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루프 매치.-2-
30분이나 추가로 주어졌던 휴식 시간도 끝나고, 나를 비롯한 우리 팀과 이제 딱 하나 남은 상대 팀이 자연스럽게 조리장 앞에서 서로와 맞닥뜨린다.
정민수 셰프, 박여욱 셰프, 심병일 셰프. 이름값 하나는 어디서도 꿇리지 않을 쟁쟁한 면면에 새삼 '내가 진짜 결승에 나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봐야 예선전 결승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놀라울 만큼 대단한 발전임은 틀림없다. 물론, 그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결코 없지만.
조리장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 문 앞에서 마주한 우리는 잠시 동안 서로를 가만히 마주 봤다.
적의라기보다는 호승심.
악의라기보다는 투쟁심.
한마디로 딱 정의 내리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며 그렇게 마주 보기도 잠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슷한 타이밍에 손을 내밀며 악수를 나눴다.
"잘 해봅시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뺄 수도 없다.
앞선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언제든 최선을 다해 경쟁할 뿐.
아직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시감은 여전하지만 이제 와서 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날 리도 없겠지.
'좋아. 가자.'
각오를 다지며, 열린 조리장 문을 향해 크게 발을 내디뎌 앞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무엇이 기다릴지 전혀 알지 못한 채.
***
찬혁을 비롯한 일행이 조리장에 입장 했을 때, 당연하게도 그들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그들 본인이 사용할 조리도구와 설비가 있을 조리대였다.
5차 심사인 팀 대결을 맞이하여 한 차례 변화를 겪은 조리장은 수많은 개인용 가설 조리대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사용할 수 있게끔 좀 더 커다란 조리대 두 개로 교체됐고, 거기에 더해 조리대끼리는 서로 마주 보는 구조가 되게끔 설치되어 있었다. 카메라로 보았을 때 좋은 화면을 찍기 위한 조치였다.
분명 5차 심사의 2라운드. 즉, 정민수를 비롯한 4팀이 2팀과 대결을 마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되어 있었을 터인 조리장에, 누가 와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 세 개?"
여섯 명의 참가자 중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일까.
그들 중 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전원이 그 말과 같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되뇌는 중이었기에.
그 말대로, 조리장에 있는 조리대는 약 한 시간 반가량 이전보다 하나가 더 늘어나, 어느새 세 개로 불어나 있었다.
"뭐야, 왜 하나가 많아?"
"……."
처음 서로 마주 본 구도로부터 조금 더 각도가 바뀌어, 세 개의 조리대가 심사대 방향을 밑변으로 둔 삼각형으로 배치된 모습에 참가자 일동이 의문을 드러낸다.
남은 참가자는 여섯. 두 개의 팀이 각각 세 명이기에 분명 수가 많은 조리대.
설마 하는 생각이 그들의 뇌리를 스친다.
3인1팀이라는 구조에 익숙해진 그들을 다시 세 팀으로 가를 속셈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이미 온갖 기상천외한 심사과제를 그들에게 내놓아왔던 심사단이라면 그 가능성도 없진 않으리라는 비틀린 믿음.
"어서 오십시오. 참가자 여러분.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2 예선전. 그 마지막 대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 방향에 있는 조리대에는 각 팀의 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본인의 팀 번호가 적힌 조리대 앞에 자리해주세요."
그러나 심사대는 그 믿음을 배신했다.
그게 좋은 의미일지 나쁜 의미일지는 참가자가 생각하기 나름이었지만.
애매모호한 시선을 띤 참가자 일행이 각각 자신의 자리로 향한다. 그들이 앞서 생각했던 것처럼 팀이 갈리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안심하는 자도 있었지만, 반대로 여전히 일말의 불안감을 놓지 못하는 자도 있다.
"……."
찬혁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후자에 속했다.
'대체 이 양반들이 또 무슨 짓을 꾸미려고.'
이미 찬혁의 마음속에선 심사단과 제작진을 향한 신뢰는 0에 가깝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만큼 그들을 믿는다고 봐도 좋다. 그게 좋은 의미는 결코 아니겠지만.
과연 이번에는 또 어떤 대단한 과제로 자신들을 당혹스럽게 할까. 찬혁의 생각은 오로지 그것에만 쏠려 있었다.
여전히 용도를 알 수 없는 세 번째 조리대.
참가자들의 의문이 담긴 시선이 온통 그곳에 향하고 있음을 안 것일까. 김선옥은 조리대 앞에 자리 잡은 면면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뒤이어 입을 열었다.
"앞서 여러분이 수행한 5차 심사의 목적은 하나의 팀으로서 행동할 때의 능률을 보기 위한 심사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한 팀으로서의 능력에 부족함이 없음을 증명했죠."
그러니. 김선옥이 말을 잇는다.
"이번에는 능력이 아니라 자격을 증명할 차례입니다. 그에 걸맞은 심사를 통해서요."
자격을 증명한다? 의미심장한 발언에 참가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여태껏 불이 밝혀지지 않아 어두컴컴하던 심사단의 배후에 갑작스레 조명이 켜진다.
하얀 장막에 가렸으나, 조명은 그 장막 뒤편에 숨은 누군가의 실루엣을 마치 그림자 연극처럼 무대 위로 드리운다.
그 숫자. 각 팀의 구성원과 같은 셋.
세 사람의 실루엣을 본 참가자들의 시선이 크게 뜨이고, 세 번째 조리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는 듯 입을 헤 벌린다.
"그리고 지금 여기, 그 자격 심사를 진행해주실 분들이 와계십니다."
천천히, 느긋하게 장막이 거둬진다. 그 여유로움에 참지 못하고 직접 뛰쳐나가 걷어 버리고 싶어질 만큼 느린 속도로.
연출용으로 설치한 연무기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그들의 얼굴이 드러난다.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1. 그 영광의 주인공들. 그리고……."
이제야 여태껏 뇌리를 스치던 기시감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은 찬혁이, 저도 모르게 막힌 숨을 뱉어내듯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시즌 1 한국팀 팀장을 맡으셨던 안영길 대가의 대리로 자리하신 안상필 대가를 여러분께 소개드립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물론, 그 웃음이 진짜 웃음은 아니었지만.
***
아까부터 들던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가. 나는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선배네 아버님 차였어.'
여태껏 그걸 몰랐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1년하고도 반년 가까이 전에 딱 한 번 타본 차의 생김새를 여태껏 정확하게 기억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닐까?
이 정도면 내 기억력도 제법 쓸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지금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조금 더 깊게 생각했어야 했다.
선배가 여기에 혼자 왔을 리 없다거나, 적어도 동행이 있으리란 것 정도는 생각했어야 했는데. 난 그게 안상필 대가일진 몰랐지.
"이걸 안 알려주네 안창민 이 새…… 아니, 그래. 후……."
친구 욕해서 남는 게 뭐냐.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이 일가는 조부부터 시작해서 3대가 날 놀려먹는 거에 맛이라도 들린 걸까? 어떻게 된 게 매번 사람을 이렇게 참신하게 놀래키는 걸까.
어이가 가출하는 상황에 도리질을 치기도 잠시, 안상필 대가를 비롯한 세 사람의 셰프가 비어 있던 세 번째 조리대 앞에 서자 김선옥 셰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향해 외친다.
"마지막 심사 과제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심사는 간단합니다. 제한시간은 60분. 메뉴는 두 가지. 어떤 메뉴를 만들어도 좋으니, 여러분 앞에 계시는 시즌1 우승팀보다 더 뛰어난 메뉴를 만드십시오. 두 팀 중 먼저 합격하는 팀이 시즌2 본선에 진출하게 됩니다."
…… 뭐?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그 말은…….
"이번 심사는 합격자가 나올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첫 번째 심사에서 우승팀보다 뛰어난 메뉴가 나오지 않은 경우, 바로 두 번째 심사로 이어집니다. 같은 조건, 같은 과제로 말이죠."
물론, 우승팀은 매번 다른 요리를 만들겠지만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김선옥 셰프를 바라보는 참가자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짜로?'
시즌1 우승팀. 물론 안상필 대가 같은 경우엔 교장 선생님의 대리로 나온 거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둘 사이에 그렇게 큰 격차가 있을 리 없다. 아니, 교장 선생님이 현역을 반쯤 은퇴하신 거나 다름 없단 걸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은 안상필 대가의 실력이 우위에 있을 수도 있다.
이미 한 차례 우승까지 거머쥐었을 만큼 완벽하게 팀웍을 다진 팀.
이 예선전에서 처음 만난 사람끼리 급조한 팀.
개인의 솜씨는 그렇다 쳐도 팀웍에서 완벽하게 밀린다. 더 뛰어난 메뉴를 만드는 건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만큼 어려우리란 걸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거기다 연전이라고?'
심지어 이 경우 우리 1팀과 저쪽 4팀 중 어느 한쪽이라도 합격자가 나올 때까지 끝나지 않는 치킨레이스.
기회가 많다면 좋은 거 아니냐고? 모르는 소리 마라. 기회는 우리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우승팀 또한 같은 기회를 가졌단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어떤 일이든 초심자가 흔히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아, 나도 이 일을 배우고 성장하면 언젠가 저 고수랑 어깨를 맞대고 있겠지?'라는 생각. 이건 사실을 전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소리다.
물론 격차가 좁혀지긴 하겠지. 일의 숙련도를 100점으로 표기한다고 칠 때, 0점에서 50점이 될 때 필요한 노력과 50점에서 100점이 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차원이 다르다.
숫자가 같더라도, 그 내면에 있는 역치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극한까지 레코드를 기록한 육상선수가 단 0.01초를 줄이는 데에 선수인생 평생을 쏟는 것처럼.
그럼에도 기억해야 할 것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그 성장속도가 더뎌질지언정 아예 성장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
그 이야기를 이 경우에 대입한다면…….
'이 심사는 한 번 기회가 날아갈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아무리 안상필 대가라곤 해도 결국 교장 선생님의 대리. 어느 정도 손발을 맞췄을지는 몰라도 다른 셰프와 같이 시즌1에서 동고동락한 사이는 아니다. 벌써 팀웍이 완벽하게 갖춰졌을 리는 없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시즌1과 시즌2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점이 한 가지 있다.
'시즌1 참가자는 전부 한식의 스페셜리스트였어.'
그리고 시즌2 참가자. 즉 우리는 저마다 특기가 다르다.
1:1 대결이라면 몰랐겠지. 하지만 팀전이라면?
'…… 팀에 익숙해지는 속도가 차원이 다를 거야.'
거기다 메뉴 사이의 궁합, 연결성과 메뉴 자체의 완결성 또한 마찬가지.
단일 종목의 스페셜리스트가 뭉쳤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시너지가 발생할 게 당연하다.
'아니, 시너지고 뭐고 단순히 생각해도 힘든 게 당연하지.'
시즌1 우승자. 즉 그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한식을 잘 만드는 요리사이자, 그 한식으로 세계를 제패한 사람들이라는 뜻.
그런 팀이 이 심사가 길어질수록 더더욱 강해진다.
'진짜 정신 나간 양반들이네.'
저기 눈보라사에서 만든 대악마3도 이런 식으로 난이도를 조져놓진 않았다! 아, 이게 코리안 디피컬티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새벽녘이 떠오르는 동쪽의 땅은 전사들의 성지입니다 하는 그거?
이쯤 되니 진지하게 드는 생각이 하나.
"…… 이 예선전, 끝나긴 할까요?"
"…… 글쎄. 난 모르겠다."
데스게임은 로그아웃 당하면 죽기라도 하지, 이건 죽지도 못하고 영겁의 굴레에 속절없이 빠져야 한다.
허 참.
당황스러움과 절망이 섞여 괜한 헛숨만 목젖을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