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282화 (282/403)

282. 프렌치 스탠드오프.-2-

사람이 덕을 행하면 복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난 그 복이 돌아온다는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여기서 부야베스가 걸린다고?'

부야베스. 프렌치 하면 떠오르는 요리 중 하나로, 인지도 하나만큼은 알아주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해산물 스튜다.

알겠어? 프렌치라고, 프렌치! 내 승수가 복사가 된다고!

…… 라고, 제멋대로 신나 날뛰는 정신머리를 어떻게든 다잡았다.

아니, 생각해봐. 솔직히 너무 작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예선전 참가자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나라는 건 분명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런 내가 3차 심사 첫 빠따로 뽑힌 것도 모자라 메뉴까지 내 주특기가 나온다고? 모르는 사람이 봐도 당장 주작이 태초마을에서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당장 나도 의심이 갈 정돈데?

뭐, 정말로 뽑기를 조작했으리라고 믿는 건 아니다. 조작을 해도 좀 똑똑하게 하지 설마 이렇게 대놓고 티 나게 하겠는가.

그러니 당장은 이 상황을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자는 거고.

다만 행운을 낙관적인 태도로만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자신감은 좋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밀고 나갈 수 있는 끈기는 결국 자신감에서 오는 거니까.

하지만 자만은 안 된다. 자신과 자만을 헷갈려선 안 되는 거다.

자만심으로 가득 차서 여유나 부리던 탑독이 이를 악물고 칼을 갈아온 언더독한테 호되게 당하는 건 이미 반전의 대역전극 같은 말이 통하지도 않을 클리셰에 가깝다.

어? 역배충은 언제든 정배충 뚝배기를 깨버릴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고!

알겠어? 내가 언젠가 역배충한테 거하게 뒤통수를 털려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니까 잘 새겨들어라.

아무튼, 요컨대 내 말을 짧게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첫 번째 대결에 나가시게 됐는데, 각오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대단한 건 없고요. 그냥, 최선을 다해서 심사에 임할 생각입니다. 정말, 온 힘을 다해서요."

그저, 그것뿐이었다.

***

대진표와 각 참가자에게 주어진 과제의 발표가 전부 끝났다.

심사는 지체없이 진행됐다. 안 그래도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인 것에 겹쳐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한 참가자 일동은 군말 없이 심사에 임했다.

남은 인원 40명. 스무 번의 대결, 스무 명의 합격자, 그와 같은 수의 탈락자.

승리와 패배라는 극단적인 리턴과 리스크를 앞에 둔 참가자들의 긴장감이 이전에 없을 만큼 고조된다.

딱딱하게 굳은 수십 쌍의 눈앞으로 두 명의 참가자가 걸어 나왔다.

참가번호 39번과 참가번호 13번.

찬혁과 그 상대인 이우현이 마치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 입장하는 검투사처럼 날 선 기세를 두르고 조리대 앞에 우뚝 선다.

중심에 있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 두 사람.

먼저 고요를 깨트리고 나선 것은 찬혁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예, 잘 해봅시다."

인사를 받은 이우현이 선뜻 손을 내밀고, 찬혁이 그 손을 굳게 마주 잡았다.

그 순간, 이우현은 이 대결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 무슨 손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진 감촉이, 너무나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과장 조금 보태어 무슨 수백 살 먹은 나무껍질을 매만지는 느낌이었다.

칼과 팬을 휘두르느라 까진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그게 다시 까지고 그 위로 또 물집이 잡히길 반복한 것 같은 손이었다.

심사가 시작되기 전, 다른 참가자나 제작진 사이에서 '천재'라는 발언을 듣고 내심 질투했다.

'또 나에겐 없는 재능이란 축복을 가진 놈이 내 앞길을 막는구나.'

그런데 아니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이 손을 보고 재능 같은 말을 꺼낼 수 있을까.

18살 아이의 손이 아니다. 마치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이상 농축된 인생을 살기라도 한 걸까?

도통 이해하지 못할 불가사의한 생물체라도 보는 것 같은 이우현의 시선이 악수를 마치고 돌아선 찬혁의 등에 닿았다.

"……."

아무래도,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성싶다. 이우현이 여전히 거친 사포를 만진 것 같은 감촉이 남은 손을 꾸욱 움켜쥐었다.

***

본격적인 심사가 시작되기 앞서 김선옥이 두 사람 앞으로 나섰다.

심사에 대한 안내를 진행하는 겸, 시청자를 위한 설명을 위해서다.

"참가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부야베스는 프랑스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해산물 요리입니다. 부야베스의 시작은 어부 같은 노동자의 식사에서 비롯됐죠. 현대에 들어선 온갖 진귀한 해물이 들어간 부야베스가 고급 프렌치로 판매되기도 하지만 그 시작은 어디까지나 하층민의 요리였습니다."

그녀가 한 차례 숨을 고르곤 말을 이었다.

"하층민이 아니었다면 부야베스란 요리는 태어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부야베스란 마치 우리나라의 부대찌개처럼 어부들이 팔고 남은 상품성 없는 온갖 생선과 못난 야채 따위를 전부 한 솥에 넣어 끓여 만든, 단순하기 그지없는 요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온갖 생선을 모아 끓여 만든 덕분에 여타 요리에선 찾아볼 수 없는 깊은 맛이 생겨났죠. 그리고 그것에 눈독을 들인 프랑스의 상류층 사람이 값비싼 패류와 갑각류 따위를 넣어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에는 부야베스의 계파가 크게 둘로 나누어졌죠.

옛 어부들이 먹던 것처럼, 다양한 생선을 주로 이용해 끓이는 마르세유식 부야베스. 그리고 상류층의 변화를 적용하여 갑각류와 조개, 생선을 골고루 사용하는 파리식 부야베스입니다.

여러분은 이 부야베스를 여러분의 생각대로 재단장하여 제출해주십시오. 이번 심사는 오로지 누구의 요리가 더 뛰어났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됩니다. 승리하시는 분만이 저희와 함께 다음 심사를 받으실 수 있게 되고, 패배하시는 분은 이곳을 떠나시게 될 겁니다. 60분 드리겠습니다. 조리를 시작하세요."

─땡! 땡! 땡!

도통 언제 설치했는지 모를 공이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자마자 찬혁과 이우현이 동시에 활동을 개시한다.

한 손에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날랜 몸짓으로 뛰어간 장소는 다름 아닌 식재료가 모인 창고. 카메라를 든 스태프가 숨 가쁘게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식자재 창고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두 참가자가 재료를 챙기기 시작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 이미 레시피에 대한 구상은 끝낸 지 오래라는 증거다.

중계 화면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심사단이 저마다 이야기를 꺼냈다.

"두 사람 다 생선 말고도 여러 재료를 다양하게 챙기는군요?"

"파리식으로 메뉴를 정했다는 뜻이겠죠."

"납득이 가는 선택입니다."

김선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르세유식 부야베스도 결코 수준 낮은 요리는 아니지만, 부야베스처럼 향신료가 적고 식재료의 맛이 강한 메뉴는 식재료의 질에 크게 영향을 받죠. 부야베스도 본질은 스튜에요. 생선만 갖고 만든 육수와 생선에 더해 조개, 갑각류까지 사용한 육수의 수준 차이는 쉽게 메꾸지 못 해요. 비용을 도외시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려면 파리식을 고른 두 참가자의 선택이 옳은 선택이죠."

카메라가 김선옥을 클로즈업하며 멘트를 받아낼 동안, 어느새 재료 선택을 끝낸 그들이 다시금 자리로 돌아왔다.

육수가 필요 불가결한 요리에 60분이라는 시간은 제법 빠듯하다.

그것을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히 깨우친 두 사람은 그야말로 폭풍이 몰아치듯 손을 움직였다.

"오오."

"빠르다. 빨라요!"

"두 사람 다 시작한 지 3분 만에 생선 한 마리를 끝냈어요!"

여태껏 참가자 전원이 나선 대단위 조리 장면과는 달리, 이번에는 순수한 1:1. 그렇기에 보다 집중된 카메라가 찬혁과 이우현의 동작 하나하나를 다양한 각도에서 세심하게 잡아낸다.

다양한 소스는 곧 퀄리티의 상승. 온갖 편집재료가 뻥튀기처럼 불어나는 광경에 오대수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대결을 보여주는 두 사람. 숙련자의 눈으로 보아도 어느 쪽이 앞서 나가고 있는지 판단하기가 힘들만큼 엎치락뒤치락하던 그들 사이에, 비로소 변화의 낌새가 보이기 시작한다.

조리가 초반을 지나기 전까지 두 사람의 조리 과정은 비슷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메뉴를 만드는 이상 조리의 기본 골자는 결국 같을 수밖에 없다.

생선을 해체하고, 조개를 손질하고, 갑각류를 다듬는 일련의 작업.

그러나 그 초반 작업이 끝난 직후부터 두 사람의 작업에 차이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 13번 이우현 참가자가 살을 바른 대게 껍데기를 오븐에 굽습니다."

"저 기법은…… 아하, 과연. 갑각류를 사용해서 비스크를 만들 생각이군요. 비스크는 갑각류의 껍질을 사용해서 만드는 육수죠. 보통은 새우를 이용합니다만, 비스크는 껍데기가 단단한 갑각류를 사용할수록 맛이 좋은 육수가 나오거든요."

"다만, 껍데기가 단단할수록 그 맛을 제대로 뽑아내려면 시간이 그만큼 많이 필요합니다. 이우현 선수는 올리브유를 바른 대게를 오븐에 넣어 익히고 있어요. 저러면 껍질에서 수분이 사라져 맛이 응축되는 동시에 비린내가 가시고, 거기에 더해 껍질을 으깨서 볶기도 한결 수월해질 겁니다. 좋은 기법이에요."

김선옥의 해설이 끝나자마자 카메라는 행선지를 바꿔 찬혁의 방향을 바라봤다.

"류찬혁 참가자는…… 잠깐, 저거 뭐죠? 류찬혁 참가자가 가느다란 뭔가를 잔뜩 쌓아두고 닦고 있는데요?"

"저건…… 닭발! 닭발입니다! 류찬혁 참가자, 솔로 닭발을 꼼꼼히 세척하고 있어요!"

"류찬혁 참가자는 닭발로 육수를 뽑을 생각인 듯 보입니다!"

호오. 속으로 작게 감탄 섞인 콧소리를 흘린 김선옥이 찬혁을 바라봤다.

해산물 스튜에 닭발 육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닭을 통째로 사용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닭발만을 사용해 뽑은 육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닭발은 닭의 모든 부위를 통틀어 가장 담백한 육수가 나오는 부위인 동시에, 가장 콜라겐이 많이 함유된 부위이기도 하다.

닭발을 졸여서 그 국물을 냉장고에 식히면 묵이 되어 버릴 정도니, 육수에 녹아 나오는 콜라겐 함량이 얼마나 많은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육수는 여타 육수보다 조금 더 질은, 마치 양식에서 보이는 루를 넣은 스튜나 중식의 전분물을 넣은 육수처럼 찐득한 농도를 갖게 된다.

그런 육수로 스튜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

'스튜 자체에 일체감이 굉장히 높아지지.'

예를 들자면 라면과 파스타처럼, 닭발 육수로 만든 스튜의 국물은 건더기에 보다 질척하게 들러붙는다.

그렇게 된 스튜는 기존보다 느끼한 맛이 강해지긴 하지만, 그 대신 국물에서 건더기로 양념과 간이 침투하며 밴 간에 더해 국물이 건더기 표면에 들러붙어 먹는 이에게 보다 강렬한 맛과 일체감을 선사하게 되는 것이다.

'해산물 스튜'라는 점에 집중하여 비스크 기법을 사용해 해물 맛이 강한 육수를 만드는 이우현.

'스튜 요리'라는 점에 집중하여 육수와 건더기의 조화에 힘을 쏟는 류찬혁.

둘 중 누구도 틀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경우에는 두 사람 다 옳은 선택을 했다고 보아야겠지.

그야 당연한 일이다. 두 사람 다 1, 2차 심사를 뚫어 기어코 3차 심사까지 진출한 베테랑 요리사.

그런 두 사람이 틀린 선택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이 승부는, 분명 어느 쪽의 선택이 더 옳았는가를 겨루는 대결이 되겠지.

흥미에 젖은 시선이 당도한 저 끝에서, 찬혁과 이우현. 두 사람은 그다음 페이즈로 나아갈 준비를 서서히 끝마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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