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99화 (299/403)

299. 수금 파티.-1-

예선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본선 진출권을 따낸 지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계절이 한 번 바뀔 시간이라고 할까.

하얀 눈 위로 시꺼먼 매연과 회색빛 먼지가 쌓여 칙칙하던 거리에 눈이 녹고, 그 아래에서 다시금 봄비를 흠뻑 빨아들인 새싹이 돋는 시기.

강산이 변할 만큼…… 의 시간이 흘렀다곤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학교 바깥이나 집 근처 거리의 풍경이라면 얼마든 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끔 지나가다 보던 신장개업한 식당이 어느새 문을 닫고 임대인을 구하는 광고지를 유리창 가득 붙이고 있다든가.

'…… 됐다.'

이 화제는 너무 암울하다. 마치 전신 쫄쫄이 슈트 바깥에 팬티를 입은 외계인이나 박쥐남이 있는 세계에서 온 것처럼.

하긴 뭐 그게 현실이니 어쩔 수 없다만.

아무튼, 언젠가 같은 업계에 종속될 사람으로서 가슴이 절로 미어지는 광경이 어느덧 새로 들어선 편의점 따위의 건물로 바뀌는 봄.

낡은 건물도 새 외장을 달아 한 해의 시작을 맞이하는 봄단장을 하듯, 우리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한 해를, 그리고 마지막 한 해를 맞이하는 시간.

그래.

이 어렸을 적의 몸으로 돌아온 지 어언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한번 3학년이 된다.

***

3학년이 되었다고 딱히 특별하게 무언가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반 유지 제도로 반도 딱히 큰 인원 변동 없이 그대로 올라갔고, 대회반인 것도 똑같고.

그나마 3학년이 되자마자 다가온 커다란 이벤트를 꼽으라면 입학식 정도일까.

응? 3학년인 내가 왜 개학식도 아니고 입학식 이야기를 하냐고?

그야 뭐, 이미 몇 번이고 말해왔다시피 내가 대회반 부원, 그것도 부장씩이나 되는 직함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아, 부장님 개그 할 때 그 부장이 아니니까 주의.

성급하게 매장될 것 같은 소리는 이쯤 하고, 아무튼 대회반은 성심고의 얼굴. 우리를 보고 이 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킨, 혹은 이 학교에 입학할 마음을 먹은 학생들이 제법 많았기에 입학식에 한 번쯤은 얼굴을 비춰주는 게 좋다.

…… 라는 게, 교장 선생님의 설명이었다. 참고로 난 겨울방학이 끝날 때쯤 이 이야길 들었다. 덕분에 되도 않는 입학사를 준비하느라 고생 좀 했지.

'안 그래도 방학 내내 집도 못 들어가고 거의 합숙 생활을 했는데 말이야.'

유동건 사장님 댁 근처에 있는 고시텔에서 혼자 숙식하며 낮에는 유동건 사장님 가게에서 알바를, 밤에는 내가 지참한 노트북으로 화상미팅을 켜두고 차윤구 셰프까지 셋이 함께 손발을 맞추는 연습을 했다. 주말마다 모여서 합숙도 했었고.

그렇게 치열한 방학을 보내고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입학사를 준비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내 심정이 어땠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공부 조지면 얼른 자격증 따고 입대해서 취사병으로 들어간 다음 전역해서 그 경력으로 일자리 구해보세요.' 같은 되도 않는 말을 대놓고 구상노트에 끄적이다 찍찍 그어 버렸을 정도다.

그나마 작년에 같은 내용으로 고생했던 효민 선배가 일종의 입학사 족보 같은 걸 남겨둬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성심고 사상 최악의 입학사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뭐하지만, 난 예체능 감성은 몰라도 문학적 감성은 없는 것 같아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수많은 선배들을 대대로 거쳐 내려온 족보는 각종 각주와 연식이 전혀 달라 보이는 종이가 덧붙어 과장 조금 보태서 거의 논문 수준의 두께를 자랑했고, 그 덕분에 나 또한 코앞에 닥친 이 사태에 어떻게든 대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가온 입학식 날.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긴장은 안 됐다.

이제껏 수천수만, 정말 많을 땐 수십만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자리에도 나갔던 나다. 이제 와서 입학사 몇 번 읊는 걸로 쫄기엔 내 간이 너무 커졌단 말이지. 거의 끓인 채로 손도 안 대고 하룻밤 동안 방치해둔 라면 면발 수준으로 퉁퉁 부은 내 간땡이의 위력을 얕보면 안 된다.

언젠가 직접 했던 것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입학식 과정.

신입생 환영 인사. 학교 소개, 교사 소개, 교장 선생님의 훈화(1), 학생회장 입학사.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내 차례였다.

"그럼 지금부터 본교의 자랑인 대회반의 리더. 3학년 류찬혁 학생의 입학사가 있겠습니다. 신입생 여러분은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학생회장과의 맞인사가 끝나고 일제히 자리에 앉는 아이들.

어려진 몸으로 이렇게 말하긴 뭣하지만 꼭 병아리가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 같아 묘하게 즐거운 기분이다. 요즘 애들이야 워낙 잘 먹고 잘 자라서 덩치만큼은 병아리란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대회반 대표, 류찬혁입니다. 부족하나마 대회반 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입학사를 전달하기 앞서 앞으로 1년 동안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짝짝짝짝!

어딘가 조심스런 박수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때까지 난 딱히 긴장 같은 건 안 하고 있었다.

어차피 입학사 내용도 아주 단순하게 '입학을 환영한다, 이 학교는 좋은 학교다, 선배들도 다들 좋은 사람이다, 선생님도 다들 훌륭하신 분들이다. 그러니 딴 길로 새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라.' 정도로 축약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문장이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여태껏 온갖 대회를 섭렵하며 쌓인 두꺼운 낯짝도 한몫했다.

다만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면, 그런 내 귀를 간지럽히는 일련의 소음이었다.

"야, 저 선배……."

"맞지? 저번 주부터……."

"TV에서 본 거랑 느낌 완전 달라……."

내가 입학사 엇비슷한 거라도 한 적은 고작해야 1학년 때 졸업사를 했을 때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통 이런 자리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잘 안다고 생각한다.

아마 대부분의 신입생은 앞에서 누가 말하든 크게 관심 없이 보는 척만 할 거고, 소수의 착실한 학생만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집중한다.

그게 당연한 거지. 훈화에 입학사 두 개를 연속으로 듣고 버틸 수 있는 멘탈을 가진 녀석이 있으면 걔는 이미 정신연령이 고등학교 1학년이 아닌 거다.

'그래, 분명히 지금쯤 정신 못 차리고 꾸벅대는 애가 몇 명은 나와야 되는데…….'

어째, 지금 있는 학생 중 절반 이상…… 아니, 적어도 8할 이상의 인원이 내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내가 뭔가 대단한 소리라도 했던가.'

단언컨대 아니다. 반쯤 족보를 베낀 입학사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어차피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고리타분한 환영인산데.

자뻑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도 내가 제법 유명세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근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국내 업계인 사이에서나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한 거지 이런 어린애들한테 관심을 끌만한 건덕지는…….

'아니, 잠깐만.'

없지 않다.

설마 하는 생각에 암산으로 날짜를 역산했다.

오늘은 3월 첫째 주 금요일. 개학식은 어제였고, 조금 시간을 돌려보면…….

"아."

2월 마지막 주 주말. 내가 여태까지 사는 게 너무 바빠서 깜빡 잊고 있던 '그게' 시작하는 날.

그렇다. 바로 며칠 전이, 첫 방영 날이었던 것이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의 예선전이 말이다.

'거, 참…….'

타이밍 한 번 대단하게도 들어맞는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

적당히 얼굴 한 번 비추러 갔다가 온 신입생의 어그로를 정통으로 끌어모은 뒤로 제법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학교 전체에서 나에 대한 화제는 학생들 입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졸지에 절찬리로 엄청난 시청률을 보이며 방영되는 인기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글푸서 시즌2 예선전은 총집편 1화를 포함하여 총 11부작.

토요일, 일요일에 한 편씩. 한 주에 두 편을 방영하는 와중에 주말 골든타임까지 꽉 물어 버렸으니 화제가 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우리 학교처럼 요리 이야기에 민감한 사람이 수백 명 단위로 모인 곳에서는 특히.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거의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지경이 됐다.

우리 반 애들이나 대회반 부원들이야 그러려니 해도, 등교할 때마다 1, 2학년 애들이 내 얼굴을 보기만 하면 저들끼리 소곤거리기 바쁘다.

심지어 한 번은 싸인 요청도 받았고,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해줬더니 그다음부터는 여럿이 몰려와서 못 해준다고 다 돌려보냈다.

'다행인 건 그 뒤로는 안 온다는 건가.'

사장님이 몇 번이나 놀려먹던 내 험악한 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사하게 된 사건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나한테 사인까지 받겠다고 달려드는 애들을 막아주었을 뿐이지 멀리서 날 보며 떠드는 아이들의 대화까지는 막지 못한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까.

아무튼, 오늘도 그 시선을 감내하며 교문을 지나 교실에 들어서자 창문에 붙어 바깥을 쳐다보던 반 아이들 몇 명이 내게 다가왔다.

"이야, 이놈 이거 오늘도 아침부터 어그로 조졌네."

"오늘은 누가 싸인 해달라 안 그러디?"

"안 그랬어. 가라."

"아 씨, 오늘은 한 명 정도 또 나올 줄 알았는데."

"응~. 오늘로 역배 기원 5일차죠? 또 못 이겼죠? 점심 먹고 음료수 잘 마시겠습니다. 덕분에 아주 목이 마를 날이 없네요."

"제발 닥쳐……."

너야말로 입을 다물어다오. 남을 도박 재료로 삼지 말란 말이다.

뭐, 보면 알다시피 최근 학교에서 내 취급은 대략 이런 식이었다. 바로 고개만 돌려도 볼 수 있는 학교 친구가 주말마다 공중파 평균 시청률 10%대 돌파, 웹플릭스 국내 인기 프로그램 월간 1위를 지키는 방송에 나오고 있으니 뭐든 안 신기하겠느냐만.

물론 그게 이 관심의 모든 이유는 아니다.

아무리 자극적인 이야기라고 해봐야 거의 한 달 가까이 똑같은 화제가 이어지면 누구든 질리는 법이고, 특히 나와 우리 반 애들처럼 가까운 사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 마지막 편까지 단 세 번. 이번 주말에 방영될 마지막 심사 직전의 총집편과 마지막 심사 전편, 그리고 다음 주에 방영될 마지막 심사 후편만을 남겨둔 상태에서 아직도 날 향한 아이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야, 그래서 마지막은 어떻게 되는 거야?"

"진짜 이긴 거 맞아? 아직까지 대회반도 발표를 안 하니까 결과를 알 수가 없잖아."

스포일러 금지 조항.

그냥 그것 때문이다.

매주 적절한 타이밍에 방송을 끊어 버리는 농도 짙은 절단마공을 쓰는 총괄PD의 훌륭한 편집 솜씨 덕분에 월요일만 되면 이렇게 내게 다음 결과를 묻는 애들이 넘쳐난다.

당연히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스포일러 금지 조항이 계약서에 박혔는데 내가 어떻게 말을 해.

최대한 언급을 피하는 건 물론이오. 심지어 표정에 티조차 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나의 심정을 저들이 알까.

아마 모르겠지. 가끔 영화 잘 찍고 파랑새에다 스포일러를 박아 버리는 배우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겠다.

입이 가볍고 무겁고를 떠나서, 그냥 이런 질문이나 연락이 귀찮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시달리니까 아주 잘 알겠어.

"…… 하아……."

이름값 좀 높이려다 왜 이렇게 생고생 중인 건지.

벌어진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

오늘도 간신히 입이 방정을 떨려는 걸 막으며 맞이한 귀가 시간.

최근엔 대회반에서도 내 사정을 봐준 것인지 부장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기숙사에 틀어박혀도 별다른 출석 요구 하나 안 들어온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내게 연락이 한 통.

담임교사이자 대회반 담당교사인 박예휘 선생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무슨 일이시지?"

평소 말씀하실 게 있으면 그냥 전화로 간단하게 설명하시는 선생님이지만, 가끔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이렇게 공식적인 문서를 메시지를 통해 첨부파일로 보내주시곤 한다.

대부분은 대회반 부장이 수행할 업무에 대한 서류거나, 혹은 내 대외 접수처인 학교를 경유해서 내게로 전달된 외부 안건이 종종 오는데, 오늘 같은 경우는 후자로 보였다.

'예선전 이야기 때문인가?'

안 그래도 예선전이 끝난 뒤로 하루가 멀다 하고 종종 내가 따로 보관해야 할 계약에 대한 서류 따위를 보낸 전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싶어 열어본 파일.

하지만 열어본 문서에는, 앞서 내가 예상한 것과 동떨어진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응?"

잠시, 내가 뭔가 이상한 걸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빈다.

안 그래도 최근 개인 연습이다 뭐다 수면 부족이 좀 있어서 눈이 침침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이번에도 그 탓에 글자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눈을 비비고 조금이나마 맑아진 시선으로 다시 핸드폰을 보아도, 화면에 떠오른 문자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 제 모습을 내게 내보이고 있었다.

"푸른무원……?"

국내 웰빙 식료품의 대표주자라고 불리는, 국내 업체 중에서는 손꼽히는 대기업 중 하나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힌 문서.

그 표지 아래에는, 이런 내용의 글귀가 제목으로 적혀 있었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 예선 우승자인 류찬혁 님께 드리는 광고 제안서……?"

그때, 내 귀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환청 따위가 들린 기분이 들었다.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히…….

─띠링!

돈 굴러가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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