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96화 (296/403)

296. 루프 매치-5-

1라운드를 거치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지금 저 우승팀과 정면승부로 붙어 이기는 건 무리였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는 그 사실 자체에 대해선 딱히 아무 반감도 없었다. 1보다 2가 큰 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당장의 상황만 두고 보았을 때 이쪽이 저들을 절대적 수치로 이길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손가락만 빨고 있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가만히 포기하기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게 너무 아깝잖아.

이기기 위한 작전이고, 이기기 위한 요리다.

그리고 그 작전이 지금 막 첫 계단을 밟았다.

다음 3라운드.

'이 심사는 거기서 끝낸다.'

***

두 번째 휴식 시간이 끝난 직후, 세 번째 라운드가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일련의 순서에 이미 익숙해졌는지 별다른 안내 없이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알아서 심사를 볼 준비를 끝마쳤다.

그들의 모습을 잠시 눈으로 좇던 김선옥이 이윽고 준비가 전부 끝났음을 깨닫곤 입을 연다.

"타이머를 시작합니다. 전원, 조리를 시작하세요."

신호와 동시에 모든 참가자가 일제히 손을 놀린다.

굳게 멈춰 있던 손이 단숨에 최고속도로 나아가는 모습에는 마치 엔진의 RPM을 올리던 차들이 단숨에 출발선을 박차고 나가는 것만 같은 기세가 담겼다.

지금 당장에라도 스키드마크와 함께 새하얀 타이어 연기를 내뿜을 것 같은 속도로 질주하는 여섯 명의 참가자와 세 명의 우승팀.

그들을 뒤로하고 김선옥이 자리로 돌아오자 심사단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벌써 세 번째 라운드까지 왔네요. 참가자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예. 그만큼 안상필 선생님의 팀이 강하다는 뜻이겠죠."

이 정도면 너무 심사의 난이도를 높게 잡은 것이 아닌가.

본인들이 계획하긴 했다지만 예상 이상으로 난해한 심사는 참가자 일행의 앞을 높다란 산이 되고 깊은 골짜기가 되어 그들 앞을 막아선다.

하지만 심사단이나 제작진으로서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양심이 찔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이건 엄연히 세계를 상대할 인재를 뽑기 위한 예선전.

이쪽이 힘들다고 상대가 봐줄 것도 아닌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말 그대로 실전과 같은 훈련을 통해 그들의 자격을 검증하는 겸 실력 상승의 기회를 주는 것뿐이었고, 그런 마음이 작금의 상황이란 결과로 도출되었을 뿐이다.

지금도 마음 한구석으로 심사단과 제작진에게 열불을 내고 있을 참가자들에게 내심 용서를 구하며, 심사단이 입을 연다.

"세 번째 라운드인 만큼 참가자들에게도 큰 변화가 찾아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번에는 어떤 메뉴로 저희를 놀라게 할지 궁금하네요."

"이제껏 충분히 창의적인 메뉴를 만들어온 참가자들입니다만, 이번 마지막 심사에는 특히 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이 심사에서 합격할 수 없단 걸 잘 알기 때문이겠죠."

"실제로 1, 2라운드에 나왔던 작품은 이전 심사였다면 능히 통과하고도 남았을 퀄리티를 보여줬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번이 마지막 심사인 만큼 더더욱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큽니다. 그래야 합격도 할 수 있을 테고요."

"특히 이번에는 두 가지의 메뉴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두 메뉴 사이의 연결성도 깊게 생각해야 하죠. 김치와 함께 먹는 라면, 피클과 함께 먹는 피자가 맛있는 것처럼 메뉴를 함께 먹을 때의 상승작용을 노릴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말을 덧붙인 김선옥의 표정이 사납다.

원체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사람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어련하겠느냐마는,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누가 봐도 분명했다.

아까 2라운드가 끝날 때 찬혁의 팀이 보여주었던 요리.

그건 분명 하나의 메뉴로서는 훌륭한 면이 있는 메뉴였을지 몰라도 조합이란 걸 전혀 생각하지 않은 메뉴 선정.

좋게 말해도 영리하지 못했고, 대놓고 말하자면 멍청한 짓이었다.

이 심사가 만약 1팀과 4팀의 평범한 대결이었다면 100% 찬혁 일행의 패배였을 만큼.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1팀은 6차 심사의 룰 덕분에 명줄을 부지했다. 그렇게 이어진 이번 3라운드.

과연 이번에는 아까의 부진을 딛고 일신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2라운드 심사평에서 가장 날 선 평가를 했던 김선옥의 매서운 시선이 향하는 가운데, 찬혁 일행은 숨 가삐 몸을 움직인다.

그들의 조리대 위, 화구에는 한 냄비 가득 담긴 기름이 끓어오르고 있다.

'또 아까처럼 튀김을?'

김선옥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냄비를 바라봤다. 2라운드에 이어서 또 튀김 메뉴라니, 발상의 전환이 없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이내 그녀는 그게 튀김을 만들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냄비 속에 담긴 기름은 고작 심사에 쓰일 음식을 만들기 위해 준비한 것치곤 양이 너무 많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기름의 온도가 너무 낮아 보인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보통 튀김요리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기름의 온도는 140~160도 사이.

중식 특유의 2회 튀김법을 쓴다 하더라도 최소 130도에서 최대 180도가량의 온도로 기름을 가열한다.

그런데 바로 조금 전, 찬혁이 기름의 온도를 확인할 때 사용한 아날로그 다이얼 온도계의 바늘은 대략 10시에서 11시 정도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회장에 비치된 온도계의 스펙을 생각할 때 그 위치에 있을 때의 온도는 대략 90~110도 사이. 앞서 설명한 조리에 필요한 온도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런데 불을 줄였어?'

냄비를 달구는 불꽃을 딱 현 상태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화력으로 낮춘 찬혁의 모습을 김선옥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때, 찬혁은 더더욱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시작했다.

재료를 모아놓은 곳에서 주먹 두 개 정도 크기의 통을 가져오더니, 내용물을 그대로 대접에 전부 쏟아 버린 것이다.

통의 내용물은 마치 잘게 썬 녹차잎 같은 초록색 가루.

녹차? 파슬리?

이제야 찬혁의 이상행동을 알아챈 다른 심사단이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내는 동안, 찬혁은 그렇게 쏟은 내용물과 여러 향신료를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가며 한 곳으로 섞는다.

더더욱 놀랄 일이 바로 그다음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한 대접에 모은 정체모를 재료를 비롯한 향신료를, 찬혁이 한 톨 남김없이 뜨겁게 달군 기름에 쏟아 버렸으니까.

"어!"

"저, 저거!"

심사단의 놀란 목소리가 쏟아지는 무대의 중심에서, 찬혁은 그저 웃으며 한가로이 기름을 저을 뿐이다.

심사 시작 후 1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

심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충격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던 찬혁의 팀이었으나, 그 뒤로 이어진 조리에선 그다지 특별한 점을 꼽을 수 없었다.

평범하게 삶고, 볶고, 굽 일상적인 조리 작업.

그나마 특이한 점을 하나 꼽으라면 사용한 재료일까.

하지만 그마저도 딱히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저 요리에 사용한 대부분의 기름을 앞서 말했던 냄비에서 꺼내 썼을 뿐이다.

그걸 본 사람들은 그제야 찬혁이 무엇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향미유. 기름에 특정한 재료를 넣고 끓여 기름 자체에 특수한 맛을 녹여내는 기법.

그러나 그 수법이 밝혀진 뒤로 오히려 그들의 요리에 대한 흥미는 점차 줄어들 뿐이었다.

향미유라고 해봤자 여태껏 심사를 해오며 몇 번이나 체험한 기법이었으니까.

수수께끼는 그 해답을 모를 때가 가장 흥미로운 법이다. 호기심은 언제나 사람을 자극하는 것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향미유라는 기법은 이미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했다. 이미 그 내용이 전부 까발려진 탓이다.

다만 아직 모르는 게 있다면, 과연 찬혁이 향미유를 만들기 위해 넣은 재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지만…….

"파란 거 보니 무슨 잎 같았는데."

"뭐, 찻잎이나 허브 같은 걸로 향을 낸 거겠지."

같은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뿐이다.

실제로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어져 시판되는 향미유도 있었으니, 그런 관중의 반응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그렇게 찬혁 일행에게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관중의 시선을 붙잡은 건 역시나 다른 두 팀의 몫이었다.

화려한 불꽃과 섬세한 칼놀림. 뛰어난 플레이팅 능력으로 좌중을 사로잡는 두 팀.

물론 그들은 그저 겉모습만 대단한 게 아니다. 그 내실 또한 훌륭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박여욱 참가자. 가이세키 요리의 이해도가 훌륭하네요. 보통 정진요리나 가이세키 요리로 대표되는 일본의 고급요리는 대부분 담백한 맛을 주력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그런 메뉴를 갖고 이렇게 진한 맛을 내되, 특유의 고풍스러움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니요."

"특히 이 전골은 대단하네요. 닭 육수와 가츠오 육수를 블렌딩한 스프가 이토록 잘 어울릴 줄은 몰랐습니다."

"풍부한 맛의 비결은 만든 뒤 한 번 식혀서 굳힌 계유를 건더기처럼 사용해서 넣은 점이로군요. 비슷한 방식을 사용하는 요리는…… 그래요, 라멘 같은 요리에서 간간이 사용하는 방법이죠."

"고급요리와 서민요리의 훌륭한 콜라보, 아주 잘 봤습니다."

첫 순서로 나선 4팀의 요리는 가이세키 요리 전문 셰프인 박여욱을 주축으로 한 화려한 일식.

입맛을 돋우는 도미매실무침과 진한 국물이 일품인 닭고기 완자 전골은 심사단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역시 우승팀의 아성을 뛰어넘기는 힘들었다.

진득하게 끓인 전복죽과 그에 곁들이듯 나온 봄동 겉절이. 그리고 압력솥으로 단숨에 찐 갈비찜의 환상적인 조합이 그마저 찍어 누르며, 다시금 승리의 깃발을 그들에게로 돌려놓는 듯했다.

"1팀, 작품 제출하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차례가 밀린 1팀의 차례가 다가온다.

두 가지 메뉴를 챙겨 심사단 앞에 늘어놓는 찬혁과 차윤구.

그런 그들이 내놓은 메뉴를 본 심사단의 얼굴이, 단숨에 돌덩이라도 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는다.

"…… 허어."

"이건……."

다만, 그 이유는 딱히 참신한 무언가를 본 그들의 경악이나 놀라움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의미로라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1팀이 내놓은 메뉴는─

"알리오 올리오에……."

"마파두부……?"

─그저, 그들이 깜짝 놀랄 만큼 단순했으니까.

올리브 오일에 마늘을 볶아 만드는 파스타, 알리오 올리오.

두부를 매콤한 국물에 넣어 끓여 만드는 마파두부.

이 두 요리는 가정집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한 요리이자, 모르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요리다.

"…… 1팀. 이게 여러분이 준비한 요리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김선옥마저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한 채 당혹스런 얼굴을 하지만, 찬혁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김선옥이 시선을 내려 다시금 음식을 살핀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알리오 올리오, 평범한 마파두부다.

알리오 올리오에 사용된 면은 평범한 스파게티가 아니라 페투치니처럼 살짝 넓은 면이고, 마파두부의 경우는 수분감이 적어 되직한 느낌이 들지만. 그래 봤자 겉으로 보았을 때 크게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단순한 메뉴라는 사실을 넘어 메뉴 사이의 조화도 맞지 않을게 분명한 두 요리.

인상을 찌푸린 김선옥이, 이번에는 경고를 담아 말한다.

"1팀. 이전 심사도 그렇지만, 계속해서 이렇게 나온다면 저희도 시험방식을 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희번덕 뜬 시선. 평범한 사람이면 오금이 저릴 매서운 시선에도, 찬혁은 태연히 웃으며 답했다.

"그럴 일 없을 걸요."

"……?"

당찬 대답에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눈에서 살짝 힘을 풀자, 찬혁이 말을 이었다.

"이 심사, 이번에 끝날 테니까요."

마치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는 듯 당차게 답하는 찬혁.

놀란 표정을 짓는 관중 앞에서, 찬혁이 말한다.

"일단 드셔보세요. 그럼 알려드릴게요. 저희 메뉴를 올바르게 먹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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