. 가져가. 생각 없다."

최인범도 머리로는 안다. 자신은 지금 이렇게 자존심이나 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한 서로간의 처지가, 그 이유 중 하나가. 가슴이 이성을 거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폭언에도 오대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챙겨온 가방에서 서류와 USB 하나를 꺼내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어리게 굴지 마. 너나 나나, 학생 식당에서 주량승부나 벌이던 시절이 아니잖아."

한기가 돌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최인범은 머리 위로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모골이 송연해졌다.

"동정이고 뭐고 그런 거 아니다. 내가 PD로서 판단해서, 내 프로그램에 섭외하고 싶은 광고주를 물색했고, 그 창구가 너일 뿐이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최인범을 향해 오대수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화해의 손길을 내밀자고 이러는 게 아니다. 내가 내미는 건 기회야.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릴지는 네 능력에 달린 거고."

잡을 거냐, 말 거냐.

그렇게 묻는 듯한 오대수의 눈빛에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로 뻗은 최인범의 손이 흔들린다.

'……어차피, 사무실에서 계속 시간이나 축내 봤자 아무 쓸모도 없겠지.'

그건 요 1년 동안 싫을 만큼 뼈저리게 느꼈다.

기회라는 건 자기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안다.

이게 만약 그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기회라면…….

"……오냐, 어디 얼마나 대단한 기획인지 한 번 보기나 하자."

최인범의 손이, 서류를 덮었다.

***

'내용은 안에 있다. 영상을 보고, 기획서까지 읽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거다. 그다음 연락해.'

그런 말을 끝으로 오대수는 자리를 떠났다.

유출 엄금이라는 딱지가 붙은 USB를 찡그린 눈으로 보던 최인범은, 이내 집으로 돌아가 그것을 오프라인 상태로 놔둔 노트북에 연결했다.

USB의 내용물은 영상이었다.

그것도, 아직 공개된 적 없는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 예선전의 후반부에서부터 결승전까지의 내용이 전부 담긴, 거의 편집이 없는 노컷 촬영본.

"……."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에너지 드링크를 벗 삼아 밤을 지샌 최인범의 눈은 그 전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건, 된다!"

요 근래 어떤 때보다 환희의 감정으로 물들어있었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예선 결승 밀키트 제작 기획서'라는 글귀가 적힌 서류가, 그의 책상 위를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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