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루프 매치.-6-
─까득
안 그래도 냉랭하게 식어 있던 공기가, 차가워지다 못해 꽁꽁 얼어붙는 소리를 낸다.
물론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소리가 난 건 아니다. 소리의 발생지는 어디까지나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꾹 쥐어진 김선옥의 손아귀였으니까.
뼈가 마찰하는 소리가 어찌나 생생한지, 찬혁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보시죠."
이쯤 되면 숫제 협박이었다.
아무리 고희를 맞이한 여성이라 할지라도, 한평생을 요리사로 산 인간의 피지컬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현역으로 남지 못하는 업계다.
그 사실을 모를 찬혁이 아니기에, 그 말은 더더욱 위협처럼 들려왔다.
등골 사이로 얼음을 한주먹 욱여넣은 것 같은 오싹함을 느낀 찬혁이 먼저 한 발짝 물러났다.
"아하하, 말이 그렇단 거죠. 그만큼 맛있을 거란, 그런 뜻?"
"발언에 주의하세요. 심사의 행방을 정하는 건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류찬혁 참가자."
"옙."
경고를 듣고 얌전히 물러난 찬혁을 보던 김선옥이 고개를 떨궈 자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접시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겉모습만으로는 도저히 특별한 점을 찾기 힘든 평범한 요리.
플레이팅이라고 할 것도 없는 모습에 더해 메뉴 자체의 범상함이 앞선 두 팀의 메뉴와 대비되어 더더욱 궁상맞다.
하지만 류찬혁이란 이름의 젊은 요리사는 요리에 대해 허언을 할 성격은 아니다. 그건 2라운드 때, 묵묵히 자신의 험담을 맞는 말이라 받아들이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요리가 다른 팀의 요리를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건가?'
적어도 지금 당장 눈으로 파악한 정보만을 따지자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 됐습니다. 음식이 식게 놔둘 수도 없으니, 이제 그만 심사를 시작하죠."
이렇게까지 자신한다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겠지.
음식은 눈으로 보기만 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김선옥은 자리에 앉아 식기를 손에 쥐었다. 그녀를 따라 다른 심사단도 함께 포크와 스푼을 잡는다.
그런데 그때, 심사단이 음식으로 식기를 가져다 대는 찰나, 갑자기 끼어든 찬혁이 외쳤다.
"아, 잠시만요!"
이번에는 또 왜 그러냐는 듯 눈으로 묻는 그들에게 찬혁이 답했다.
"드실 때엔 알리오 올리오를 먼저 드신 다음에 마파두부를 드셔주시겠어요?"
잠시 말을 끊은 그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
"여러분을 위해서요."
우리를 위해서?
속내를 알 수 없는 발언에 좌중의 손에 들린 식기가 음식에 닿기 직전 멈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결국 어떤 수수께끼를 준비하고 있던 그 해답을 풀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그들이 다시금 움직임을 재개한다.
다만, 이번에는 찬혁의 조언을 따라 마파두부보다 알리오 올리오를 먼저 건드려보는 심사단이었다.
"알리오 올리오 치곤 면이 좀 특이하네요. 보통은 이런 면적이 넓은 면보다 스파게티 같은 원기둥 모양 면을 더 많이 쓸 텐데요."
"페투치니보다 조금 더 넓은 것 같은데…… 거기다 두께는 또 조금 얇네요. 탈리아텔레와 페투치니의 중간 정도라고 할까…… 직접 제면한 면인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심사 도중에 반죽이나 제면기를 사용하는 모습은 못 봤거든요."
"신기하군요. 수제가 아니면 공장 특주품이라는 뜻인데, 준비된 식자재 중에 그런 품목은 없었을 텐데요."
볶을 때 바질페스토를 조금 섞기라도 했는지, 초록빛깔이 도는 기름을 흠뻑 두른 파스타는 뜨거운 기름에 잘 볶아졌다고 자랑이라도 하듯 황금색이 섞인 갈색 크러스트가 면 하나하나마다 생겨 있다.
"…… 음?"
잠깐만. 면에 색이 들었다고?
잠시 본인이 말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을 읊음 심사단이 곰곰이 생각한다. 파스타는 면 요리 중에서도 면을 오래 삶아야 하는 요리이고, 그만큼 삶는 과정 중 수분이 면 자체에 다량 함유되어 쉽게 색이 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심지가 바삭바삭해질 때까지 익히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질감. 그러나 면을 그렇게 만들면 당연히 면은 특유의 유연성을 잃은 채 살짝 꺾기만 해도 수수깡처럼 부러지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이 알리오 올리오의 면은 그렇지 않다. 색이 들 만큼 익었음에도 여전히 포크를 돌리면 돌리는 대로 휘감기는 것이 유연함만큼은 여타 파스타와 비교해도 크게 다른 점이 없다.
바삭하게 튀겨진 얇은 마늘 슬라이스. 아마 일부러 먼저 기름에 튀긴 뒤 빼놓았다가 고명으로 사용한 것이겠지.
'모양으로 알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로군.'
그렇다면 남은 건 직접 먹어보는 것뿐.
스푼으로 포크를 받친 채 릴을 돌리는 낚시꾼처럼 포크를 빙글빙글 돌려 면을 감아올린 심사단이, 파스타를 입으로 집어넣는다.
"음……."
파스타의 첫맛은 살짝 짭짤한 듯 혀를 울리는 염도, 그리고 기름의 고소함이다.
사용한 기름이 올리브 오일이 아닌 것일까, 동물성 기름 특유의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우며, 그와 동시에 기름 속에 갇혀 있던 향이 단숨에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그런데, 그 향기의 구성물은 앞서 심사단이 예상하던 것과 전혀 다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알리오 올리오에 올리브 오일 대신 동물성 기름을 쓴 것도 모자라서, 입을 지나 비강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향은 이탈리안의 느낌이 거의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 중화풍?'
이탈리안 대신 자리를 차지한 풍미는…… 놀랍게도 중식의 그것과 쏙 닮아 있었다. 옅은 팔각과 화자오 따위의 복잡한 향신료 향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 매워!"
이 아찔할 정도의 매운맛!
혀를 칼로 쑤시는 것 같은 랄!
프로 복서에게 턱을 후려 맞은 듯 몸을 떨리게 만드는 마!
고작 마늘 따위에서 나올 매운맛이 아니었다. 알리오 올리오라는 음식에서 느껴질 리 없는 무자비한 마라웨이에 불의의 기습을 당한 심사단이 너나 할 것 없이 격한 기침을 하며 식기를 놓쳤다.
"아차차……."
이러리라 짐작은 하고 있던 찬혁이 이마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젓고, 각 조리대에서 심사를 지켜보던 4팀과 우승팀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매우시죠? 얼른 옆에 마파두부 좀 드셔보세요. 그럼 좀 괜찮아지실 거예요."
미친 소리!
심사단 일부는 당장에라도 그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말을 뱉을 호흡마저 기침이 앗아가는 탓에 실제로 입 바깥으로 그런 소리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었지만.
안 그래도 갑작스런 매운맛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중식 매운맛의 정점인 사천요리의 대표적인 일품, 마파두부를 먹으라니. 기왕 혀 덴 거 아주 불붙은 숯까지 퍼먹으란 소리 아닌가?
"괜찮아요. 마파두부도 안 매운 건 아니지만, 절 믿고 딱 한 번만 드셔보세요."
거듭되는 찬혁의 요청에 심사단이 하는 수 없이 수저를 든다. 그러나 여전히 눈빛은 매섭다. 이번에도 이런 우습지도 않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단단히 각오하라는 모양새였다.
기존의 마파두부에 비해 확연히 물기가 적은 1팀의 마파두부는 새빨갛게 번들거리는 외관으로 심사단의 공포를 자극했다.
이걸 정말 먹어야 하나. 딜레마에 빠진 채 아직까지도 기침이 나오는 코와 입을 가리고 있던 그들은 결국 밑져야 본전이라는 기세로 마파두부를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어, 어라?"
"…… 안 맵잖아?"
"아니, 아예 안 매운 건 아닌데, 그래도 저 알리오 올리오에 비하면……."
마치 지옥 유황불처럼 새빨간 겉모양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다지 맵지 않은 마파두부의 맛에 심사단이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들이 먹은 마파두부. 이 마파두부 또한, 옆에 있는 알리오 올리오와 똑같이 겉모양만 보곤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이 났기에, 그들은 이토록 의아한 시선을 향하는 것이다.
"토마토? 왜 마파두부에서 토마토 맛이 이렇게……."
"이게 무슨, 이게 마파두부라고?"
"아니, 분명 두반장 맛도 나긴 납니다."
괴이쩍은 일이다.
중식의 맛이 나는 이탈리안에 이어, 이번에는 이탈리안의 맛이 나는 중식이라니!
우스운 것은 분명 시각, 미각, 후각이 서로 전혀 다른 정보를 받아들여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그들의 머리는 그 난잡하게 뒤 섞인 맛을 '맛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첫입을 먹고 대체 이게 무슨 요리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심사단.
그 광경을 한 발 떨어져 지켜보던 찬혁이 한바탕 소동이 끝난 뒤에야 그들 앞에 나선다. 그런 찬혁의 두 손 위에는 각각 방금 그들이 먹은 것과 완전히 똑같은 요리가 담겨 있다.
"일단 두 요리 다 한 입씩 드셨으니까, 이제 이 요리를 알맞게 먹는 방법이 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알맞게 먹는 방법?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저절로 시선을 향하는 심사단 앞에서, 찬혁은 제 오른손에 들려 있던 마파두부를, 그대로 알리오 올리오 위로 쏟아 부어 버렸다.
"이게, 이 요리를 제대로 먹는 방법이에요."
찬혁의 얼굴에 악동의 웃음꽃이 피었다.
***
심사단은 당초 찬혁이 한 행동을 보고 드디어 찬혁이 미친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일이다.
멀쩡한 음식…… 이라고 하기에는 좀 과하게 매운 놈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멀쩡한 음식을 그런 식으로 섞어 버리다니! 맛은 둘째 치더라도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뭐 하는 겁니까!"
"본인 음식을 그렇게 다루면 안 되죠!"
즉시 반발하는 일부 심사단을 진정시키며 찬혁이 말을 이었다.
"저기,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정말이에요. 이게 저희 메뉴를 올바르게 먹는 방법입니다."
"올바르게? 파스타에 마파두부를 부어놓고?"
"아니,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 말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심사단의 반박에 찬혁이 당황하며 답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생각보다 격한 반발에 찬혁이 당황하며 심사단을 달래보려 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찬혁이 끝내 서프라이즈를 포기하고 메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꺼내려던 그때, 그들 사이로 끼어드는 목소리가 하나.
"그만 하세요. 류찬혁 참가자 말이 맞네요."
"예?"
김선옥. 어느새 본인의 몫이었던 두 요리를 하나로 합친 뒤 시식을 마친 그녀가, 심사단을 막아 세우곤 말을 잇는다.
"애당초 파스타가 아니었어요. 저희가 완전히 잘못 봤던 겁니다."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는 김선옥.
이틀 동안 진행된 심사 내내 단 한 차례도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없던 그녀가 소리까지 간신히 죽이며 웃는 모습에, 주변 사람은 반대로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있어선 안 되는 무언가를 본 얼굴이라고 할까.
주변 사람들이 그런 표정이 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윽고 간신히 웃음을 멈춘 그녀가 말을 이었다.
"1팀이 진짜 계획한 요리는 처음부터 한 가지였던 거예요."
젓가락으로 마파두부 아래 숨은 면 한 가닥을 집어 올린 김선옥의 시선이 찬혁을 향했다.
"파스타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저희 식탁 위에 올라온 메뉴는, 오직 두부 요리뿐이었어요. 그것도 아주 영리하게 다른 팀의 요리까지 이용한, 퓨전 두부 요리."
그녀는 여전히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정말로 여기서 심사를 끝내도 될 것 같긴 한데…… 어떻게, 직접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류찬혁 참가자?"
"!"
여기서 심사를 끝내도 된다.
폭탄선언에 단숨에 고조된 좌중의 눈빛 앞에서, 찬혁이 웃음으로 답했다.
"기꺼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