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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87화 (287/403)

287. 푸드 서전.-2-

악랄하다.

그것도 보통 악랄한 게 아니라, 참신하게 악랄하다.

'망한 요리를 고치라고?'

무슨 요리를 어떻게 망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발상 자체만으로 일단 이 미션을 생각한 양반이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겠다.

솔직히 좀 방심하고 있었다. 할 만한 거 다 했으니까 이제 좀 편한 거 나오겠지. 생각 없이 요리해도 괜찮은 거 나오겠지. 뭐 이런 식으로.

근데 설마 여기서 깜빡이도 없이 유턴을 조져 버릴 줄이야. 누군진 몰라도 운전대 잡으면 안 될 정신머리를 가진 인물이 분명하다.

망한 요리를 고치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니, 아예 그대로 헤드뱅잉을 해 줄 수도 있다.

요리가 건물을 짓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보자.

식재료는 원자재, 요리사가 건축업자라면 조리법은 일종의 건축양식이다.

무슨 음식을 만드느냐에 따라 그게 고딕 양식이 될 수도 있고, 바로크 양식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르네상스 양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건축양식과 모양을 내는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점에서 요리와 건축은 규모를 제외하면 제법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슨 양식이니 뭐니 씨부리는 것도 제대로 만든 다음에나 할 수 있는 거지…….'

자재를 얼기설기 얽어 대충 쌓아놓기만 하고 '이게 제가 만든 건물입니다!'라고 말해봤자 누가 알아주겠는가.

거기다 요리와 건물 사이에 또 하나 비슷한 점을 찾자면, 두 경우 다 한 번 완성된 다음에는 손을 대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거다.

망친 요리란 건 다시 말하면 시공부터가 망한 건물과 같다.

배선이나 수도, 뼈대 작업을 망친 건물을 멀쩡하게 수리하라면 그게 가능할까? 차라리 아예죄다 부숴서 흔적을 깡그리 치워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짓는 게 훨씬 빠르겠지.

요리도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얼추 비슷하다.

뭐 간이 안 맞는다, 익힌 정도가 잘못됐다든가 하는 수준의 문제라면 적당히 수습이 될지도 모르지만, 뒷수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요리를 고치라는 건 나로서도…… 아니, 나는 고사하고 세계 어느 유명 셰프가 오든 힘든 일일 것이다.

'제작진이 좀 사정을 봐주면 좋겠는데…….'

당연한 소리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여태껏 준비한 심사과제만 봐도 척 보면 척이다. 이 사람들, 절대 대충 할 생각이 없다. 적당히란 말을 모르는 걸까.

또다시 찾아온 묘한 불안감을 한숨에 섞어 내뱉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참가자들도 이미 반쯤 체념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 태풍이 오면 정해진 수순대로 대피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는가. 뭐 크립톤인도 아니고 맞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얀 현수막을 배경으로 등을 곧게 펴고 앉은 심사단은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심사 과정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참가자 여러분은 저희가 제공할 실패한 음식 중 한 가지를 골라,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메뉴를 되살려 주시면 됩니다. 메뉴에 제한은 없으며, 어떤 방법을 써도 괜찮습니다."

"이 4차 심사는 만약 조리 중 사고나 실수가 발생했을 때를 상정한 심사로서, 여러분의 순간적인 발상과 임기응변, 대처하는 솜씨를 보기 위한 심사입니다."

"각각의 실패한 음식에는 고칠 방법이 분명히 존재하며, 저희 심사단이 미리 선을 그어둔 기준점에 미달한다면, 해당 참가자는 탈락하게 됩니다."

하, 그렇게 나왔다 이거지.

실패한 음식 중 하나를 고르라는 건 정말 제대로 준비했단 뜻이다.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이 일부러 실패한 음식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지만, '반드시 고칠 방법이 있는' 실패한 요리는 어지간해선 만들지 못할 테니까.

그나저나 대체 어떤 괴짜가 그런 해괴망측한 걸 준비했을까.

'분명 성격 한 번 더럽게 괴팍한 양반일 거야.'

이런 사람 괴롭히는 축제 같은 거에 진심을 쏟는 사람이라니, 안 봐도 뻔한 성격이다. 뭐, 돈이 있다면 뭐든 할 수 있겠다마는.

대체 어떤 음식을 준비했을지, 다른 의미로 기대 가득한 심정을 담아 기다리던 우리를 향해 심사단이 말을 덧붙인다.

"여러분께 제공할 실패한 음식을 공개하기에 앞서, 먼저 이번 메뉴를 만드는 데에 힘써주신 게스트 심사위원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오.'

안 그래도 궁금한 차였는데, 나와 같은 심정인 참가자 일동의 시선이 심사단 쪽으로 모인 그때. 우리의 시선 반대쪽. 그러니까, 방금 우리가 들어온 입구 쪽에서 갑작스런 소리가 울려 퍼진다.

─찰칵! 끼이익─

문고리가 돌아가고, 기름칠 안 된 경첩이 비틀리는 소음.

깜짝 놀란 참가자들의 시선이 휙 돌아가고, 그에 따라 내 시선도 같이 그들을 따랐다.

그 직후, 나는 내 눈과 뇌가 현실을 파악하는 것보다 빨리,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어깨를 넘어 견갑골 근처까지 닿은 흑발. 공부 탓에 푸석한 기미가 늘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다시 원래의 윤기를 되찾은 머릿결이 부드럽게 찰랑인다.

머리칼 아래 자리한 얼굴의 미모 또한 대단하다. 한때 TV에서 실력보다 외모를 보고 반한 팬들이 훨씬 더 많았단 말이 과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당당한 표정. 그리고 평소에 접할 일이 별로 없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얼굴. 작게 지어진 미소가 오히려 저 사람을 더 멀어 보이게 만든다.

…… 그래, 이쯤 말했으면 알겠지.

그런 그녀를 처음 본 내 감상은, 오로지 이것 하나뿐이었다.

'누나가 왜 거기서 나와?'

***

"소개합니다. 이번 심사를 함께 준비해주신 안효민 학생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이전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 1에 출연하여 우승의 쾌거를 달성한 한국팀의 일원이시죠."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막상 생각하면 아주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촬영하고 있는 현장은 어디까지나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의 두 번째 시즌 예선전.

보통 시즌제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이전 시즌과의 연결성을 어떤 식으로든 부여하고 싶어한다.

영화, 만화, 소설, 게임. 그 어떤 것이든 말이다.

뭐, 그러다가 가끔 삐끗해서 전작 주인공 대가리를 골프채로 날리거나 해서 시리즈를 통째로 조져버릴 때도 있지만…….

뭐 아무튼, 위에서 든 예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전작과의 연결성을 갖기 가장 쉬운 방법은 다름 아닌 전작의 등장인물을 그대로 재등장 시키는 것이다.

지금 같은 경우, 그 등장인물이 바로 안효민 선배였다는 게 되겠지.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닌데…….

"내가 그걸 어떻게 예상하냐고……."

어째 전화를 안 받는다 싶더니, 설마 어제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여기 나올 준비를 하고 있던 건가?

인원수가 절반 이하로 줄은 참가자 일행과 같은 줄에 서서 선배를 힐끔 바라봤지만, 선배는 여전히 심사단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평가를 해야 할지 상의라도 하는 걸까.

살짝 맥 빠진 시선으로 그런 선배를 빤히 바라보던 그때, 마침 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선배와 내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히죽

…… 아?

웃었어? 지금 웃은 거야? 확실하다. 저건 그냥 반가워서 웃었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명백한 조롱의 의도가 담긴 웃음이었다. 설마 제대로 놀라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서 웃는 건가? 진심으로?

"그래,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좋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그쪽이 먼저 건 싸움이다. 나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진 않겠다 이거야.

유린당하지는 않겠다……!

…… 아니 잠깐, 이건 패배 플래그인가.

***

"지금부터 여러분이 선택할 실패한 음식을 공개하겠습니다."

김선옥 셰프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스태프 여럿이 트레이를 끌고 오더니 조리대와 심사대 사이 빈 공간에 주르륵 늘어놓는다.

트레이의 개수는 총 다섯 개. 그 위에는 방석과 비슷한 크기의 큼직한 실버 플래터가 뚜껑이 덮인 채 놓여 있다.

'다섯 개나 준비한 거냐…….'

대체 얼마나 철저한 거냐고.

수상할 정도로 행동력이 좋은 트롤러 선배의 야심찬 실패작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잠시, 이윽고 스태프가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플래터의 뚜껑을 열어젖힌다.

직후, 나는 두 눈을 크게 찌푸리며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여러분이 고쳐야 할 메뉴입니다."

메뉴의 구성은 이러했다.

좌측부터 통안심 스테이크, 깐풍기, 모둠채소볶음, 돼지고기카레, 조개찜.

이름만 들으면 맛있어 보이지? 하지만 틀렸다. 그 내용물은 내가 감히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으니까.

"아니, 이게 사람이 만든 거라고?"

"어떻게 해야 카레를 망칠 수가 있는 거지……?"

"이게, 요리……?"

그래, 심각하지. 참가자들의 넋을 잃은 곡소리에 무심코 나도 한 곡조 끼워 넣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한심한 꼴이 되리란 건 알지만, 그도 그럴 게 이 정도 수준이면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우선 통안심 스테이크. 대체 뭘 어떻게 구웠는지 두께가 손가락 두 마디는 넘어갈 것 같은 소안심 덩어리가 값비싼 재료가 무색하게도 겉면이 온통 새까맣다.

"이건 무슨 숯 덩어리도 아니고……."

깐풍기는 도대체 튀김에 겉바속촉이라는 개념이 어디로 갔는지 튀김옷은 익히는 시간이 너무 적어서 옅은 색이고, 거기다 튀긴 다음 기름 빼기를 게을리 해서 젓가락으로 집으면 단박에 찢어질 것 같다.

"우읍! 아니, 소스는 또 왜 이렇게 짜?!"

겉보기에 상태가 가장 심각한 건 모둠채소볶음이다. 채소를 너무 오래 볶아서 아삭한 채소의 식감은 어디가고 흐물흐물 늘어진 게 50대 남자의 모발보다 더 힘이 없다.

"그나마 이건 간이…… 밍밍하잖아!"

카레는 또 이것대로 문제다. 카레는 누가 만들어도 먹을 만 하다는 상식은 무슨 상식개변 최면이라도 맞은 것 같은 신세가 됐다. 밥에 부었을 때 밥알 사이사이로 스며들어야 할 국물이 너무 뻑뻑해서, 카레라는 이름의 껍데기가 생긴 고기와 야채 볶음이 된 수준이다.

"너무 졸여서 짜기까지 하네……."

조개찜. 이건 그나마 양심이 있다. 찐 상태도 제법 좋고, 익힌 상태도 나쁘지…… 는 않은데. 아니, 잠깐만.

"…… 비린내가 무슨……?"

해감을 얼마나 대충 했으면 이 난리가 났어?

대체 어떻게 요리를 해야 이렇게 되는 걸까.

이게 정말로 시즌1 참가자가 직접 만든 요리라고?

모든 참가자가 의심과 경악이 가득 들어찬 시선을 보내는 가운데, 안효민 선배는 그저 자리에 앉아 당당한 얼굴로 우릴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진짜, 세상에.

내 얼굴에 화장을 세 번 정도 덧칠해도 저 사람 철면피는 못 따라가겠네.

"…… 총체적 난국이구만."

정말, 딱 이 상황에 어울리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참가자 일동의 가슴에 푹! 하고 말뚝처럼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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