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푸드 서전.-1-
첫 번째 순서로 3차 심사를 통과한 것으로 오늘의 내 스케줄은 끝이…….
"자 그럼 별실에서 승자 인터뷰하고 가실 게요!"
"…… 아, 예."
안 났다. 뭐야, 뭐냐고. 왜 안 끝나. 너네 이거 미성년자 노동력 착취인 거 몰라?!
…… 라고 항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어째 여기 온 뒤로 요리하는 시간하고 인터뷰 찍는 시간이 엇비슷한 것 같은데…….'
결국 이것도 방송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납득할 뿐이다. 나도 나지만, 아마 스태프들은 참가자 못지않게 고생하는 사람이 수두룩할 테니까.
이래 보여도 TV에 나간 횟수만 세 번째다. 가장 고생스러운 건 스태프 쪽이라는 걸 알면서 강짜를 놓을 만큼 나는 얼굴가죽이 두껍지 않다.
'아까처럼 화장을 했으면 또 모를까.'
얼굴이 부드러운 인상이 된다는 것도 그렇고, 화장이나 조금 배워볼까. 아이라인 정도는 막 깊게 배우지 않아도 플레이팅으로 단련된 내 예술 감각이라면……!
무슨 소린지. 심사 탓에 피곤해져서 머리가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어찌저찌 잘 도착하긴 했네."
가로등도 몇 개 없어 어두침침한 길. 이런 곳을 걸으려면 담력이 필요하다. 그게 아니면 무서움을 잊기 위한 무언가라도. 방금 그 정신 나간 것 같은 잡소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핸드폰 손전등과 gps지도에 의지해 간신히 찾은 이곳…… 이라곤 해도 끽해야 10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낯선 산길에서 10분을 걸어야 한다는 건 충분히 위험한 일이다. 어차피 주변에 논두렁밖에 없는데 뭐가 위험하냐고? 내 마음이 위험하다.
아무튼, 시야 저편에서 내 눈을 밝히는 조명을 따라 조금 더 길을 걸으니, 비로소 내가 향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생김새를 한 3층 정도 높이의 커다란 목조건물. 제법 연식이 되는지 외관이 산바람에 휘날려온 흙먼지로 덮였지만, 충분히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반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안에는 누군가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복도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안 보이는 걸 보니 그마저도 몇 명 없는 것 같았지만.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
다행히 여긴 들어가자마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안 보였다. 음산한 음악도 없고, 혼자 뛰쳐나갔다가 옷장에 숨을 친구도 없다. 이건 다행이네.
…… 뭐, 아무튼.
"여기서 하룻밤이라……."
뭔가 수련회나 캠핑 같은 걸 온 기분이다. 묘하게 설레는데, 기분이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애매한 느낌.
부디 난방만은 잘 되길 바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고? 하, 그래. 무엇을 숨길까. 이곳이 바로 내가 오늘 밤을 보내야 할 숙소이기 때문이다.
***
"예전에 쓰던 기숙사 건물이요?"
"예. 촬영지 협조해주신 분께서 같이 대여해주신 곳이에요. 예전에 학교를 사용하고 있을 때 같이 사용하던 곳이라는데, 참가자 여러분이 다 같이 사용하실 수 있을 만큼 규모도 꽤 크거든요. 촬영 스태프 몇 명도 숙소에 대기 중이니까 가시면 그쪽에서 안내해주실 거예요."
…… 라고 했었지, 분명.
인터뷰가 끝난 직후, 스태프가 알려준 숙소 위치를 찾아온 나는 생각보다 충실한 설비에 살짝 놀라고 있었다.
"이 방 사용하시면 돼요. 전기랑 수도도 방송 목적으로 복구시켜놨고, 안에 설비도 점검 끝냈으니까 하루 지내시는 건 문제없을 거예요."
"예. 감사합니다."
"뭘요. 아, 그리고 혹시 세탁물 있으시면 지하에 가시면 될 거예요. 지하에 공용 세탁시설이 있더라고요. 근데 세탁기는 따로 없어서 손빨래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아,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혹시 빨래판은 있나요?"
"예! 저희가 구비 해 놓은 게 몇 개 있습니다! 빨랫비누도 하나 미리 챙겨드릴까요?"
"부탁드릴게요."
조금 부족한 것도 있긴 했지만…… 아니 뭐, 오래된 시설은 어쩔 수 없는 거지.
요리를 하느라 흘린 땀과 튀긴 국물 따위에 더러워진 조리복을 빡빡 빨아서 수동 탈수기에 돌리고 스태프가 어디선가 가져온 옷걸이에 잘 널어둔 뒤에야 비로소 쉴 준비를 끝냈다.
'일찍 끝내서 다행이구만.'
역시 첫 번째 순서라고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심사 볼 동안 할 거 끝내고 빨리 쉴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덕분에 전화로 근황보고를 돌릴 시간도 생기고 말이다.
"여보세요? 엄마?"
─그래, 우리 아들. 대회는 어떠니? 잘 하고 있어?
"네. 당연히 잘 하고 있죠. 첫째 날은 잘 통과했어요. 내일 나머지 심사 치르면 본선 진출이에요."
─다행이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엄마는 네가 잘 되는 것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건 안 다치고 몸 성하게 돌아오는 거야. 알지?
"알아요. 주아는요?"
─아직 학원이 안 끝났나 봐. 엄마가 연락해서 전화하라고 할까?
"아뇨. 됐어요. 걔도 자기 일이 있을 텐데 보고 싶으면 알아서 하겠죠. 내일 또 전화 드릴게요."
─그러렴. 밥은 꼭 챙겨 먹고, 자기 전에는 잘 씻고 방 따뜻하게 하고 자야 된다?
"알아요. 엄마도 주아 기다리다가 때 놓치지 마시고 식사하시고 쉬고 계세요."
어머니는 항상 걱정이 많으시다. 하긴, 어느 부모가 자식 걱정을 끊겠냐마는. 참새가 곡기를 끊는 게 차라리 더 빠를 것이다.
전화를 돌릴 상대가 부모님만 있는 건 아니었기에, 화면이 깜빡이며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다음 상대를 찾아 키패드를 두드렸다.
"야, 형님 전반전 끝나셨다. 넌 뭐 햐냐?"
─잠깐 기다려봐……! 나도 곧 라인전 끝나거든? 아니 근데 이 개백정 놈은 왜 탑에서 사는 거야 대체! 우리 정글 뭐하냐! 정글차이 진짜!
"…… 아, 그래. 바쁘구나. 이따 다시 전화할게."
어느 날부터 패키지 게임을 끊더니 협곡에 인생을 투신하게 된 철정이 놈과…….
"여보세요?"
─아, 찬혁아.
"폰 보니까 끝나고 전화 달라고 톡 보내놨더라. 나 방금 끝났다."
─잘 됐어?
"오늘은. 내일 마저 하고 결과 봐야지."
─응. 잘 했어.
"그래, 땡큐."
─희연이 바꿔줄까?
─뭐, 뭐라카노?! 그런 건 와 묻고 난린데!
"…… 아니, 건강해 보이니까 됐다."
─니 말 단디 해라! 전화하기 싫다 이거가!
"그런 게 아니라……."
─희연이가 걱정 많이 했어. 지금도 전화기 옆에 딱 붙어 있고.
─내, 내가 언제! 됐다! 그마 끊어뿌라!
─자, 잠깐만. 희연아─
삑─삑─하는 소리를 내며 끊긴 전화기를 내려다보다, 작게 실소가 터졌다. 하긴, 이런 녀석들이지.
"여보세요."
─아닌데요.
"…… 뭔 소리야 이건 또."
─재미없었어? 농담이었는데.
"농담 연식이 너무 오래되지 않았냐……."
─헤헤, 티 났어? 아빠 따라 한 건데. 엄마한테 이랬다가 무지 혼났다?
"그러냐……."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가장의 비환이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격이긴 하지만.
3차 심사까지 무사히 통과했단 말에 백예은은 태평하게 답했다.
─잘 할 줄 알았어. 엄마한테도 혁이 예선전 나간다고 말했는데, 엄마는 시간 낭비라고 하시더라.
"왜? 어차피 떨어질 테니까?"
─아니. 예선전 없이 그냥 나가도 아무 문제 없을 텐데 괜히 시간만 버린다고.
…… 그거 참, 날 향한 신뢰가 요상 할 만큼 깊어서 괜히 등골이 서늘하다. 저번에 그 치수 큰 조리복도 그렇고. 묘하게 제 발로 그물에 들어간 물고기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
그 외에도 나름 소식을 전할 만한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전화나 문자를 돌렸다.
출전 직전까지 여러모로 다양하게 가르쳐주신 학교 선생님들이나 사장님처럼 주기적으로 연락을 드리는 분들한테도.
그런데…….
"이 선배는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나는 두 번째 시도마저 실패하고 까만 화면을 내비치며 끊겨 버린 폰을 내려다봤다. 전화를 건 상대는 안효민 선배였지만, 전화기가 꺼지기라도 한 건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다.
신호가 가는 걸 보면 전화가 꺼진 건 아닌 것 같은데…….
하다못해 창민이 녀석도 전화를 받았는데 말이다.
평소엔 전화를 걸면 기다렸다는 듯이 받는…… 아니, 애당초 먼저 전화를 안 걸어도 받던 사람이 무슨 일이라도 있나 잠깐 걱정됐지만. 이내 관뒀다. 안창민이 별말 없는 걸 보면 잘 지내는 모양이지 뭐.
'수능 끝났다고 노느라 바쁜 건가.'
음. 그럼 더더욱 방해해선 안 된다. 수능을 끝난 고3은 얼마든 놀 자격이 있으니까. 게다가 어차피 대학 가선 고3 때보다 바쁠 수도 있거든. 케바케지만, 내 경우는 그랬다. 아마 선배도 별로 다를 건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자니 제법 연락할 곳이 많아서 휴식 시간도 금방 흘러갔다.
"어라? 류찬혁 참가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니, 혹시 죄송한데 본관 모니터링 중이시죠? 그럼 좀 같이 봐도 될는지……."
미안합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핸드폰 하는 데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방에 TV나 컴퓨터 같은 게 있던 것도 아닌데 대화 상대마저 없으니 시간이 정말 더럽게 안 갔다. 애당초 연락을 오래 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보니 전화를 다 돌리고도 30분밖에 안 지났더라고.
정말 할 게 없어서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다가, 이대로 가단 정신병 걸릴 것 같단 생각에 다시 옷을 제대로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왔다가 마침 홀에 모여서 예선전 중계 화면을 보던 제작진을 마주친 것이다.
"죄송하긴요. 얼마든지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근데 피곤하진 않으세요? 오늘 촬영만 10시간이 넘게 하셨을 텐데. 이거 분위기 보니까 일찍 끝나긴 그른 것 같거든요."
"저도 현장은 계속 살피려고요. 누가 올라오는지 봐둬야 하기도 하고…… 아, 혹시 간식거리는 필요 없으세요? 아까 냉장고 보니까 간단하게 요기할 거리는 금방 만들 수 있을 것 같던데."
"에, 예?"
"아, 부침개 어떠세요, 부침개? 금방 만들어드릴게요."
"어, 어…… 저희야 감사하긴 한데 굳이 그러실 건……."
"금방 만들어오겠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음식을 미끼로 적당히 스태프의 환심을 산 뒤에 그들 사이로 들어가 함께 남은 대결을 관전했다.
"어라, 왜 조리장에 사람이 저렇게……."
"오 PD님…… 아, 이렇게 알려드리면 모르시겠구나. 저희 총괄PD님이 이대로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면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고 하셔서 조금 방식을 바꿨거든요. 1대1 대결은 유지하되, 시간차를 두고 연속으로 대진을 시켜서 촬영 시간을 줄이시려는 것 같아요."
"아."
하긴, 60분씩 20팀이 대결하면 하루가 그대로 날아가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 화면을 보니 내가 빨래니 전화니 잡일을 하는 동안 벌써 세 팀 정도는 대결을 끝낸 것 같고, 조리장에선 네 팀 정도가 대결을 펼치는 모습이 보였다.
덕분에 편집되지 않은 중계 영상으로 대결을 파악하자니 눈 둘 곳이 너무 많아 좀 난해했지만, 그래도 역시 남은 인원 중 만만히 볼 상대는 없단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들 프로답게, 내가 예상하지 못한 기법이나 솜씨를 발휘해서 종종 심사단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한, 중, 양, 일을 가리지 않고 튀어나오는 메뉴가 각 참가자의 손안에서 가지각색으로 모습을 바꾸는 걸 보고 있자니, 역시 나오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칼을 잡은 지 30년이 지나도록 요리라는 건 질리질 않는다.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요리에 목숨 걸고 살진 못했겠지.
"우와……."
"저 정도로 하니까 저 나이에 그만큼 하는 거구나……."
"나, 공부 재밌다는 애들 보면 이해 안 됐는데, 좀 같은 과처럼 보여."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한지 옆에서 스태프 일행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다 무시. 지금은 내 심심함을 해소…… 아니, 경쟁자의 실력을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
기숙사에서의 하룻밤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다만 특필할 것이 있다면, 이전 2차 심사 때 함께했던 팀 중 한 사람이 어젯밤 이곳을 떠나게 됐단 것이다.
"김선엽 쿡이 떨어질 줄은 몰랐어요."
"상대도 안 좋았고, 뭣보다 메뉴 운이 나빴지."
"유학파 일식당 셰프 상대로 하필이면 화식和食요리가 걸렸으니……."
안타깝지만, 정말 운이 나쁘단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난 진짜 운이 좋은 편이었지…….'
만약 이우현 셰프의 주특기인 중식으로 대결했다면 이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칫 방심해서 한 치만 발을 잘못 디디면 바로 나락.
정말이지,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가슴속 심란함을 뒤로 하고, 오늘도 우리는 심사에 나선다.
여전히 근엄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는 심사단.
그들의 입에서 다음 심사 과제가 튀어나왔다.
"이번 심사의 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갑자기 조리장 천장에서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흰색 현수막이 주르륵 내려온다. 아니,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한 건가 놀랄 새도 없이, 우리는 현수막에 쓰인 문장을 보고, 반대로 식은땀을 주르륵 흘릴 수밖에 없었다.
"…… 아니, 이건 무슨."
"뭐야 저게."
각 참가자의 입에서, 어이가 가출해 버린 듯한 목소리가 이구동성으로 흘러나왔다.
"망한 음식 되살리기……?"
젠장.
나도 모르게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 이거 편집되겠네.
아니면 이 한마디만 핀 포인트로 나가거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텅 비어 버린 머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