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루프 매치.-4-
작전회의…… 라고 해도, 사실 우리가 여태껏 아무 생각 없이 심사에 임한 건 아니다.
1차에 이를 때부터 지금까지, 그 모든 심사에 나설 때마다 최소한의 작전 정도는 준비했었고, 그건 이번 6차 심사 또한 다르지 않은 일종의 루틴이었다.
언젠가 식당에서 일을 배울 때, 내 상사이자 주방의 선임 셰프였던 사람이 해주었던 충고가 하나 있다.
"야, 찬혁아. 넌 계획을 세울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뭔지 아냐?"
"계획이요? 어…… 제일 중요한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거?"
"비슷하지만 틀렸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일 즉 worst'가 뭔지 생각하는 거야."
Worst가 뭔지 가장 먼저 파악해라.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을 가장 먼저 정해두면, 자연스럽게 그 반대에서 발상이 시작된다. 단순한 조언이었지만 여태껏 유용하게 써먹는 조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조언은 이번에도 역시 제값을 톡톡히 해냈다.
'지금 우리가 절대 하면 안 되는 거?'
두말할 것도 없다. 이번 심사에서 한식으로 승부를 볼 생각. 그것만큼은 절대 선택해선 안 되는 길이다. 요컨대 깝치지 말자는 거지. 아니 뭐, 좀 순화하자면 나대지 말자는 것.
온몸에 물을 뒤집어쓰고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쳐도 모자랄 지경에 섶을 이고 불에 뛰어드는 건 정말 자살이 간절한 사람이나 할 짓이다. 물론 난 내 목숨이 가장 아까운 평범한 일반인이고.
저 멤버와 한식으로 맞대결하는 건 일단 불가능하다. 사실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 이상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육상선수가 수영선수와 대결하겠다고 제 발로 물속에 걸어 들어가는 꼴이니까.
그렇다면 그 반대란 무엇일까.
이 또한 쉬운 대답이다.
상대의 필드에서 싸우지 않는 것. 저쪽을 내 필드로 끌고 오진 못 하더라도 내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를 굳게 지키는 것. 그것이 베스트.
'하지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우승팀 또한 우리와 똑같이 자신들만의 베스트를 행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서로의 베스트와 베스트가 맞붙는다면 당연히 보다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낸 팀이 이기겠지.
그럼 크게 대책이랄 것도 없는 거 아니냐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작금의 시간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우리의 베스트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할 기회가 됐으니까.
우리의 강점은 주력으로 삼을 수 있는 종목의 수가 다양하다는 데에 있다.
나는 프렌치와 이탈리안.
유동건 사장님은 한식과 퓨전에 사용되는 그 외 잡다.
차윤구 셰프는 중식.
주특기는 중구난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의 주특기를 충분히 보조해줄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갖고 있다. 올라운더의 면모야말로 우리 팀이 가진 가장 강한 특징.
누가 팀의 오더를 맡느냐에 따라 펼칠 수 있는 메뉴의 종류가 다양하다. 단일 메뉴 맛집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메뉴의 가짓수가 많단 게 마냥 좋은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여러 번에 걸쳐 승패를 갈라야 하는 상황에선 이만큼 마음이 든든해지는 뒷배는 또 없다.
전투에서 질지언정 병사들의 배는 곯리지 말아야 한다고, 내 손에 뭐라도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사기진작 엄청난 도움이 된다.
한신이 없어도 전쟁은 할 수 있지만, 소하가 없으면 전쟁을 못 한다.
우리에게 있어 메뉴의 다양성이란 소하의 존재와 같았다.
'그러니, 이런 선택지도 고를 수 있는 거야.'
작전회의란 말에 내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2라운드, 그냥 주죠."
"…… 뭐?"
줄건 줘.
내 발언에, 두 사람의 얼굴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해괴하게 변한다. 하지만 그걸로 좋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아군마저 예상하지 못한 전략은, 그만큼 적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기에.
살을 내어주는 대신, 우리는 뼈를 가져간다.
그게 바로 우리의 작전이다.
***
아까 막 시작한 것만 같은 2라운드도 어느새 종막을 눈앞에 두고 있다.
1팀, 4팀, 우승팀.
총 아홉 명 프로들의 사력을 다한 경주.
이쯤 되면 승리의 여신이 한 번쯤은 눈을 돌릴 만도 하건만, 매정하다 못해 지고지순한 그녀는 이번에도 같은 팀의 손을 하늘 위로 높게 잡아들어 올린다.
"이번에도 합격팀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참가자 여러분, 조금만 더 분발해주세요."
그 말에 4팀의 오더를 맡고 있던 정민수는 저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들었다.
'분발하라고?'
여기서 더 뭘 어떻게 분발하라는 것일까.
정민수와 그 팀은 이번에도 한계 직전에 다다랐을 만큼 온힘을 다해 요리했고, 결과물 또한 그 노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 완성도 높은 메뉴가 나왔다.
그럼에도 2라운드를 패배하니, 짜증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는 노릇인 정민수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약간이나마 위안이 되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저쪽은…… 그렇단 말이지.'
그들과 함께 누가 먼저 이 높은 절벽을 기어오르느냐를 두고 경쟁하는 중인 1팀. 찬혁 일행을 향한 정민수의 눈빛이 작게 일렁인다.
'여태껏 제법 잘 올라왔다 싶었는데, 운이 좋았던 거였나.'
재미없는 요리를 하는군. 정민수가 냉소를 머금었다.
그의 마음에 위안을 준 것은 다름 아닌 1팀의 부진. 아까 것과 비교해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살짝이나마 퇴화한 것 같은 그들의 요리가 그만큼 정민수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게살스프에 대게 다리 튀김이라. 안일해.'
단순히 같은 재료로 만든 메뉴를 앞뒤로 늘어놓으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 걸까.
분명 메뉴 하나하나의 맛은 괜찮을 것이다. 이전 3차 심사 때 보았던 기법인 구운 대게 껍데기를 이용해 만든 맑은 육수로 만든 진한 풍미의 게살 스프.
대게 다리를 정교하게 발라내어 그대로 튀김옷을 입혀 튀긴 뒤 소스와 야채를 곁들인 튀김.
단일 메뉴로만 보면 기꺼이 찾아가서 먹고 싶을 메뉴였겠으나, 두 가지가 같은 상에서 나온 탓에 그 가치는 수직하락하고 말았다.
'둘 다 너무 맛이 진했다.'
기왕 스프를 메뉴 중 하나로 넣으며 코스라는 이름을 표방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하나는 담백하게 만들어 맛을 끌어올리는 역할만 하고, 반대로 다른 한쪽에는 액기스를 모아 선명한 대비효과를 주는 편이 훨씬 나았으리라.
그러나 저렇게 둘 다 진한 맛만 나서는 게에 숨겨진 섬세한 풍미조차 느끼기 힘들다.
"덕분에 이쪽만 귀찮아졌어."
아무리 최소한의 양만을 시식하는 심사단이라 한들 아침부터 끊임없이 진행된 심사 탓에 조금씩 피로가 누적된 그들의 혀와 위장은 이미 제상태가 아니다.
안 그래도 처음의 예기를 잃은 심사단에게 저렇게 맛이 진한 음식을 추가로 먹인다면 제대로 맛을 분간하는 것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이번에는 그나마 저들이 맨 마지막 차례였기에 본인들이나 우승팀 쪽 심사에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나 3라운드로 심사가 넘어간 지금, 단번에 역치를 넘는 피로를 받은 혀는 어지간한 맛으로는 제 역할을 못 해낼 가능성이 크다.
'이건 조금 타격이 있는데.'
정민수가 지금의 팀원을 고른 이유는 그들 각자의 실력이 빼어났기 때문이지만, 그 외에 중요한 이유를 한 가지 더 꼽자면 그들이 추구하는 요리의 방향성이 비슷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용된 식재료의 다양한 맛을 한 데 살린 담백한 요리. 조화로운 일체감. 시중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맛이 아닌, 고급요리의 자부심이 담긴 요리를 추구하는 자들.
그런 공통점이 있었기에 정민수를 비롯한 세 사람은 함께 팀을 맺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떨 때에는 그들을 유니크한 셰프로 만들어주는 담백한 요리가, 어떨 때에는 커다란 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심사단의 혀가 무뎌진 지금, 이전과 같은 방식의 조리를 했다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높은 자부심을 가진 그들이라도 잠깐 그것을 내려놓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런 무대에서 특기를 제대로 살릴 수 없는 상황이 될 줄이야.
정민수는 대형사고를 친 주범, 1팀을 매섭게 노려본다.
정민수의 당혹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 중심에 선 찬혁은 주변을 돌아보며 그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다.
'그런 짓을 해놓고 참 태평도 하구만.'
아마 이 이야기는 분명 우승팀에게도 마냥 청신호가 들어올 이야기는 아닐 터.
찬혁 팀 탓에 짜놓은 계획을 전면수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리라. 한식 또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선 맛이 진한 요리를 쉽게 만들지 못한다.
그러니 저쪽도 자신들처럼 한정된 메뉴밖에 만들 수 없겠지.
여러 의미로 심사에 훼방을 놓는 찬혁 일행을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던 정민수가 혀를 차며 등을 돌린다. 2라운드 종료 후 찾아온 휴식시간.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다음 심사에 대비한 작전을 짜는 게 그에게는 더 시급한 일이었으니까.
"……."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더욱 흥미로운 시선을 찬혁에게 던지는 인물이 있다.
안상필. 한식으로는 전국에서 따를 자가 없는 그가 찬혁 일행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머리를 굴린다.
'무슨 생각이냐.'
안상필이 아는 류찬혁이라는 아이. 아니, 류찬혁이라는 요리사는 같은 세대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실력자다.
그가 가진 강점은 다양하다.
실무 능력, 요리에 대한 지식, 팀을 장악하는 능력 등등.
그리고 그런 찬혁의 강점 중 가장 뛰어난 것을 꼽으라 한다면, 안상필은 메뉴를 구성하는 센스에 아낌없이 제 표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미래를 보고 오기라도 한 것 같은 탈현대적인 센스. 현대미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이들이 지금을 사는 이들에게 쉬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처럼, 찬혁 또한 남이 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메뉴를 구상하면서도 그 본인에겐 근거를 알 수 없는 확신이 가득하다.
이렇게 만들면 당연히 맛있는 거 아니냐는 듯 새로운 무언가를 계속해서 제 속에서 끄집어내던 모습을 기억하는 안상필은, 그렇기에 작금의 상황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형편없는 메뉴 구성이다.'
아마 본인의 가게에서 누군가 저와 비슷한 메뉴를 손님께 내놓자고 가져왔다면 그 자리에서 직급을 강등시켰을지도 모른다.
심사받는 메뉴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었을 정도인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찬혁 본인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실제로 심사단의 평가 또한 냉랭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찬혁 일행의 표정은 마냥 태연하다.
분명 힘들여 준비한 메뉴일 텐데,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다는 듯.
'……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그렇게 되는 걸, 바라고 있었다는 듯.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건지."
찬혁은 안상필이나 안효민이 매번 자기를 당황스럽게 만든다며 불평을 쏟아내지만, 실제로 함께 있을 때 누구보다 타인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찬혁 본인이다.
무언가 노리는 바가 있다.
그것만큼은 누구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깊게 확신하는 안상필이었으나, 과연 뭘 노리고 있는 건지. 이번에는 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들 셈인지.
안상필은 곧 다가올 3라운드에 작게 긴장감을 품으면서도, 못내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민수의 4팀에 이어 찬혁까지 등을 돌려 심사장을 떠나는 이때. 찬혁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계획대로 됐다."
그 웃음은, 언젠가 골머리를 썩이며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한탄하던 안효민의 그것과 어딘가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