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94화 (294/403)

294. 루프 매치-3-

5차 심사. 아니, 이제는 6차 심사라고 불러야 할 마지막 팀 대항전의 1라운드가 시작됐다.

입 벙긋하는 사람 하나 찾기 힘들 만큼 고요하지만, 그럼에도 소리를 압도하는 기백이 좌중 사이를 달린다.

피어오르는 불꽃, 증기, 열기. 아우를 수 있는 모든 뜨거움이 하나가 되어 아지랑이로 섞이는 가운데, 참가자의 눈이 닿지 않는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안효민이 전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할아버지?"

─그래, 효민아. 그쪽은 어떠니?

"시작한 지 좀 됐어요."

그녀의 통화가 닿는 대상은 다름 아닌 그녀의 조부, 안영길이었다.

분명 조금 전 찬혁에게 이제 볼일은 다 봤으니 먼저 떠나겠다고 한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가. 그건 물론 그 말 자체가 농담 섞인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찬혁도 당연히 그건 알고 있었다.

다만 안상필을 비롯한 우승팀 일부가 자신의 상대가 되리란 짐작은 하지 못 했겠지만.

아까 보았던 찬혁의 허망한 웃음 아닌 웃음을 떠올린 안효민이 히죽 웃고는 말을 잇는다.

"근데 괜찮은 거예요?"

─뭐가 말이냐?

"찬혁이요. 이번 심사, 통과는 할 수 있는 거죠?"

안효민의 걱정은 찬혁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팀, 그리고 그 경쟁자들에게도 똑같이 통용되는 것이었다.

세간에서 한껏 천재라며 떠받들어졌고, 실제로도 같은 세대에서 한손에 꼽힐 천재인 안효민이라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안효민이 처음 칼을 잡는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그녀의 아래였던 적이 없다.

본신의 실력, 경험, 지식. 요리에 대한 것이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안효민 자신보다 단연코 빼어난 존재가 바로 안상필.

찬혁이 기억하는 회귀 전의 그녀였다면 모를까, 지금의 안상필은 한식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최강자다.

그런 안상필에 더해 그 팀원마저 안효민과 비교해도 꿇리는 곳이 없는 한식의 고수들.

저들을 상대로 더욱 빼어난 요리를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리더의 하나뿐인 딸이자 한때 같은 팀의 일원이었던 안효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잘 알고 있다.

정말 자칫 잘못하면 오늘이 끝날 때까지 결판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걱정이 안 드는 게 이상하다.

"차라리 할아버지가 직접 나오는 편이 나았던 거 아니에요?"

─그것도 괜찮다만, 같은 팀이 될 사람들하고 앙금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으냐.

안영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로 선의의 경쟁을 나누는 사이가 되어 절차탁마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런 자리에서 경쟁심을 불태우다 보면 어떤 사람은 안 좋은 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 법.

그렇기 때문에 오늘 심사를 위해 내빈한 우승팀의 일원이었던 두 사람 또한 시즌 2에 불참 의사를 밝힌 이들을 특별히 부른 것이다. 대리로 안상필을 내세운 것 또한 같은 논리다.

"뭐, 그 정도로 악감정이 쌓일 사람이면 여기 나오지도 못했을 것 같은데……."

─사람의 인성이란 게 항상 능력과 비례하는 건 아니란다.

"알아요."

뾰로통하게 대답하는 안효민의 목소리에 안영길이 웃었다.

─그리고 네 아빠도 그렇게 융통성 없는 사람은 아니지 않니. 걱정 마라. 상필이 녀석이면 알아서 잘 할 게야.

"……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응?

어딘가 아련한 말투로 뒷말을 흐리는 손녀딸의 말에 안영길이 의문 섞인 소리를 흘리는 그때, 안효민의 눈은 제작진이라는 이름의 벽 저편에서 보이는 심사장을 향하고 있었다.

"아시잖아요. 아빠, 요리만 되면 인정사정없는 거."

아까까지만 해도 요리하는 소리를 제외하면 개미 기어가는 소리마저 귀에 거슬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조용하던 심사장이, 어느 새부터인가 작달막한 환성이 연달아 이어지며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6차 심사. 그 첫 라운드의 결판이 난 것이다.

사람의 벽 너머로, 안효민은 찬혁의 얼굴을 바라본다.

불 앞에 있느라 붉게 상기된 얼굴, 쥐어짜 낸 머리에서 진땀 사이 섞인 식은땀. 그리고, 일말의 안타까움.

굳이 다가가서 확인하지 않더라도, 대강의 상황을 유추할 순 있었다.

"정말, 할아버지는 가끔 이상한 데서 실수하시는 거 알고 계세요?"

6차 심사 첫 라운드.

합격자는, 없다.

"이러다가 진짜로 안 끝날지도 몰라요. 이 예선전."

─…… 하하.

손녀딸의 싸늘한 빈축에, 안영길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 됐다. 이런 밈 요즘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아무튼. 결론만 말하자면 1라운드의 결과는 참가자 진영의 참패로 끝났다.

알겠어? 참패라고, 참패. 쪽도 못 쓰고 개발렸다 그거야.

"하아……."

내 입으로 말하려니까 한숨밖에 안 나오네 이거.

솔직하게, 내 진심을 담아 말하건대 결코 우리들이 만든 요리의 수준이 낮았던 게 아니다. 나와 유동건 사장님, 차윤구 셰프는 정말 최선을 다했고, 처음 그린 청사진 그대로 완성도 높은 메뉴를 완성했다.

다만 그런 우리들이 만든 요리로도 안상필 대가를 포함한 우승팀의 벽을 넘지 못했을 뿐.

'실제로 겪으니까 진짜 말도 안 되는 난이도야.'

머리로는 분명 이 마지막 심사가 얼마나 까다로울지 예상했었지만 그걸 진심으로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였던 듯싶다.

당장 우리들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뛰어난 메뉴를 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무참히 깨져 버릴 줄이야.

"너무 땅바닥만 보고 있지 마라. 이걸로 끝난 건 아니잖아."

"…… 그건 그렇지만요."

날 위로하려는 듯 어깨를 두드려주는 차윤구 셰프였으나, 반대로 난 그래서 더 이 상황이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젓번에 말했다시피 이 심사는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물론 요리라는 게 항상 절댓값으로만 나오는 건 아니니 언젠가는 이길만한 요리가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과연 언제일까?

몇 번을 더 져야 가능하지?

심지어 우리가 이겨야 할 상대가 우승팀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이 심사를 받는 4팀보다 빨리 우승팀보다 우월한 메뉴를 만들지 않으면 패널티로마저 느껴지는 기회조차 사라진다.

실패하더라도 성공할 기회가 있다는 건 분명 마음 한구석에 안심을 주어야 할 안전장치일 텐데, 지금은 오히려 그 안전장치가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 절벽에 매달린 우리들의 목숨줄로 보인다.

그 줄이 끊어지기 전에, 과연 이 험난한 절벽을 오를 수 있을까?

"해봐야 아는 거지. 해봐야 아는 거긴 한데……."

사실 처음에는 안상필 대가가 조금은 봐주면서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예선전이고, 결국 본선으로 진출할 합격자는 나와야 할 테니까.

그게 틀린 생각이었다는 건 1라운드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안가람의 주방장이자 사장으로서 고객에게 내갈 음식을 조리할 때 이상으로 집중하던 안상필 대가의 얼굴을 보고 내 멋대로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아마 몇 번을 더 하든 똑같겠지.'

안상필 대가는 전력으로 심사에 임할 거고, 그때마다 우승팀의 요리는 진일보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상대에게 이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 그쪽보다 더 빨라야 해.'

우승팀이 진일보할 동안, 이쪽은 두 걸음, 세 걸음은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배한 채 정체될 뿐일 테니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데.'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한때의 은사 덕분에 찾아온 웃지 못할 딜레마에 미간에 주름이 선명하게 잡힌다.

아차차. 또 인상 안 좋다고 누가 뭐라 할라.

뺨 위로 펼친 손을 갖다 대고 빙글빙글 문지르며, 루틴을 통해 얼굴 표정을 고쳤다. 어쨌든 이것도 방송. 이 10분 남짓한 짧은 쉬는 시간조차 방송을 타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간신히 미간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단 한 차례의 조리로 번아웃 직전까지 간 지친 팀원 두 사람을 불렀다.

"유동건 사장님, 최윤구 셰프! 잠시 이야기 좀 해요!"

갑작스런 부름이었던 탓일까, 의문스런 시선을 향하는 두 사람. 나는 그들을 하나씩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저희, 쉬고만 있을 게 아니라 다음 심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심사 준비?"

"예."

"준비하는 건 좋은데, 어떻게?"

"작전회의라도 하죠. 피지컬이 안 되면 뇌지컬이라도 굴려야 하잖아요?"

"……?"

"그게 그러니까……."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두 사람을 위해 최대한 순화한 말로 되풀이했다.

"몸이 안 되면 머리를 고생시켜야 한다구요."

"아."

"그런 뜻이었구나. 요즘 애들은 못 알아먹을 말을 잘도 쓴다니까."

"하하……."

나도 원래는 못 알아먹는 쪽의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격세지감을 양쪽에서 체험한 사람이 되니 남성, 여성의 인생을 모두 살아봤다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방향성이 다르긴 했지만.

***

찬혁과 그 일행이 한창 다음 라운드를 대비한 작전회의를 시작할 때쯤, 우승팀 쪽에서도 열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물론 대화의 주축. 정확히 말하자면 화제의 대상이 된 건 안상필이었다.

방송가와 안영길의 요청으로 이곳을 찾은 시즌 1 우승팀의 두 사람이지만, 그들도 안상필이 이 자리에 함께할 줄은 모르고 있었으니까.

이미 심사가 시작되기 전날 만나 충분히 대화를 나누며 짧게나마 손발을 맞춰본 그들이었으나, 막상 실전으로 들어갔을 때 보여준 안상필의 진심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심사 정말 대단한 솜씨였습니다."

"안영길 선생님이 한창 날릴 때를 보는 것 같았어요."

"감사합니다. 선배님들이야말로 여전히 정정하신 것 같습니다."

"에잉, 우리야 다 늙었죠."

"슬슬 가게도 자식 놈한테 맡겨야 하나 싶습니다. 아들놈이 상필 씨 반만 닮았어도 내가 안심하고 은퇴할 텐데."

그들은 안영길과 비교하면 분명 후배에 속하는 세대이나, 안상필과 비교하면 분명히 훨씬 더 앞서서 요식업에 투신한 세대.

그들이 시즌 2에 불참하는 이유도 반 이상은 체력의 저하를 체감한 탓이 크다. 단순한 고객을 접대하기 위한 요리에 드는 체력과 시합에 드는 체력은 그 요구량이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을 대하는 안상필의 태도 또한 조심스럽다.

한참 동안이나 안상필을 향한 칭찬을 쏟아내던 그들은, 이윽고 화제를 돌려 방금 치른 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안상필을 보고는 감탄을 뱉은 그들이지만, 심사를 치를 때에는 감탄을 넘어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기에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이번에 새로 열릴 대회에선 예선전까지 열린다기에 얼마나 대단한 걸 찍으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확실히 대단한 친구들이 모였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엔 잘 했는데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다른 참가자가 들었다면 엄살 부리지 말라고 한 소리 해주고 싶을 발언이지만, 그들은 제법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우승팀이 오랜 시간 갈고닦은 예리한 칼이라면, 이번 참가자들은 무섭도록 순도 높게 정련된 합금 주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긴 하겠지만 어느 팀이 올라오든 다음 본선이 열리기 전까지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가진다면, 분명 자신들을 능가할 칼날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 당장은 그들이 자신을 능가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이런 대화 또한 그런 확신에서 나온 여유이리라.

"나는 그런 애가 세상에 둘이나 있을 줄은 몰랐어요."

"효민이도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아인데……."

"오히려 정석적인 메뉴 선택에 대한 감은 더 나아 보이기도 합니다."

"참, 이것도 인복이라면 인복이에요."

그런 합금괴 속에서도 유난히 독특한 빛깔을 자랑하던 찬혁의 모습을 떠올린 그들이 웃자, 안상필이 살짝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찬혁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상필은 최근 찬혁에게 앙금이 하나 생긴 참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애가 효민이 친구라고요?"

"효민이랑 아까 요 앞에서 만났을 때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하하,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안상필을 향한 농 섞인 말에, 그는 반쯤 정색하며 굳게 답했다.

"아뇨.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주괴가 칼로 모양을 바꾸려면 어마어마한 열을 가해야 하지 않는가.

안상필은, 자신이 친히 그 불꽃이 되어줄 각오를 진즉에 마친 상태였다.

"저희를 이기지 못하면, 다음에도 이기지 못할 테니까요."

이곳은 아직 지옥의 문턱에 불과할 뿐이다. 참가자들이 이 루프를 깨지 못하는 이상.

설령 지금을 계속 되풀이하는 결과가 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런 마음이 담긴 안상필의 냉랭한 웃음에, 두 사람은 탄력 잃은 피부 위로 소름이 돋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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