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프렌치 스탠드오프.-3-
시간이 지날수록 심사단의 말수는 줄어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심사시간은 한 시간. 어지간히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 시간 내내 누군가에게 자신이 이해하고 해석한 정보를 알리는 작업, 해설을 맡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김선옥의 경우엔 5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나마 초청 강사로서 교편을 잡았던 적이 있고, 그 외에도 다른 심사단 또한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기에 이만큼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장 해설할 수 있는 인물이 단 두 사람밖에 없어서야 대사를 뽑아내고 싶어도 원천이 너무 부족하다. 오대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다음부터는 대진표 여럿을 한 번에 묶어서 해야겠는데…….'
카메라와 시선이 분산되겠으나, 당장 투입되지 못하고 뒷선에 남은 카메라와 스태프가 여럿이다.
'냉장고를 맡아줘 팀이 부럽구만.'
게스트의 집에 있는 냉장고를 그대로 가져와 그 내용물을 이용해 프로 셰프들이 15분 안에 요리를 만든다는 대전제를 가진 프로그램.
고작 15분으로 무슨 요리를 보여줄 수 있을까 싶지만, 스태프 입장에선 이만큼 편한 일도 없다.
토크를 빼면 촬영 시간도 짧지, 거기다 제한시간이 짧다는 건 별다른 기법을 보여주기 힘들다는 뜻이고, 이는 곧 시청자가 어려운 조리를 보고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토크는 토크대로 뽑으면서 고작 일고여덟 시간 만에 2주 분량의 편집본을 챙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 행복은 방송가에서 일한 적 없는 이는 쉬이 짐작하기 힘들겠지.
'그래도 저 정도면 굉장히 잘 해주고 있다.'
전문MC도 아니면서 저 정도로 토크를 뽑는 요리사는 많지 않다. 그나마 그 유명한 박종원이라면 모를까, 그쪽은 아예 자기가 심사위원을 맡을 자격이 안 된다며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으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쉬움을 납득으로 삼키며 다시금 카메라의 움직임에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는 오대수였으나, 그 또한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심사단이 입을 다문 이유에 대한 것.
"오…… 이야, 저러면……."
"아니 무슨 수준이……."
심사단이 더 이상 멘트를 생각하지 못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는 맞았지만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점입가경에 빠지기 시작한 두 사람의 대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국내 최정상 라인을 앞둔 고수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어 임하는 대결이다. 온갖 기법과 놀라운 몸놀림, 칼 같은 판단력과 예리한 한 수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싸움판.
일반인 시청자가 보아도 충분히 재미있을 그 광경은, 요리사이거나 그 관계자인 심사단의 눈에는 더 없는 구경거리인 동시에 배움의 장이었다.
바둑기사가 다른 기사들의 대국을 보고 배울 점을 찾아내고 눈을 반짝이듯이, 심사단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의 대결을 통해 자신들의 지식욕을 메꾸고 있었다.
"……."
심지어 그 김선옥마저.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사소한 깨달음이긴 했으나, 배울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일이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심심풀이로 초청 강의나 뛰던 교수가 학생들의 토론에서 배울 점을 찾았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현재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덧 두 사람의 화구에서 피어오른 각기 다른 해산물의 향기가 온 심사장을 메우고, 점심식사 이후 여태껏 물 한 모금 쉽게 입에 대지 못한 스태프들이 마른 입술로 군침을 꿀꺽 삼키게 됐을 때…….
─땡!
─땡!
두 사람의 자리에 설치된 벨이 동시에 울리며, 조리 완료의 신호를 보냈다.
***
"이우현 참가자 먼저 심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근소한 차이였다.
제한시간 종료를 1분 남짓 앞두고 거의 동시에 울린 두 사람의 완료 신호.
두 사람의 얼굴은 어느새 배어 나온 땀으로 번들번들했으며, 등에는 확연히 티가 날 만큼 젖은 자국이 보인다.
제한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온 힘을 끄집어냈다는 증거.
달뜬 숨을 길게 뱉은 이우현이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보던 김선엽은 함께 서 있던 차윤구에게 소곤대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이거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뭐가."
"찬혁이요. 완성은 거의 동시에 했는데, 제출이 늦어지면 그만큼 불리하잖아요."
차윤구가 생각하기에도 김선엽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모든 요리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요리는 완성된 직후가 가장 먹기 좋은 타이밍인 법.
요리와 업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리사는 기본적으로 음식이 완성된 직후에 먹어야 가장 맛있도록 조리한다.
온도, 간, 식감. 외부적인 요인에 최대한 영향을 덜 받고 요리사가 원하는 퀄리티를 가장 확실하게 연출할 수 있을 때는 다름 아닌 막 요리를 끝냈을 때니까.
'물론 하룻밤 재워놓고 다시 끓이는 카레처럼 예외는 있겠지만…….'
문제가 있다면, 스튜 계열의 요리는 대부분 그 예외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얼큰한 된장찌개와 애매하게 식어서 콩 비린내가 나는 된장찌개, 둘 중에 어느 쪽을 더 먹고 싶을까?
개인의 기호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다수는 전자를 선호한다.
그 말은 즉, 이 심사에서 선공을 빼앗기는 건 지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차윤구는 힐끗 시선을 돌려 찬혁을 바라봤다.
"……."
아무 말도 없이 팔짱을 낀 채 자신이 만든 부야베스 접시를 내려다보는 찬혁. 헌데, 그런 찬혁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다. 너무 옅어서 알기 힘들지만, 분명 심각한 얼굴은 아니다.
'후공이 불리하단 걸 모르진 않을 텐데.'
"…… 일단, 지켜보자."
그 의미심장한 웃음에 대체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일까.
차윤구가 머릿속으로 의문을 품으며 해답을 기다리자 마음먹은 그때, 비로소 이우현의 심사가 시작됐다.
***
이우현의 접시는 비교적 스탠다드한 느낌이 강한, 정석적인 파리식 부야베스에 가까웠다.
겉보기만 봐도 맛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부야베스의 국물은 자칫 갈색처럼 보일만큼 진한 붉은색을 띄고 있다.
안 그래도 붉은빛이 감도는 비스크에 토마토까지 들어가자 훨씬 강렬한 색채를 갖게 된 것이다.
"세상에, 대단히 화려한 모양새군요."
"플레이팅부터 자기주장이 확고하네요."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자신이 대게 껍데기를 사용한 비스크를 주축으로 만들어졌다고 광고라도 하듯, 심사위원 앞에 놓인 각 부야베스 접시 한쪽에는 껍질 일부가 갈색이 나도록 구워진 대게 등딱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플레이팅을 위해 들어간 장식이 아니다.
구운 대게 껍데기 자체에서 풍기는 향기가 스튜와 섞여서 한층 더 강렬한 풍미를 뿜어내자, 그야말로 압도적인 대게의 향기가 렌즈를 뚫고 콧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향과 색에 압도당한 스태프 여럿이 군침을 삼킨다.
"시식을 시작합시다."
"아, 예."
"이거 참, 외관부터가 굉장히 화려해서 깜빡 넋을 놓고 있었네요."
김선옥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심사단이 저마다 식기를 집어 든다.
하나둘 움직이는 숟가락과 포크, 나이프.
누군가는 국물을 먼저 맛보고, 누군가는 건더기를 나누며 종류와 익은 상태 따위를 확인한 뒤 맛본다.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던 모습은 다 거짓말이었다는 듯,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찬찬히 이우현의 부야베스를 모든 면에서 면밀히 체크하는 심사단.
누가 본다면 시식이 아니라 마치 다 함께 보여 해부라도 하는 것이라 착각할 만큼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그 누구도 한마디 말조차 꺼내지 않고 그저 조용히 시식에 몰두한다.
잠시 후, 얼추 시식을 끝낸 심사단이 굳게 다물고 있던…… 아니, 열심히 저작하며 혀를 굴리던 입을 열어 목에서 소리를 끄집어냈다. "먼저 이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아주 잘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네요."
"사실 저희는 이 요리가 과연 이우현 참가자가 의도한 대로 잘 만들어질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인지 예상이 가십니까?"
심사단의 질문에 이우현은 지체 없이 답했다.
"제대로 된 비스크를 만들기엔 시간이 너무 모자랐기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새우 껍질로 만든 비스크라면 모를까, 대게 껍질로 60분 이내에 완벽한 비스크를 만든다는 건…… 좋게 말해도 아주 어려운 일이고, 사실상 불가능하죠."
"더군다나 이 심사의 과제는 비스크가 아니라 부야베스를 만드는 거였어요. 하나만 집중해도 어려울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건 상식이에요. 그런데…… 이우현 참가자. 이 부야베스는 아주 잘 완성됐군요."
잠시 말꼬리를 늘리던 심사단이 정말 의외라는 듯 호평을 꺼내자, 이우현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진다.
"대게의 풍미를 요리 전체의 기둥이자 대들보로 삼을 생각이란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아주 확실하게 성공했어요. 궁금하군요. 어떻게 시간이 부족하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겁니까?"
"그건, 바로 제가 만든 향미유에 있습니다."
향미유. 그것은 파기름이나 마늘기름, 혹은 계유처럼 기름 안에 특정한 재료를 집어넣고 끓여 기름 자체에 식자재의 향과 맛을 배게 만든 식재료이다.
이우현은 기름에 구운 대게 껍데기를 넣고 끓여서 만든 대게 향미유를 부야베스 위로 흩뿌려 요리 전체를 코팅함으로써 비스크의 부족한 풍미를 채우고도 남을 강렬한 맛을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오호라, 향미유!"
"과연, 그런 방법을 쓴 거로군요!"
"정말 대단한 발상입니다!"
"…… 아뇨.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칭찬 앞에서 이우현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향미유라는 순간적인 발상 자체가 사실은 온전히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스크를 만들던 도중, 도저히 시간이 맞지 않으리란 것을 예감한 이우현은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극도로 머리를 굴렸다. 그때 마침 그의 뇌리를 스친 장면이 하나.
'…… 그러고 보니…….'
그것은 바로, 1차 심사 때 찬혁이 보여주었던 꿩 기름을 사용한 풍미의 극대화였다.
그렇다. 향미유라는 발상은 다름 아닌 지금 그의 맞수가 된 찬혁의 요리에서 떠올린 것이다.
"……."
타인의 요리를 보고 배우는 게 요리사에게 있어서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라곤 하나, 아무리 그래도 지금 대결하던, 그것도 자신과의 나이가 띠 한 바퀴를 넘게 차이 나는 어린아이가 그 대상이 된 것이다.
심란하지 않다면 분명 거짓말이겠지. 그렇기에 심사단의 칭찬 앞에서도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한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승부는 승부.
마음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이길 수만 있다면 마음속 삼각형이 닳는 것쯤은 눈 딱 감고 무시하겠단 각오로 이 자리에 나섰다.
여전히 가슴이 쿡쿡 찔렸으나, 그래도 결과만 좋다면 된다. 오직 그뿐인 이야기.
그렇게 마음을 굳혔음에도, 이우현은 칭찬과 함께 접시를 앞으로 내놓는 심사단 앞에서 고개를 높이 들지 못했다.
"…… 다음, 류찬혁 참가자. 접시 제출하세요."
그런 이우현의 모습을 어딘가 굳은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던 김선옥이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다음 차례인 찬혁을 부른다.
찬혁의 얼굴에는, 여전히 알 듯 모를 듯 옅은 미소가 그대로 자리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